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전위적 록밴드 ‘라디오헤드 실종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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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일 밴드의 공식 웹사이트(radiohead.com)와 페이스북, 트위터 등 소셜미디어 계정에 밴드의 흔적이 한꺼번에 사라졌다. 이 해프닝을 두고 언론과 팬들은 9번째 정규앨범 발매가 임박한 것 아니냐고 추측했다.

미국의 음악비평 웹진 ‘피치포크 미디어’는 영국의 록밴드 라디오헤드를 시대를 상징하고 정의하는 밴드로 규정했다. 라디오헤드의 음악은 어느 한 장르로 규정하기 힘들 정도로 창조적이고 전위적이다. 그런데 그런 시대의 밴드가 온라인에서 종적을 감췄다.

지난 1일(현지시간) 밴드의 공식 웹사이트(radiohead.com)와 페이스북, 트위터 등 소셜미디어 계정에서 밴드의 흔적이 한꺼번에 사라졌다. ‘라디오헤드 실종사건’이라 불린 이 해프닝을 두고 언론과 팬들은 9번째 정규앨범 발매가 임박한 것 아니냐고 추측했다.

트위터에는 이미 지난달 30일부터 전조가 있었다. 몇몇 팬에게 보냈다는 ‘Burn The Witch(마녀를 불태워라)’라고 적힌 수상한 전단 사진이 돌아다녔다. 전단 하단에는 빅브라더식 말투로 ‘우리는 네가 어디 있는지 안다’라는 문구도 적혀 있다. 음악매체와 팬들은 ‘Burn The Witch’가 새 앨범에 실릴 곡의 제목이라고 예상했다. 미국 음악비평지 <롤링스톤>은 “밴드는 예전 노래를 새 앨범에 되살리는 경우가 많다”면서 보컬 톰 요크가 콘서트에서 이 노래를 일부만 부른 것이 있다고 보도했다.

영국의 록밴드 라디오헤드

영국의 록밴드 라디오헤드

정규앨범, 소비자가 값 매기고 다운로드
예상대로 밴드는 백지였던 공식 웹사이트에 싱글 ‘Burn The Witch’ 영상을 올렸다. 라디오헤드는 실험적인 음악만큼이나 음원 공개와 유통방식도 실험적이다. 그들의 행보는 음악가로서 먹고살 일을 걱정하는 모든 이들에게 이정표를 제시하곤 한다. 라디오헤드가 제시한 그 길들을 따라가 봤다.

가장 극적인 순간은 뭐니뭐니 해도 2007년 10월 정규앨범 를 온라인에 풀고 소비자가 스스로 값을 매기고 다운로드 받게 한 일이다. 그해 EMI와 결별한 밴드는 서비아센들리스라는 회사를 직접 차려 이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가격에는 어떠한 제한도 없었다. 1센트든 1달러든 상관없었다. 국내에서는 장기하와 얼굴들이 이를 따라해 ‘백지수표 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좋다 말았네’ 음원을 판매하기도 했다.

수익적인 측면과는 별개로 음원 공개와 유통에 있어 아티스트가 자유를 획득했다는 측면에서 혁명이라 할 만하다. 요크는 한 인터뷰에서 평론 권력으로부터 간섭 받지 않기 위한 것이라는 속내를 드러내기도 했다. 음원에 대한 접근권을 가장 먼저 획득한 사람이 콘텐츠의 가치를 좌지우지하는 일을 그냥 두고 볼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요크는 8번째 정규앨범 (2011년) 발매 전에는 직접 레코드 가게 앞에서 라디오헤드를 다룬 기사가 실린 신문을 나눠주는 셀프 프로모션도 선보였다.

라디오헤드의 보컬 겸 리더 톰 요크

라디오헤드의 보컬 겸 리더 톰 요크

어찌 보면 이 같은 음악적 자아의 각성은 사고로 시작된 것인지도 모른다. 2003년 작 는 발매 전 마스터링 단계에서 음원이 유출됐다. 라디오헤드는 이후 셀프 음원 유출(?)을 일삼았다. 남이 유출할 바에는 내가 먼저 하겠다는 정신인 셈이다. 이후에는 아예 무료로 다운로드 받을 수 있도록 음원을 공개하는 일이 잦아졌다. 2009년 8월에는 ‘These Are My Twisted Words’를 밴드 공식 웹사이트와 P2P 파일 공유사이트 토렌트에서 무료로 다운로드 받을 수 있게 했다. 밴드는 음원이 미완성 상태에서 유출된 것에 대한 앙금이 남아있는 듯 이 음원은 마스터링까지 끝낸 것이라는 설명을 덧붙였다. 2015년 12월 25일에는 크리스마스 선물처럼 영화 <007 스펙터>의 오프닝 테마로 만들어놓은 곡을 온라인 음악유통 사이트 사운드클라우드에 공개했다. 이 곡은 영화에 쓰이지는 않았다.

