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시공 후분양’ 받아들이실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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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급자에서 소비자 위주로 중심이동 필요… 수요·공급 조절 시장기능 회복 기대도

새로 짓는 아파트를 살 때 먼저 구매계약을 하고 약 2년 뒤 지은 집에 들어가는 게 나을까, 다 지어가는 집을 보고 사는 게 나을까. 일반 공산품이라면 당연히 제품을 확인하고 산다. 그러나 예외가 있으니 한국의 아파트다. 이 ‘선분양 후시공’은 세계적으로도 드문 방식이다.

2000년대 중·후반 국내도 ‘선시공 후분양’ 아파트를 늘리자는 목소리가 커졌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얼마 못 가고 힘을 잃었다. 2007년부터 공공아파트 후분양 의무제를 도입키로 했으나 연기됐다. 서울시만 뉴타운 지역부터 후분양제를 적용했다. 선분양 아파트는 여전히 대세다. 일부 민간 아파트에도 가뭄에 콩 나듯 후분양 아파트가 나타나지만 대개는 미분양 등 다른 사정들이 있다.

2015년 3월 분양한 ‘용인 e편한세상 수지’ 견본주택을 방문객들이 보고 있다. / 대림산업 제공

2015년 3월 분양한 ‘용인 e편한세상 수지’ 견본주택을 방문객들이 보고 있다. / 대림산업 제공

아파트 공급 늘어 미분양 우려 커져
수도권이 미분양으로 몸살을 앓던 2013년 여름. 10년 동안 전세보증금에 허덕이던 김모씨(45)는 경기도 고양시의 한 아파트를 샀다. 당초 분양가가 4억원대 중반으로 3.3㎡당 약 1200만원이었다. 하지만 미분양 덕분에 사실상 후분양으로 3억원대 초반에 분양가 대비 1억원 넘게 ‘할인’받았다. 공사가 상당히 진행된 상태에서 치장된 모델하우스가 아니라 실제 아파트에 마련된 본보기 집을 보고 구매해 괴리감도 적었다. 일조권, 전망도 정확히 따져볼 수 있었다. 현 시세가 4억원대 중반을 회복했다. 3년여 전 선분양가에 샀다면 겨우 본전이거나 이자비용 등을 감안하면 마이너스였을 것이다. 그는 “평가차익으로 1억원이 올랐기 때문에 향후 가격이 급락하지 않는 한 걱정이 안 된다”며 “후분양 형태가 거품을 걷어내는 면에서 소비자에게 유리한 방식”이라고 말했다.

후분양 아파트를 확대할 필요가 있는지 사회 전체가 다시 따져볼 상황이 됐다. 아파트 공급이 늘어 미분양 우려가 커지고 있어서다. 전국 주택보급률은 2008년 이래 100%를 넘었다. 무엇보다 소비자들이 후분양 아파트를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을까.

동일한 조건, 즉 한 단지 안에 일부는 선분양, 일부는 후분양으로 나오는 아파트는 거의 없어 엄밀히 비교하기란 어렵다. 3월 24일 서울 강서구에서 요즘 뜬다는 마곡지구를 가봤다. SH공사의 2차 분양 대상인 마곡 8, 10-1, 11, 12단지가 모두 팔리며 올해 7~9월 입주가 예정됐다. 이들 단지는 지난해 8월 후분양으로 팔린 곳이다. 대개 공정률 60~70%가 된 상태에서 분양했다. 공공분양 아파트인 SH의 마곡 엠벨리 5단지와 민간분양 아파트인 현대건설 마곡힐스테이트를 비교하는 것은 한계가 있지만, 단순화하자면 이렇다.

