난징…2만명 수용하는 과거시험장 ‘강남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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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공원이 세워진 송 건도(乾道) 4년(1168)부터 과거제가 폐지되기까지, 800여명의 장원과 10만여명의 진사가 이곳에서 배출되었다. 명·청 시기에는 중국 전역에서 절반이 넘는 관리가 강남공원에서 나왔다. 명실상부한 ‘중국 관리의 요람’이었던 것이다.

“이 책은 부귀공명을 골간으로 한다. 부귀공명을 흠모하는 마음에 비열한 작자에게도 알랑거리는 이가 있고, 부귀공명에 의지해 거드름을 피우는 이가 있고, 부귀공명에 뜻이 없는 듯 고결하게 굴다가 남에게 간파되어 비웃음거리가 되는 이도 있다. 부귀공명을 끝까지 마다하며 최상의 품격에 도달한 이는 황허의 세찬 물살 속에서도 굳건한 기둥 같은 존재가 된다.”

부귀공명을 뼈대로 삼았노라고 서문에서 말하고 있는 이 책은 청나라 때의 풍자소설 <유림외사(儒林外史)>다. 유림외사란 ‘유가 지식인 사회의 야사’라는 의미다. 유가 지식인 사회에서 부귀공명의 루트는 ‘과거’였다. 부귀와 공명을 얻기 위해 몸부림치는 지식인, 그렇게 일그러진 괴물을 양산해내는 과거제도, 저자 오경재(吳敬梓, 1701~1754)는 ‘유림’의 심장부를 거침없이 희화화한다. 부귀공명을 얻고자 한다면 과거제도의 자장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시대, 당시 지식인은 과거의 노예가 될 수밖에 없었다. <유림외사>는 그렇게 예속화된 지식인의 속물근성을 신랄하게 보여준다.

과거의 아웃사이더 오경재
오경재는 서른셋에 고향 안후이 취안자오(全椒)를 떠나 난징으로 왔다. 그는 일찍이 열셋에 어머니를 여의고 스물셋에는 아버지를 여의었다. 유산을 둘러싸고 친척들과 다툼까지 있었던 고향에 더 이상 미련이 없었을 것이다. 난징으로 이사한 몇 년 뒤(1736) 추천을 받아 박학홍사과(博學鴻詞科)에 응시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그런데 당뇨병이 심해져서 결국 시험을 보지 않았다고 한다. 그가 형식적인 팔고문 중심의 과거제도를 혐오했기에 자발적으로 시험을 거부한 것이라는 설도 있다. <유림외사>에서 긍정적으로 묘사되는 두소경(杜少卿)이 바로 오경재 자신을 비유한 인물이라고 하는데, 그들은 조상의 뜻을 따르지 않은 ‘불초(不肖)’한 자손이었다. 두 사람 모두 과거의 길을 걷지 않았다. 명망 있는 집안의 후손인 두소경은 돈을 하찮게 여기고 남을 돕기를 즐겼으며 세도가를 경시했다. 가산을 탕진한 그는 고향을 떠났지만 늘 즐겁게 살았다. 오경재의 삶은 바로 두소경과 같았다. 마음 가는 대로 유유자적한 삶을 살았던 오경재의 만년은 매우 빈곤했다. 글을 팔아 살면서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겨울날 저녁이면 그는 친구와 함께 성밖을 돌면서 노래했다. 오경재는 이를 난족(暖足), 즉 ‘발을 덥힌다’고 했는데, 난방을 해결할 수 없을 정도로 가난했던 것이다.

강남공원의 명원루

강남공원의 명원루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과연 오경재는 박학홍사과에 응시했을까? 분명한 사실은, 그랬다면 <유림외사>는 결코 세상에 나올 수 없었다는 것이다. 부조리한 시스템의 공모자가 아니었기에 그 부조리를 가차없이 비판할 수 있었다. 절대다수의 지식인이 그 시스템의 공모자였다는 게 시대의 비극이다. 오경재는 청나라가 번영을 구가하던 강희·옹정·건륭 시기에 살았다. 소위 강건성세(康乾盛世)라는 당시에 아이러니하게도 문자옥(文字獄)이 자행되었다. 문자옥은 한족 지식인을 옭아매는 수단이었다. 말과 글로 인해 죄를 입지 않기 위해서, 지식인은 감히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지극히 형식적인 팔고문을 익혀 과거에 합격해 관리가 되는 것, 이것이 바로 지식인에게 정해진 루트였다. ‘권력-지식’을 구현한 이 루트에서 벗어나는 것은 소외와 배고픔을 의미했다.

