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기관 성과연봉제 ‘폭풍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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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무 실적 따른 금전적 인센티브제… 박 대통령 “확대 도입하라”

“대부분이 속으로는 반대하지만 겉으로는 잘 표현을 안 하죠. 이제 퇴출도 시킨다는데 몸 사리느라고요.”

국민건강보험공단에서 일하는 ㄱ씨(41)는 공공기관 성과연봉제를 도입하라는 압박이 내려오는 공단 내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고 말했다. 4월 22일 박근혜 대통령이 공식석상에서 처음으로 성과연봉제에 대해 언급한 이후 성과연봉제를 화제로 올리는 것도 껄끄러워졌다. “노조는 반대한다고 나서더라도 평조합원이 사무실에서 (성과연봉제에 관한) 얘기를 쉽게 할 수가 있나요. 반대하는 사람들끼리도 듣기 싫은 주제라 일부러 말을 안 꺼내는데.” 정부에서 도입 기한을 못 박은 데다 대통령까지 나선 만큼 머지않아 여파가 밀어닥칠 것이라는 건 모두가 예측하고 있다. 지금은 폭풍전야처럼 조용히 눈치만 살피고 있다는 것이 ㄱ씨의 말이다.

공공부문 업무 실적 비교하기 어려워
박 대통령이 국가재정전략회의에서 “공공부문에서 구조개혁을 선도할 수 있도록 120개 공공기관에 대한 성과연봉제를 확대 도입해야 한다”고 밝히기 하루 전인 4월 21일 기획재정부는 도입 대상인 120개 기관 가운데 15개 기관이 노사합의를 완료했다며 도입을 재촉하는 보도자료를 냈다. 5월까지 성과연봉제를 조기 도입한 공기업과 준정부기관에는 별도의 조기 이행 성과급을 지급하는 데 더해 사후평가를 통해 우수기관을 뽑아 추가 성과급까지 주겠다는 내용이었다. 당근을 내밀며 성과연봉제 도입을 주문한 것이다.

4월 4일 서울 종로구 세종로공원에서 열린 '성과연봉제·퇴출제 분쇄 공공연맹 투쟁 선포식'에 참석한 노동자들이 손팻말을 들고 구호를 외치고 있다. / 연합뉴스

4월 4일 서울 종로구 세종로공원에서 열린 '성과연봉제·퇴출제 분쇄 공공연맹 투쟁 선포식'에 참석한 노동자들이 손팻말을 들고 구호를 외치고 있다. / 연합뉴스

한 달 전 채찍을 먼저 들이밀었으나 반발이 커진 데 따른 후속조치였다. 정부는 3월 18일 근무성적이 부진한 직원에게는 역량교육과 배치전환 등을 의무화한 ‘직원 역량 및 성과 향상 지원 권고안’을 발표한 바 있다. 지금까지 ‘철밥통’이라고 불려온 공공기관 노동자들에게 공공개혁이라는 명목으로 칼을 들이대겠다는 방침을 표명한 것이다. 기획재정부는 성과연봉제 자체는 근무성적 부진자 퇴출과 직접 연관된 정책이 아니라고 해명했지만 일선 직원들의 체감은 달랐다. 성과연봉제 도입 대상 기관인 보훈병원의 의료노동자 ㄴ씨(38)는 “일 못하면 자르겠다고 엄포 놓은 뒤 얼마 안 있어서 일하는 성과에 따라 돈 준다는 성과제 얘기를 꺼내는데, 어느 누가 관련이 없다고 생각하겠느냐”고 말했다.

정부가 공공기관에 도입하려는 성과연봉제는 일반 사기업의 성과급제와 거의 비슷하다. 근무실적에 따라 우수한 직원에게는 성과급을 주고, 그렇지 못한 직원은 금전적 인센티브를 받지 못한다는 것이 주된 내용이다. 간부직인 2급 이상에 이미 도입된 제도를 전체 직원의 70%에 해당하는 4급 이상으로 확대 적용하고, 기관 역시 120개 공공기관에서 전면적으로 실시한다는 것이 정부의 방침이다. 제도가 도입되면 평균 3%의 급여 차이가 나게 된다. 공공기관보다 앞서 성과연봉제를 시행 중인 고위공무원단 나급에서 최대 1500만원까지 차이 나는 연봉 격차가 공공기관에도 비슷하게 적용될 것으로 보인다. 공무원 역시 성과연봉제의 적용범위를 넓힘에 따라 올해까지 공무원 복수직 4급과 5급 과장직이, 내년에는 5급 전체까지 성과연봉제가 확대 시행될 예정이다.

