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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경제관료 박봉주 중용,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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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차 조선노동당대회서 정치국 상무위원과 중앙군사위원에 올라 실세로 부상

북한이 지난 6~9일 제7차 조선노동당대회를 열었다. 국내외에서는 최고지도자 김정은의 ‘노동당 위원장’이라는 새 직책이나 핵 보유국 기정 사실화에 주목했다. 이번 당대회에서 가장 돋보인 부분은 사실상 김정은도, 정치국 상무위원에 복귀한 실세 최룡해도 아니다.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인물은 단연 박봉주(77)라는 평에 점점 힘이 실리고 있다. 박봉주로 대표되는 경제개혁파의 성적표는 김정은 체제의 성패를 좌우할 시금석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내각총리를 맡은 박봉주는 7차 당대회에서 당 정치국 상무위원에 올랐다. 상무위원은 북한의 실세 중에 실세가 차지하는 자리다. 기존에 김정은 위원장과 대외 국가수반인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황병서 인민군 총정치국장 3인에서 이번에 박봉주 총리와 최룡해 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이 포함됐다.

나아가 박봉주는 당 중앙군사위원회 위원에도 올랐다. 군을 당적으로 지도하며 이끄는 황병서에 이어 두 번째로 호명됐다. 북한 인민군은 조직 특성상 노동당의 지휘를 받는다. 조직상 박봉주는 인민군을 지배하는 당 서열 3위인 셈이다. 민간인 내각총리로서는 전례가 없는 일이다.

김정은 북한 노동당 제1비서가 2012년 7월 당시 박봉주 당 경공업부장(오른쪽 두 번째)과 함께 평양 양말공장을 찾았다고 노동신문이 3일자 1면에 보도한 사진. 가운데 뒤는 이듬해 12월 숙청된 장성택 국방위원회 부위원장. / 연합뉴스=조선중앙TV

김정은 북한 노동당 제1비서가 2012년 7월 당시 박봉주 당 경공업부장(오른쪽 두 번째)과 함께 평양 양말공장을 찾았다고 노동신문이 3일자 1면에 보도한 사진. 가운데 뒤는 이듬해 12월 숙청된 장성택 국방위원회 부위원장. / 연합뉴스=조선중앙TV

김정일 시대 경제개혁 조치 주도
박봉주는 북한 경제개혁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함경북도 성진시(현 김책시) 출생으로, 덕천공업대학을 졸업한 경제기술 관료다. 1962년 평북 용천식료공장 지배인을 시작으로 80년 6월 당 중앙위 후보위원에 뽑혔다. 83년에는 남흥청년화학연합기업 당위원회 책임비서를 거쳐 98년 장관급인 화학공업상에 올라 2003년 9월까지 있었다. 2002년 10월 북한 경제시찰단으로 장성택 전 국방위 부위원장과 함께 남한을 8박9일 방문해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놀이공원 등을 둘러보기도 했다.

경제시찰단이 돌아가기 전날 국내 시장을 보여달라고 해 데려간 곳은 동대문 두산타워였다. 너무 열심히 질문하고 적어서 기자들이 이유를 묻자 박봉주는 “기자 선생, 지금 볼 게 너무 많은데, 눈이 두 개뿐이다. 말 좀 걸지 말라”고 한 일화가 있다. 당시에 이어 2004년 5월 장관급 회담차 방북해 박봉주 총리를 만났던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은 “박봉주는 장성택처럼 자기 세력도 없고 꾸준히 노력해 실력으로 올라온 인물”이라며 “지금 북한 경제가 저 정도라도 굴러가는 건 박봉주 덕으로 본다”고 말했다.

특히 주목받은 것은 김정일 시대 경제개혁의 신호탄이던 2002년 ‘7·1 경제관리 개선조치’를 주도한 일이다. 사회주의 계획경제 틀 안에서 일부 시장 원리를 도입한 시도다. 임금 및 물가 현실화, 배급제 변화, 기업소에 경영의 자율권을 일정 부분 보장해줘 생산성을 높이는 방향이었으나 ‘자본주의 시도’로 매도당했다. 2003년 총리에 올라 개혁에 나섰으나 당 원로나 군부와의 마찰로 2007년 4월 해임돼 평남 순천비날론연합기업소 지배인으로 좌천됐다. 그런 박봉주가 2010년 8월 당 경공업부 제1부부장으로 전격 복귀했다. 김정은이 후계자로 공식 등장한 노동당 제3차 대표자회(9월) 직전이다.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이 5월 10일 오전 평양 김일성광장에서 열린 제7차 노동당대회 경축 평양시 군중대회 및 군중시위를 보며 박봉주 내각총리와 대화하고 있다./연합뉴스=조선중앙TV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이 5월 10일 오전 평양 김일성광장에서 열린 제7차 노동당대회 경축 평양시 군중대회 및 군중시위를 보며 박봉주 내각총리와 대화하고 있다./연합뉴스=조선중앙TV