후분양 아파트인 엠벨리 5단지는 2014년 6월 입주 당시 전용면적 84㎡가 약 4억4000만원에 분양됐다. 현재 동·호수별로 차이가 있지만 대체로 7억5000만원 안팎에서 매물이 나왔다. 바로 아래에 있는 마곡힐스테이트는 2014년 4월 전용면적 84㎡가 4억8000만~5억3000만원에 선분양됐다. 지난해 말 입주한 마곡힐스테이트의 84㎡는 7억5000만~8억원 정도에 매물로 나온다.

브랜드 차이일 뿐 선분양과 후분양 사이에 재산상에 차별성이 현재로서는 크지 않다. 오히려 엠벨리 5단지는 가격이 약 70% 올랐고, 마곡힐스테이트는 약 50~60% 상승한 편이다. 게다가 선분양 아파트는 중도금 이자 부담까지 있다. 마곡부자부동산 안지수 공인중개사는 “두 단지를 비교하자면 민영 아파트가 아무래도 자재가 낫고, 천장도 높아 선호도가 높지만, 후분양은 공사가 진행된 상황에서 실제 위치와 동간 간격, 일조권 등을 확인해 보고 거래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고 말했다.

적어도 소비자가 제품을 보고 판단하는 면에서는 후분양제가 유리하지만, 국내는 SH를 제외하면 사실상 찾아보기 어렵다. LH공사도 부채에 시달려 거의 후분양에 나서지 않는다. 시공능력 10대 건설사는 지난해 후분양 아파트를 하나도 짓지 않았다. 간혹 미분양이 났거나 우려가 있는 경우 후분양 형태를 취하는 경우는 있다. 다수 언론은 지난해 GS건설 ‘신금호 파크자이’가 후분양제로 공급됐다고 전했다. 하지만 신금호 파크자이는 1156가구 재개발 아파트로 대다수 조합원 물량은 선분양됐고, 일반분양은 84가구뿐이었다. GS건설 홍보실은 “일반분양도 설계변경에 시간이 걸리면서 분양이 늦춰져서 후분양 형태를 띤 것뿐”이라고 설명했다.

서울시는 어떻게 후분양에 적극 나서게 됐을까. SH는 2006년부터 후분양을 했는데, 배경에는 은평뉴타운 사업이 있다. 당시 은평뉴타운에 고분양가 논란이 일어나 원가공개가 사회적 이슈였다. 오세훈 서울시장은 2005년 9월 63개 항목의 분양가를 공개하고, 공정률 80%에 후분양하기로 결정했다. 미분양이 나더라도 SH가 부채위험을 떠안는 식이었다. SH는 2007년 8750가구를 시작으로 지난해 888가구까지 9년 동안 3만4003가구를 후분양했다. 김용경 서울시 전월세팀장은 “전세가가 높아져 후분양 아파트 수요는 충분하다고 본다”며 “예전에는 선분양으로 미리 사서 분양권 전매나 시세차익을 노렸다면, 앞으로는 투자보다 주거공간으로서 집을 사고 장기 거주하는 사람에게 맞는 게 후분양제”라고 말했다. 집을 상품으로서 투자 대상으로 접근하는 게 아니라 주거의 개념으로 바꿔야 후분양이 먹혀든다는 얘기다.

‘선시공 후분양’ 받아들이실래요?

투기 수요에 기댄 ‘선분양 후시공’ 논란
한국 사회에 선분양 아파트는 사실 ‘욕망의 덩어리’다. 고성장 개발연대의 산물로서 누구에겐 ‘재산증식용 요술방망이’이자 다른 누구에겐 ‘그림의 떡’ 같은 존재다. 집으로 떼돈 벌어들이는 시대가 유지되는 한 사실 후분양은 요원할 수 있다. 수억원대의 가장 비싼 제품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보지도 못한 채 전단지 사진이나 견본주택만 보고 덜컥 계약을 해야 하는 공급자 중심 시장을 바꿔야 한다는 주장도 많다.