문제는 근무성과를 가시적으로 비교하기 힘든 공공부문의 업무실적을 비교하기 어렵다는 근본적인 문제와 함께 정부가 속전속결 방침으로 밀고 있는 제도 도입이 근로기준법을 어기는 위법 소지가 다분하다는 점이다. 전문가들은 성과연봉제 도입이 근로기준법 제97조의 ‘취업규칙에서 정한 기준에 미달하는 근로조건을 정한 근로계약은 그 부분에 관해서는 무효’라는 조항을 들어 취업규칙을 무시하고 직원 개개인의 성과에 따라 연봉액수 계약을 맺는 것은 노동법의 근본 취지와 상반되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사용자가 개별적으로 노동자와 계약을 맺고 임금 등의 노동조건을 정하는 것은 원칙적으로 법과 상반되는 부분이다. 게다가 부득이하게 취업규칙을 노동자에게 불리하게 변경할 때에도 직원의 과반수가 가입한 노조나 노동자의 과반수 동의를 받도록 하고 있다. 노사합의가 이뤄진 15개 기관을 제외하고 규모가 큰 공단과 기관일수록 노조 집행부와 조합원들이 일관되게 성과연봉제 도입을 반대하고 있는 곳이 많아 정부로서도 예정하고 있는 일정대로 성과연봉제 도입을 장담하기는 어려운 실정이다. 김기덕 노동법률원 법률사무소 새날 대표는 “근기법만이 아니라 헌법에서부터 노조를 조직해서 단체협약을 체결함으로써 사용자가 근로자와 개별적으로 체결하는 근로계약을 부정하라고 규정하고 있다”며 “단체협약에 정한 근로조건과 대우에 관한 기준에 위반하는 취업규칙이나 근로계약의 부분은 무효라는 점에서 성과연봉제를 법적으로 부정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노조 반발 거세지면서 기관장들 곤혹
성과연봉제 도입 대상에 해당하는 기관에서 노조의 반발이 점차 거세지면서 각 기관장들이 가장 난처한 입장에 처했다. 박 대통령이 6월 청와대에서 공공기관장 워크숍을 주재해 성과연봉제의 구체적인 진척상황에 대해 기관별 보고를 받는 방안이 검토되고 있기 때문이다. 청와대로서는 여당의 총선 참패와 노조의 거세지는 반발 속에서 공공기관장들이 제도 도입에 주춤할 수 있는 분위기를 다잡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이지만, 당장 상반기 안에 노조의 반발을 무마해야 하는 30개 공기업의 기관장들은 느닷없이 떨어진 불똥에 떨게 된 셈이다. 한 준정부기관 관계자는 “다른 기관장과 성과가 비교될 수밖에 없으니 절박하긴 하지만 강하게 나오는 노조에 딱히 쥐어줄 당근이 별로 없어 고민이 클 것”이라고 말했다.

직원들을 구슬릴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당근은 성과급이다. 하지만 이 경우에도 2000억원에 달하는 국고를 써서 성과연봉제를 도입해야 하는지에 대한 비판여론이 적지 않다. 도입 기한이 임박한 30개 공기업이 4월 중 성과연봉제를 도입할 경우 공기업 기본급 수준을 바탕으로 성과연봉제 성과급을 대입해 계산하면 약 1962억원의 성과급을 보장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정부는 성과연봉제 조기 이행을 독려하려 4월 중으로 도입을 완료하면 공기업은 기본월봉의 50%를, 준정부기관은 20%를 지급하기로 했다. 5월 내 도입할 때는 성과급이 각각 25%, 10%로 줄어든다.

그러나 노조의 규모가 가장 큰 한국전력 자회사들이나 철도공사, 토지주택공사 등 대규모 기관일수록 노조 내부의 합의를 이끌어내지 못하고 있다. 3월 27일 서부발전과 남동발전, 중부발전 등 한전 자회사와 부산항만공사 등에서는 노사 합의절차를 무시한 채 이사회 결의만으로 성과연봉제를 도입한 사실이 밝혀져 논란이 일고 있다. 더불어민주당 홍영표 의원에 따르면 특히 중부발전에서는 부서별로 동의서 수량을 할당해 전달했지만 절반이 넘는 인원을 확보하지 못하자 이사회를 통해 일방적으로 사안을 의결한 것으로 알려졌다. 서울화력본부 운영실장이 과장급 관리자들을 모아 과별로 2장 이상씩 동의서를 제출하도록 지시한 사실이 담긴 녹취록이 공개된 것이다. 예금보험공사에서도 금융공기업 중 처음으로 노조원 찬반 투표를 벌인 결과 62.7%가 성과연봉제 개편안에 반대해 부결됐지만, 노조위원장이 이를 뒤집고 사측과의 합의서에 서명하면서 논란이 일고 있다.

대통령이 나선 이후로 각 공공기관별로 성과연봉제 도입을 위해 위법적인 지시를 내리고 있다는 지적에 대해 기재부 관계자는 “대통령이 주재하게 될 공공기관장 워크숍은 성과연봉제만이 아니라 전반적인 공공개혁의 성과를 점검하는 자리일 뿐”이라며 의미를 축소했다. 그러나 개별 공기업 사업장을 넘어 산업별노조 단위로 성과연봉제 반대 연대투쟁에 나서고 있는 노조들은 하부 사업장 노조의 제도 도입 시 제재를 가할 것임을 밝히며 정부에 정면으로 맞서고 있다. 유지현 보건의료노조 위원장은 “정부는 직원들에게 더 많은 인력과 예산을 투자하기는커녕 경영평가에 좋은 등급을 받기 위해 돈을 벌라며 성과만 강요하고 있다”면서 “성과연봉제와 퇴출제를 도입하는 사업장은 산별노조 차원에서 집중타격 대상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김태훈 기자 anarq@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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