한때 좌천, 김정은 체제에서 다시 등장
김정은이 노동당 제1비서로 후계세습을 이룬 2012년 4월 제4차 당대표자회에서 박봉주는 경공업부장에 올랐다. 그해 7월 3일자 <노동신문> 1면 사진은 김정은 체제에서 박봉주의 의미를 단적으로 보여줬다. 김정은의 평양 양말공장과 아동백화점 현지지도 소식을 전하면서 박봉주 수행 모습을 보여줬다. 김정일 국방위원장 때 좌절된 경제개혁을 김정은 시대에 재시도하겠다는 강한 포석으로 읽혔다.

박봉주는 2013년 3월 말 당 중앙위 전원회의에서 정치국 위원에 올랐다. <조선중앙통신>은 “현실발전의 요구에 맞게 경제지도를 근본적으로 개선하며 주체사상을 구현한 우리 식의 당 우월한 경제관리 방법을 완성해야 한다”고 전했다. 박봉주의 위상을 높여주고, 경제 개선에 힘을 실은 회의다. 이튿날 북한은 국회 격인 최고인민회의를 열어 박봉주를 6년 만에 다시 내각총리에 앉혔다.

이즈음해서 북한 내부에는 작지만 의미있는 변화들이 감지됐다. 흔히 ‘6·28 방침(조치)’으로 통용되는 협동농장 관리방식의 변화다. 협동농장에 작업분조 단위를 그동안 10~25명에서 4~6명씩(사실상 가족영농)으로 작게 나눠서 관리하고, 작업분조에 따라 토지와 생산비용을 할당하는 등의 방침으로 알려졌다. 당에 생산물을 일정분 보내고 남는 부분은 장마당 등에서 처분할 수 있는 권한까지 부여했다는 소문도 파다하다. 또 텃밭도 30평 수준에서 50평, 200평으로 늘린 뒤 최근에는 1000평까지 허용했다는 정보도 흘러나왔다. 이를 통해 북한이 농업 생산량을 늘렸다고 한다.

또 기업소에도 경영 자율권을 일정 부분 보장해주는 일명 ‘5·30 조치’가 2012~13년 즈음 내려졌다는 소식도 전해졌다. 일정 생산량 이외 처분권, 판매권이나 인센티브를 주는 방식이다. 이런 조치들을 이끄는 인물은 박봉주일 개연성이 높다. 양무진 북한대학원대 교수는 “이런 조치들은 아직 시범사업으로 일부 지역이나 기업소에 국한된 것 같다”며 “북한이 자신감을 바탕으로 적용 범위를 점진적으로 넓혀나가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김정은 제1비서는 2012년 4월 김일성 생일 100주년 기념 열병식에서 한 연설에서 “우리 인민이 다시는 허리띠를 조이지 않게 하겠다”고 공언했다. 김정은은 당시 ‘사상강국’ ‘군사강국’에 이어 ‘경제강국’ 건설을 강조했다. 다만 북한은 중국이나 베트남식 개혁개방 노선이 아니라 ‘자강력’을 통해 스스로 돌파구를 찾겠다는 쪽이다. 이번에 ‘국가경제발전 5개년(2016~2020년) 전략’도 같은 연장선에 있다. 눈에 띄는 대목은 전력 등 에너지 산업 육성과 무역, 경제개발구를 강조한 것이다.

김 위원장은 당대회 총화보고에서 “경제 전반을 놓고 볼 때 어떤 부문은 한심하게 뒤떨어져 있다”고 시인했다. 첫째 과제로 전력 해결을 “5개년 전략 수행의 선결조건이며 경제발전과 인민생활 향상의 중심고리”라고 규정했다. 과거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 사업차 방북했던 한 전문가는 “북한은 지하자원도 많기 때문에 전력 공급만 늘어도 그 체제가 상당히 돌아갈 수 있겠더라”고 말했다.