십리진회의 강남공원과 부자묘
중국을 지배해온 과거 시스템의 역사는 질기고 길다. 수나라 때부터 시작되어 청나라 광서 31년(1905)에 폐지령이 내려지기까지 무려 1300여년, 그동안 얼마나 많은 인생이 과거에 웃고 울었을까. 그들 중 상당수가 거쳐 갔을 과거시험장이 바로 난징에 있다. 난징의 ‘강남공원(江南貢院)’은 최대 규모의 과거시험장이었다. 무려 2만명이 동시에 시험을 치를 수 있었던 규모다. 강남공원이 세워진 송 건도(乾道) 4년(1168)부터 과거제가 폐지되기까지, 800여명의 장원과 10만여명의 진사가 이곳에서 배출되었다. 명·청 시기에는 중국 전역에서 절반이 넘는 관리가 강남공원에서 나왔다. 명실상부한 ‘중국 관리의 요람’이었던 것이다.

과거제 폐지와 더불어 강남공원 역시 용도 폐기된다. 민국 7년(1918)에 강남공원 대부분이 철거되고 명원루·지공당·형감당 및 호사(號舍) 일부만 남겨졌다. 난징국민정부가 수립(1927)된 뒤 명원루는 시정부 대문의 역할을 했고, 강남공원의 옛 건물들은 정부 각국(各局)의 사무실로 사용되었다. 항일전쟁 시기에는 왕징웨이 정권의 행정원과 최고법원이 이곳에 들어섰다.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이후에는 난징시 중의원(中醫院)이 이곳을 사용했다. 강남공원이 유적지로서 보호된 것은 1980년대에 들어와서다. 2014년 8월 11에 개관한 ‘중국과거박물관’은 바로 강남공원에 자리하고 있다.

공원, 즉 과거시험장에서 가장 흥미로운 공간은 일종의 개인 시험 방이라고 할 수 있는 ‘호사(號舍)’다. 사방을 감시할 수 있는 명원루(明遠樓) 양쪽으로 1인 1칸의 호사가 마치 마구간이 늘어서 있듯 연이어 있었다. 폭이 1.5m도 되지 않는 호사는 수험생이 아흐레 동안 숙식하며 시험을 치르는 곳이었다. 물론 방의 문은 없었다. 양쪽 벽을 가로지르는 나무판 두 개 가운데 위판은 책상, 아래판은 걸상의 용도였다. 밤이면 위판을 꺼내고 아래판에서 잤다. 당연히 다리를 펴고 자는 건 불가능했다. 이런 공간에서 과거를 치른다는 것은 불편함 그 이상이었다. 심지어는 상한 음식을 먹고 죽거나 독사에 물려서 죽는 경우도 있었다.

오경재 기념관

오경재 기념관

거지·죄인·벌·새·원숭이·파리·비둘기, 다름 아닌 과거 수험생의 7가지 모습을 빗댄 표현이다. 이 재미난 비유는 <요재지이(聊齋志異)>에 나온다. 포송령(蒲松齡, 1640~1715)은 여러 번 낙방한 뒤 과거에 마음을 접고 <요재지이> 창작에 몰두했다. 과거가 사람을 어떻게 쥐락펴락했는지, 앞의 7가지 비유를 통해 알아보자. 과거시험장에 들어갈 때는 맨발에 대바구니를 든 ‘거지꼴’이다. 부정행위를 방지하기 위해서 모든 지참물은 대바구니에 넣은 채 신발까지 벗고 검사를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관리들이 호통 치면서 이름을 부를 때면 마치 ‘죄수’ 같다. 문이 없는 호사에 들어가 시험을 치를 때면 얼굴과 발이 드러나니, 늦가을 추위에 떠는 ‘벌’과 같다. 시험을 끝내고 나오면 정신이 어지럽고 하늘과 땅의 색깔마저 달리 보이니, 마치 새장에서 나온 병든 ‘새’와 같다. 시험이 끝났다고 끝이 아니다. 결과가 발표될 때까지 합격과 불합격의 길몽과 악몽이 갈마든다. 고대광실이 바로 눈앞에 있는 듯하다가도 홀연 백골로 변한 느낌이 든다. 좌불안석 어쩔 줄 모르는 모습이 마치 줄에 묶인 ‘원숭이’ 같다. 드디어 발표일, 합격자 명단에 자신의 이름이 빠진 걸 알게 되는 순간 얼굴이 샛노래지고 죽은 사람처럼 멍해져서는 독약을 먹은 ‘파리’처럼 건드려도 감각이 없다. 처음엔 실망과 분노에 차서 과거 따위는 다시는 안중에도 두지 않을 기세다. 그러다 시간이 흐르면 마음도 가라앉고 다시 과거를 치르고 싶어 근질근질해진다. 마치 알을 깨버린 ‘비둘기’가 나뭇가지를 물어다 둥지를 틀고 다시 알을 품으려는 것과 같다. 이런 상황을 두고 포송령은 이렇게 말한다. “당사자는 목메어 울면서 죽고 싶겠지만 곁에서 지켜보는 사람은 이보다 더 우스운 게 없다.”