수도권 한 택지지구 아파트 입주민들은 번듯한 브랜드와 입지 등을 자랑하지만 한동안 속으로는 앓아야 했다. 지하주차장에 물이 새는 등 하자가 심각했기 때문이다. 분양할 때 말만 믿었는데 약속과 달리 단지 조성도 기대 이하였다. 조감도나 견본주택과 설계를 달리 하거나, 값싼 자재를 썼다가 법정 다툼까지 벌어지는 경우도 자주 일어난다. 완제품을 못 보고 집값의 80%를 내야 하는 선분양제에도 원인이 있다. 조명래 단국대 교수는 “과잉공급 우려가 있는 지금은 ‘털어내기’식 공급 확대를 부를 선분양제 대신 후분양제를 차츰 늘리도록 제도화해야 할 시점”이라며 “정부가 ‘건설 마피아’의 이익에 끌려다니지 말고 수요자 관점으로 정책을 전환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소비자 입장에서 선분양은 이자를 물어야 한다. 반면 후분양은 소비자에게 이자부담이 없고, 프로젝트파이낸싱(PF) 대출을 받는 건설사가 이자를 내는 구조다. 대신 후분양제에서 소비자는 길게는 1년, 짧으면 몇 개월~몇 주 안에 집값을 지불할 목돈부담은 든다.

그동안 경제성장기에 도시화와 인구 성장으로 집이 부족했지만, 건설사도 정부도 돈이 없었다. 소비자가 2년 동안 조금씩 조달하는 돈으로 집을 짓기 시작한 것이 선분양제다. 그 열매는 가격 급등이었다. 얼핏 건설사와 입주자가 서로 윈·윈하는 구조로 보인다. 그럼 누군가 대가를 치렀다는 얘기다. 그 다음에 집을 구하는 대기수요자다. 당연히 집값은 치솟고 다음 주자의 부담은 커지게 된다. 그래도 허리띠 졸라매고 집만 분양받으면 대박이 나던 호시절이 한동안 이어졌다.

그러나 이제 주택보급률이 100%를 넘으며 점점 한계상황에 닿고 있다. 분양만 받으면, 짓기만 하면 될 줄 알았으나 미분양이 속출했다. 2014년 8월 최경환 경제부총리는 대출규제 완화 등으로 부동산시장 활성화에 다시 펌프질을 했다. 전세난에 이어 월세부담까지 급증한 소비자들을 매매로 이끈 것이다. “집은 사놓으면 손해는 안 본다” “언젠가는 오른다”는 신화에 기댄 것이다. 선분양제의 또 하나 맹점이 바로 수요·공급 조절의 어려움이다. 일단 지어놓고, 사놓고 보자는 공식이 지배하는 구조는 시장상황을 왜곡시킬 우려가 있다. 이때다 싶은 건설사는 기존 미분양은 털고, 새 물량을 쏟아냈다. 지난해는 2014년보다 56.4%나 급증한 51만7000가구가 분양됐다.

선분양제는 입주자들에게 받은 계약금과 중도금으로 건설사가 시공비를 충당해가는 시스템이다. 건설사가 목돈이 없더라도 대규모 개발이 가능한 이유다. 업계에서는 “사무실과 분양접수 전화받는 직원만 있으면 아파트 건설을 할 수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전문가들은 후분양제가 정착되면 수요·공급이 시장 기능에 맡겨져 자율조절될 수 있다고 기대하고 있다.

SH공사가 2013년 후분양한 서울 강서구 마곡지구 14단지. / SH공사 제공

SH공사가 2013년 후분양한 서울 강서구 마곡지구 14단지. / SH공사 제공

정부는 소극적, 장단점 따져봐야
후분양제로 가려면 초기 대규모 자본을 대줄 주택금융이 필요해진다. 건설업체 관계자는 “대규모 후분양을 하려면 어마어마한 대출금(PF)이 필요하기 때문에 건설사로서는 부담이 크다”며 “만든 뒤에 다 팔린다는 보장이 안 되면 건설에 나서기도 어렵다”고 말했다. 미분양, 부도 위험을 감안하면 시중은행 같은 금융권이 선뜻 나서기도 힘든다. 한국 현실에서 후분양을 정착시키려면 정부 의지가 중요하다.