조봉현 IBK경제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은 “북한이 4년 연속 경제성장을 하고 장마당 등 효과를 더하면 실제로는 2014년에 3% 넘게 성장한 것으로 추산된다”면서도 “특히 전력사정은 안 좋다”고 지적했다. 지난해 10월 개성 만월대 유적지에서 발굴한 유물 전시회 개막식 및 학술회의 참석차 방북한 조 위원은 “개성 주택에 태양광 발전기를 설치했으나 패널이 중국산이고 하루에 1시간 정도만 전력 생산이 가능한 상태였다”고 밝혔다. 조 위원은 “개마고원 등에 풍력발전을 하려고 해도 외부 돈과 기술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그럼에도 김 위원장은 ‘자강력 제일주의’ ‘우리식 경제관리방법’을 내세우고 있다. 당대회 후 첫 공개행보로 기계설비전시장을 찾은 위원장은 “우리가 믿을 것은 오직 자기의 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북한은 핵, 장거리미사일 기술력을 민간 경제부문으로 활용할 수 있다고 판단하는 것 같다.

[포커스]북한 경제관료 박봉주 중용, 왜?

경제강국 건설 ‘자강력’만으로 힘들 듯
북한이 대중·대남관계 등 개선으로 외부에서 돌파구를 찾지 못하면 경제강국 건설은 어려울 것이라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양무진 교수는 “5개년 계획이 목표도 제시하지 못하는 등 아직 모호하다”면서도 “2014년 1%대 경제성장률과 2012년 이후 3년 동안 연간 30만톤 식량 증산, 장마당과 휴대폰 보급 확대 같은 움직임에 비춰볼 때 대외관계가 개선되면 경제개발 목표가 구체화될 것”이라고 말했다.

김정일 위원장 말년에 북한에서는 <오늘을 추억하리>라는 공연이 곳곳에서 펼쳐졌다. <조선중앙통신>은 “내일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친 인간은 오늘을 떳떳이 추억하게 된다”고 주민들을 독려했다. 북한은 당대회 전까지 70일 전투에 이어 ‘만리마 운동’ 같은 대대적인 노력동원에 나선 것으로 알려졌다. 사상, 군사 면에 자신감을 가진 김정은 정권이지만 결국 인민대중의 지지를 얻지 못하면 부담이 커질 수밖에 없다.

올 4월 말~5월 초 중국 옌볜 등 동북3성을 둘러보고 북한 사회과학원 쪽과 교분이 있는 옌볜대 학자들을 만난 전문가들을 만난 황재옥 평화협력원 부원장은 “김정은 정권의 경제개발 의지는 강하며 450여 장마당이 돌아가는 현실을 되돌릴 수는 없다고 보고, 오히려 편승해서 경제개혁을 하자는 입장 같았다”고 전했다. 탈북자 출신 주승현 전주기전대학 교수는 “북한 주민들이 당대회에 개혁개방 같은 획기적 조치를 기대했는데, 실망감도 크다고 한다”며 “다만 김정일 때는 체제 안정이 우선이어서 박봉주의 개혁이 군의 제동을 받았지만 지금은 체제가 안정돼 있어 박봉주를 필요로 한다”고 말했다.

김정은 체제는 상류층에 국한되기는 했으나 적잖은 변화는 보여주고 있다. 돌고래쇼장인 곱등어관, 놀이공원인 개선청년공원, 만경대유희장, 마식령 스키장 등이 세워졌다. 2012년 릉라도인민유원지 준공식에서 류훙차이 주북 중국대사, 고모 김경희 비서 등과 ‘회전매’라는 놀이기구까지 직접 타 보이기도 했다. 그러면서 개혁개방 가능성에는 선을 그었다.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대변인은 당시 “개혁개방이니 하는 것을 기대하는 것은 해가 서쪽에서 뜨기를 바라는 것 같은 어리석고 미련한 개꿈에 불과하다. 어떤 다른 불순한 것과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고 일침을 가했다. 오히려 장성택 처형에서 보듯 체제 결속은 더 공고해졌다.