대부분의 과거 수험생은 거지에서 비둘기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되풀이해야 했다. 강남공원의 수험생 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았던 이는 103세였다고 한다. 믿기 힘들긴 하지만, 아무튼 과거의 개방성을 대변하는 동시에 그 소모성의 끝을 보여주는 사례다.

강남공원 서쪽에는 공자 사당인 부자묘(夫子廟)가 있다. 난징 부자묘는 중국의 4대 문묘(文廟) 중 하나다. 동진 함강(咸康) 3년(337)에 태학을 세웠을 때는 학궁만 있고 공자 사당은 없었다. 송 경우(景祐) 원년(1034)에 이르러서야 학궁 앞쪽에 공자 사당을 세웠다. 부자묘 근방은 난징의 젖줄인 진회하(친화이허)를 구경하기에 가장 좋은 장소다. 육조시대부터 청나라에 이르기까지 난징의 명문대가는 죄다 이곳에 몰려 있었다. 부자묘를 중심으로 한 진회하 풍경지대는, 동쪽의 동수관(東水關)에서 시작해 문덕교(文德橋)를 지나 서수관(西水關)에 이르는 구간이다. ‘십리진회(十里秦淮)’로 불리는 이 일대는 난징의 역사와 문화가 집결된 유적으로 가득하다. 그 가운데 첨원(瞻園)은 난징에서 가장 오래된 명나라 때의 고전 원림으로, ‘금릉의 제일 원림’으로 칭송된다. 주원장이 황제가 되기 이전 오왕(吳王)이라 자칭했을 때 그의 저택이었던 이곳은 훗날 개국공신 서달(徐達)에게 하사되었다. 청나라 때는 관청으로 사용되었는데, 건륭제가 강남을 순시할 때 이곳에 들러 ‘첨원’이라는 편액을 하사했다. 태평천국 시기에는 동왕(東王) 양수청(楊秀淸)의 왕부가 되기도 했고, 민국시기에는 여러 정부기관이 이곳에 자리했다. 1958년에는 ‘태평천국 기념관’이 이곳으로 옮겨왔다. 1961년에 태평천국 기념관은 ‘태평천국 역사박물관’으로 개칭했다. 태평천국 역사박물관에는 태평천국과 관련된 문물 2800여점을 비롯해 수많은 사진과 문헌자료를 소장하고 있다.