밴드는 음원뿐만 아니라 공연티켓 값까지 팬들에게 맡겼다. 구호단체 옥스팜과 함께 아이티 지진 피해자를 돕는 자선콘서트를 2010년 1월 미국 LA 할리우드에 있는 폰다극장에서 열었는데, 최대한 많은 돈을 벌어야 한다며 티켓을 경매에 부쳤다.

소비자에게 스스로 값을 매기게 하고 다운로드 받게 한 앨범 <In Rainbows>.

소비자에게 스스로 값을 매기게 하고 다운로드 받게 한 앨범 .

음악을 통해 불합리에 대항하고 투쟁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관람객들에게 상업적인 용도로 쓰지 않겠다는 전제 하에 공연 영상을 찍도록 허락한 것이다. 밴드는 팬들이 촬영한 영상을 짜깁기해서 만든 공연 전체 영상을 스스로 유튜브에 올렸다. 물론 고화질의 DVD는 따로 발매했다.

2008년 11월 톰 요크는 버락 오바마의 미국 대통령 당선을 축하하는 의미로 솔로앨범 (2006년) 수록곡 ‘Harrowdown Hill’의 새 리믹스 버전 음원을 밴드 웹사이트에 올렸다. 요크는 이 곡의 원버전을 만들 당시 “지금까지 내가 쓴 곡 중에 가장 화가 나서 만든 곡이다”라고 말했다. 노래 제목은 자살로 생을 마감한 영국의 과학자 데이비드 켈리의 사체가 발견된 옥스포드주의 한 지명을 따라 지었다. 켈리는 영국이 2003년 이라크 침공을 정당화하는 구실이었던 대량살상무기 관련 정보가 사실은 조작됐다는 것을 BBC에 전달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이라크 내 대량살상무기는 아직까지도 발견되지 않고 있지만 당시 토니 블레어 총리는 이를 구실로 대이라크 공세를 강화했다. 비극은 취재원을 공개하지 않는 BBC와 정부가 힘겨루기를 하는 사이 시작됐다. 의도했든 하지 않았든 간에 양측 모두 켈리의 명예를 훼손했다. 요크는 켈리의 죽음을 안타까워했으며, 이는 결국 그를 죽음에 이르게 한 근원인 미국과 영국의 이라크 침공에 대한 비난이다.

2013년 7월에는 스트리밍 업체 스포티파이를 공격했다. 영국 <가디언>은 요크가 스포티파이의 수익 모델 때문에 신예 뮤지션들이 푸대접을 받고 있음을 지적했다고 보도했다. 요크는 스포티파이에서 솔로 앨범 와 프로젝트 밴드인 아톰스 포 피스의 을 내렸다. 디지털 음원 유통방식에 반감을 갖고 있던 거장 핑크 플로이드와 이글스마저 스포티파이에 음원 스트리밍 서비스를 허락한 상황에서 요크의 과감한 결정은 더욱 화제가 됐다.

요크는 정액제인 스포티파이와 달리 개별 콘텐츠에 값을 매기는 공연 동영상 스트리밍 서비스인 사운드할로에 눈을 돌렸다. 2013년 초에 시작된 사운드할로는 유튜브에 비해 고화질 영상과 깨끗한 음질의 공연 영상을 제공한다. 공연 전체뿐만 아니라 개별곡 단위로도 공연 동영상을 다운로드 받게 하는 당시로는 획기적인 서비스였다.

밴드의 모든 실험은 뮤지션 본인들을 위한 것이다. 라디오헤드는 1990년대 중반부터 머천다이즈 판매를 위해 주식회사를 설립했고, 이후에는 앨범을 발매할 때마다 회사를 만들어 왔다. 멤버 각자의 수입을 관리하는 주식회사를 따로 두는 등 밴드의 생존과 멤버 각자의 권익을 위한 장치를 늘 고민해 왔다.

이 같은 라디오헤드의 독특한 행보가 모든 현안에 대한 절대적 해결책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음악을 통해 항상 불합리에 대항하고, 항변하고, 투쟁해 왔다. 자신들의 가장 강력하면서도 유일한 힘인 음악을 통해서 말이다. 요크와 라디오헤드는 그렇게 자신만의 길을 가고 있다.

<박효재 경향신문 국제부 기자 mann616@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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