박봉주로 대표되는 개혁세력이 회전매를 스스로 계속 돌릴 수 있을지 외부는 걱정스런 시선으로 지켜보고 있다. 아니면 박남기 당 계획재정부장(2009년 화폐개혁 실패로 이듬해 처형) 같은 희생양만 찾게 될 수도 있다. 이번에도 박봉주의 실험이 실패한다면 북한은 물론 동북아의 위험은 더 고조될 가능성이 높다. 비핵화회담, 평화협정을 포함해 외부 협력이 더 절실해진 이유다.

조선노동당 기능 회복, 경제개혁 힘 실리나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 시대의 통치방식, 조직체계에서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당 기능 정상화다. 적어도 군을 지나치게 앞세운 아버지 김정일 국방위원장(2011년 12월 사망) 시절과는 달라졌다.

내부적으로 2009년 1월쯤 후계자로 지명됐다는 김정은이 공식 등극한 것은 2010년 9월 당 대표자대회를 통해서였다. 무려 44년 만에 치러진 당 대표자회 전날 김정은은 김정일 위원장 명의로 ‘인민군 대장’ 칭호를 받았다. 이튿날 ‘당 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을 첫 공식 직함으로 받았다. 유명무실해졌던 당 중앙군사위를 부활시키면서다. 당시 정부 당국자나 다수 전문가조차 단지 “후계세습을 위해 노동당에 한 자리를 만들어 뒷문으로 들어가는 꼼수” 정도로 폄하했다. 그러나 이는 비판에만 골몰한 나머지 김정은 시대의 특징을 정확히 짚지 못한 패착이었다. 김정은의 등장 방식부터 당 기능을 복원시키는 신호탄이었고, 올해 7차 당대회에서 마침표를 찍은 격이다.

그럼 북한 체제가 달라졌을까. 군사주의를 표방하는 체제 본질이 바뀐 건 거의 없어 보인다. 김태우 건양대 교수(전 통일연구원장)는 오히려 ‘선핵정치’를 표방한 것이라고 해석한다.

그렇지만 당 기능 회복은 상당한 의미를 지닌다. 김연철 인제대 통일학부 교수는 “김정일 시대도 당 영도 원칙은 유지됐으나 인사나 정치국 회의 같은 제도 측면에서 작동되지 않았는데, 이제는 당 기능을 정상화한 것이 중요한 차이”라고 말했다.

선군정치는 1994년 김일성 주석 사망과 ‘고난의 행군’으로 일컫는 위기 때 체제를 지탱시키려던 김정일의 비상통치 방식이다. 자원배분 등이 군 위주로 돌아가게 됐다. 그 결과로 군부 영향력이 너무 커졌다. 군이 대외무역, 자원수출, 외화벌이 등 각종 이권사업까지 깊숙이 개입했다. 광물은 물론 송이버섯, 생수 판매까지 챙겼다.

김정은이 나서서 맨 먼저 한 작업들은 이런 군부의 힘 빼기였다. 리영호 군 총참모장을 비롯해 현영철 인민무력부장을 숙청하고 간부를 연거푸 갈아치운 일련의 조치들이 실례다. 이번 당대회에서 보듯 원로의 상징인 리용무(91)·오극렬(86) 국방위 부위원장 등 군 원로들도 당 정치국에서 물러났다. 당 내에서도 정치국, 정무국 등에 군 출신은 서열이 과거보다 뒤로 밀렸다는 점도 두드러진다.

앞서 노동당 당헌이나 당규약 개정을 통해 ‘당의 지도를 받는 인민군’이라는 점도 분명히 했다. 올해 3월 김정은이 군 훈련을 참관하며 “핵무력에 대한 유일적 영군체계와 관리체계를 철저히 세우라”고 지시한 <조선중앙통신> 보도는 상징적이다. 김정은의 핵무기 통제권을 확인시킨 것으로 대내외에 보낸 메시지다.

김정은 체제의 노동당이 군을 확실히 통제하는 게 맞다면 인민대중보다 군을 앞세운 선군정치는 약화될 가능성이 높다. 7차 당대회에서 박봉주가 특히 당 중앙군사위 위원에 오른 것은 이런 면에서 상징적이다. 정성장 세종연구소 통일전략연구실장은 “이는 북한 경제의 지속적 성장에 대한 박 총리의 기여를 긍정 평가하고 박봉주의 개혁 드라이브에 힘을 실어주는 의미가 있다”며 “박봉주가 당중앙군사위원에까지 선출돼 경제건설에 대한 군부의 협조를 이끌어내는 것이 더욱 수월하게 됐다”고 평가했다.


<전병역 기자 junb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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