태평천국 역사박물관의 홍수전 흉상

태평천국 역사박물관의 홍수전 흉상

과거에 낙방한 홍수전과 태평천국
그러고 보면 태평천국을 세운 홍수전(洪秀全, 1814~1864)이야말로 과거로 인해 인생행로가 극적으로 바뀐 인물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과거를 통한 입신출세를 꿈꿨다. 열넷에 첫 과거에서 낙방한 그는, 결국 네 번째 과거에서 낙방한 서른부터는 과거에 대한 미련을 버렸다. 포기가 아니었다. 새로운 지향점을 찾은 것이다. 그 계기는 7년 전(1836) 과거시험장 앞에서 어떤 남자가 나눠준 <권세양언(勸世良言)>이라는 책이었다. 당시 홍수전은 그 책을 읽을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두 해를 연달아 부시(府試)에서 낙방한 그는 깊은 좌절감에 빠진다. 몸과 마음이 모두 극한의 상태로 치달은 그는 수십일 동안 열병을 앓았다. 그리고 환상의 세계를 체험하게 된다. 천상으로 올라간 홍수전은 금빛 수염을 기른 노인을 만나게 된다. 노인은 그에게 사악한 것을 퇴치하라고 하면서 칼과 황금 인장을 건네주었다. 홍수전은 어떤 남자와 함께 요괴를 쫓아냈다. 이 꿈의 의미를 그는 아직 알 수 없었다. 몸을 추스른 그는 다시 과거를 준비했다. 그리고 네 번째 낙방! 이때 홍수전의 친척이 놀러 왔다가 그가 가지고 있던 <권세양언>을 빌려갔다. <권세양언>은 중국인 최초로 목사가 된 양발(梁發)이 성경을 발췌해 만든 것이다. 홍수전의 친척은 무척 흥미진진하게 그 책을 읽었고 홍수전에게도 그 책을 읽어보라고 권한다. 하느님·천지창조·천국·악마·심판 등의 내용이 담긴 <권세양언>을 읽고 홍수전은 깨닫는다. 그 옛날 의미를 알 수 없었던 꿈이 바로 계시였음을! 노인은 하느님이고, 자신과 함께 요괴를 쫓아낸 남자는 예수다. 홍수전은 자신이 누군지 깨달았다. 하느님의 아들이자 예수의 동생!

지상에 천국을 건설하려는 홍수전에게 과거는 이제 아무 의미가 없었다. 그는 유교 사당을 파괴하고, 상제를 섬기는 배상제회(拜上帝會)를 조직했다. 열렬한 추종자들이 급속히 늘어났고, 1851년에 마침내 태평천국을 세우게 된다. 태평천국의 천왕(天王)임을 선언한 홍수전은 만주족 정부를 악마로 규정하고 성전을 선포했다. 태평천국군은 파죽지세로 중국 남부를 점령했고, 1853년에는 난징을 함락했다. 난징은 태평천국의 수도로서, 태평천국이 멸망한 1864년까지 천경(天京)이라 불렸다. “논밭이 있으면 함께 경작하고 음식이 있으면 함께 먹고 옷이 있으면 함께 입고 돈이 있으면 함께 쓴다.” 평등한 지상낙원, 이것이 태평천국의 원칙이자 이상이었다. 착취와 차별과 굶주림에 시달리던 이들은 태평천국에 열렬한 호응을 보냈다. 하지만 태평천국은 서구 열강의 지원을 받은 청나라 조정에 의해 멸망당하고 만다. 태평천국군을 진압한 일등공신인 증국번은 한족 출신의 유가 관료였다. 증국번은 공자의 위패와 사당을 부숴버린 홍수전을 중국의 파괴자라고 생각했다. 한족 지식인에게는 만주족과 한족이라는 민족의 경계보다는 ‘공자’라는 부호가 ‘중국’의 정체성으로서 훨씬 더 유의미했던 것이다. 천경이 함락되기 한 달 전 홍수전은 세상을 떠났다. 증국번은 그의 무덤을 파헤쳐 시신을 불태웠다. 그리고 2년 뒤(1866), 홍수전의 고향 광둥에서 쑨원이 태어났다. “제2의 홍수전이 되겠다”고 어릴 적부터 다짐하던 그는 청나라를 무너뜨린 신해혁명의 주인공이 된다. 신해혁명은 만주족 왕조를 타도한 배만(排滿)혁명이었다. 그러고 보니, 쑨원은 과거에 뜻을 둔 적이 없다. 과거제도가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던 1905년, 쑨원은 일본 도쿄에서 중국동맹회를 결성하고 반청 혁명운동을 전개했다.

‘십리진회’에 공존하고 있는 오경재 기념관, 강남공원과 부자묘, 태평천국 역사박물관의 풍경은 흥미롭기 그지없다. 전통 시스템을 떠받친 과거와 유교, 그 축을 굳건히 수호하고자 했던 이들과 그 대척점에서 균열을 내려 했던 이들의 공존. 의미심장하다.

<연세대 인문학연구원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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