그러나 국토교통부는 사업자의 자금조달 곤란·부채비율 증가·미분양 발생 등을, 소비자 측면에서는 분양가 상승·공급 축소에 따른 전월세난 가중·목돈 마련 부담 등을 이유로 후분양제의 한계점을 강조하며 소극적이다. 국토부 당국자는 “후분양제가 이상적이기는 하지만 이자부담을 고려해 건설비용이 증가하면 소비자 부담으로 돌아갈 수도 있다”고 말했다. 후분양 대출보증제를 2013년 9월 도입했으나 실적은 형편없다. 주택도시보증공사(HUG)가 2014년 약 7524억원으로 계획한 후분양 대출보증은 828세대에 281억원에 불과했고, 지난해에는 744세대 77억원으로 더 줄었다. 전체 분양 중 0.1%에 그쳤다. 정부 우려와 달리 미분양은 자율조절 기능을 상실한 선분양제 하에서 더 걱정스럽다는 전문가도 많다. 올해 1월 주택인·허가 물량은 전년 동기 대비 42.9% 급증한 4만7536가구다. 1월 전국 미분양 물량은 6만606가구 수준이다.

선분양제는 이자뿐 아니라 위험부담을 소비자가 거의 떠안는 구조다. 건설사들이 팔고 보자는 ‘폭탄 돌리기’식 분양을 하는 이유다. 반면 후분양제는 미분양 시 위험을 건설사가 감당하는 구조여서 공급에 책임성이 커진다. 후분양제 하에서 자금조달 능력이 떨어지는 중소건설사는 밀려나고 대형건설사 위주로 시장 재편이 가속화될 가능성도 거론된다.

전문가들은 앞으로 신도시, 택지지구처럼 대량공급이 나오지 않으면 자연스레 후분양이 늘어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저성장 시대에 소비자 중심으로 시장이 재편될 여건은 마련된 것이다. 임일성 우리금융경영연구소 금융연구실장은 “선분양제는 투자자들이 언제나 집값은 올라간다는 전제 하에 미리 투자하는 제도인데, 이제 마이너스가 될 수도 있는 시대가 됐다”고 지적했다. 임 실장은 “소비자의 집단대출이든, 건설사의 PF 대출이든 위험을 누가 떠안느냐의 문제”라며 “후분양으로 가면 건설사가 사업성 평가 때 공급에 더 신중을 기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노희순 주택산업연구원 책임연구원은 “후분양제의 필요성은 대다수 전문가들이 다 인정한다”며 “후분양으로 가면 신용대출이 어렵거나 동시에 여러 사업을 감당하기 힘든 건설사를 솎아내며 공급량을 조절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최근 금융권이 집단대출을 받아주지 않거나 금리를 인상한 일을 두고 논란이 일고 있다. 그러나 정의당 김성달 정책연구위원은 “고분양가를 전제로 한 선분양 하의 집단대출제도는 근본 해법이 되지 못한다”며 “분양가 상한제와 후분양제가 하우스푸어 문제를 푸는 근본대책”이라고 말했다. 서울시 경험에서 보듯 후분양제가 정착되려면 분양원가 공개나 최소한 분양가 상한제와 맞물려야 한다는 견해다. 후분양을 이유로 이자부담을 소비자에게 전가시키는 걸 막기 위해서다.

장점이 있다고 민영 부문까지 무조건 후분양제를 강제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렵고 사회적 부담도 커질 수 있다. 지역과 소비자의 상황에 맞춰 후분양과 선분양을 적절히 조화해볼 시점이 됐다. 건설업자가 아닌 소비자 관점에서 후분양제를 늘려가는 방안을 모색해볼 때다.

<전병역 기자 junb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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