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지이야기

조례가 제정되면 뭐가 달라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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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 인권 개선 ‘시장의 의무’로… 노동실태 조사 불이익 구제방안 안내, 법률 상담 등

하루 평균 작업 11.2시간. 주6일 근무. 즉 일주일에 67시간 근무한다. 일당제도 월급제도 아니고 작업한 수량만큼 급여를 받는다. 하루하루 얼마를 작업하게 될지 알 수가 없다. 일이 몰렸을 때 거절하지 못하고 무리에서 하게 되는 이유다. 74%가 목과 팔에 근육통을 호소한다. 절반 이상이 먼지 날리는 공장에서 식사를 한다. 언제 어느 곳의 노동자 이야기일까. 2015년 서울 동대문구·중랑구 일대 봉제공장 노동자들의 일상이다. 서울노동권익센터는 지난해 서울시내 봉제공장 실태조사 작업을 벌였다.

서울시는 2010년 이후 봉제사업을 육성하기 위해 지원책을 추진하고 있었다. 봉제사업은 한때는 사양사업으로 여겨졌지만 인쇄, 귀금속 등과 함께 ‘도시형 제조업’으로 다시 각광받고 있다. 대규모 산업단지를 새로 건설하기 어려운 서울과 같은 대도시에서 일자리와 부가가치를 창출하기에 알맞다. 창조적 디자인과 결합하면 ‘미래지향적 산업’으로도 여겨질 수 있다.

서울노동권익센터에서 2015년 5월 청소년노동인권지킴이 강사양성 과정을 진행하고 있다. / 서울노동권익센터 제공

서울노동권익센터에서 2015년 5월 청소년노동인권지킴이 강사양성 과정을 진행하고 있다. / 서울노동권익센터 제공

노동인권 교육, 노동조합과 협력 수행
조사에 참여한 한인임 노동환경건강연구소 연구원은 오마이뉴스 기고에서 “현재 봉제업의 가장 큰 문제는 안정적인 물량 확보가 어렵다는 것”이라며 서울시에 체계적인 정책 수립, 영세사업장에 대한 환경개선과 장시간 노동 규제 등을 제안했다. 서울시의 산업정책에 ‘노동 없는 산업정책’은 있을 수 없다고 일침을 놓은 셈이다.

서울노동권익센터는 서울시 노동정책 허브 역할을 하기 위해 기존 시 산하 근로자복지센터 등을 통합해 만들어졌다. 중앙 센터 외에도 4곳에 지부를 두고 있다. 서울시가 2014년 제정한 ‘근로자 권익 보호 및 증진을 위한 조례’를 근거로 만들어진 것이다. 노동자들이 누릴 수 있는 권리와 불이익을 당했을 때 구제방안을 안내하는 책자 제작, 법률상담, 노동인권 교육, 실태조사, 정책 개발 및 제언, 서울시내 노동조합과의 협력 등 지방정부에서 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수행하고 있다. 서울교육청과 협업해 특성화고를 중심으로 6900명에게 노동인권 교육을 실시했다. 올해는 학교에 다니지 않는 청소년 등 교육 대상을 확대해 갈 계획이다.

서울시는 앞서 2012년 서울시 관련기관에서 직·간접적으로 고용한 비정규직 1367명을 무기계약직으로 전환했다.

근로기준법을 위반한 사업장을 감독하고 처벌하는 권한은 고용노동부에 있다. 지방정부가 노동정책에 소극적이었던 이유였다. 그러나 서울시의 사례는 지방정부 차원에서도 조례를 통해 할 수 있는 일이 적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주진우 서울연구원 초빙연구위원은 “조례의 가장 중요한 점은 노동자의 인권 개선을 시장의 의무로 못 박아 둔다는 점”이라고 밝혔다. 서울시 근로자 권익 보호 및 증진을 위한 조례는 “근로자의 권리 보호 및 증진을 도모함으로써 모든 시민이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실현하고 행복한 삶의 권리를 누릴 수 있도록 함을 목적으로 한다”고 규정하며 “서울시장이 이를 위해 노력하여야 한다”고 하고 있다. 노동자 입장에서 시를 압박할 근거이자, 시 입장에서 예산과 인력을 투입해 노동 관련 정책을 수행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전라남도의회는 2012년 전국 최초로 ‘비정규직 근로자 권리 보호 및 지원에 관한 조례’를 통과시켰다. 당시 전남 노동자 46만7000명 중 42%가 비정규직으로 집계됐다. 조례 제정과정에서 전남도청 소속 비정규직 노동자의 근로실태 조사가 이뤄졌다. 조례에는 ‘생활임금제 도입’, ‘비정규직 개선 우수기업 지원’, ‘체불임금 지원기금 설치’, ‘비정규직노동센터 설치’ 등의 근거 규정을 마련했다. 도청 산하기관 무기계약직의 정년을 57세에서 60세로 연장했다. 전남 비정규직노동센터는 2년 뒤 문을 열었다.

전남비정규직센터 직원들의 사업장 방문활동. 2014년 12월. / 전남비정규직센터 제공

전남비정규직센터 직원들의 사업장 방문활동. 2014년 12월. / 전남비정규직센터 제공

눈에 보이는 ‘센터’ 생겨나 각종 지원도
조례안을 발의한 강성휘 도의원(더불어민주당)은 “조례를 제정할 때 도의회에서는 만장일치로 통과됐으나 도청에서는 처음에는 ‘노동정책’은 노동부 관할 아니냐’며 갸웃거렸다. 서로 문제를 이해하는 시간이 필요했다”고 말했다. 지금은 도에서 적극적으로 나선다고 전했다.

[표지이야기]조례가 제정되면 뭐가 달라질까

강 의원은 “지방정부의 역할 중 구체적으로 눈에 보이는 ‘센터’라는 것이 생겨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했다. 전남 비정규직센터는 연간 2억원의 예산을 들여 노무사, 변호사 등 5명을 고용했다. 이들이 임금, 해고, 차별시정, 법률지원 등의 업무를 지원한다. 인터넷 홈페이지와 네이버 지식인으로 올린 내용도 센터 소속 노무사들이 답변한다. 지난해 9월까지 누적 상담건수는 총 1198건이다. 지방노동위원회 판정을 통해 해결된 완도군 청원경찰 부당해고 사건, 목포 사서 보조교사 부당해고 사건, 순천병원 근로자 임금체불 사건 등에서 노동자들을 지원했다. 도내 노동자, 학생, 사업주 1109명 대상으로 노동인권에 대한 교육도 진행했다.

강 의원은 “노동사건을 법률적으로 해결하려면 큰 비용이 드는데, 대부분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여력이 없다. 도에서 나서서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노동조합의 금전적 어려움을 지원해주는 것이 일단 큰 역할”이라고 말했다. 이어 “설령 상담을 잘 못한다 하더라도 ‘비정규직 센터’라는 것이 도심 한복판에 있고, 나라에서 운영한다는 말이 나오는 것 자체가 노동자들에게 힘이 실리는 것”이라고 전했다. ‘눈에 보이는 센터’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이유다.

전국 최초로 청소년 노동인권 조례를 통과시킨 광주에서도 ‘청소년 노동인권센터’ 개소를 준비 중이다. 대전에서는 ‘청소년 노동인권교육’ 조례를 전국 최초로 통과시켜 시행하고 있다.

기초자치단체에서도 여러 가지 노동정책이 시행되고 있다. 서울 관악구는 환경미화 업무를 준공영제로 전환했다. 구로구·금천구는 가산디지털단지 입주기업에 근로기준법 준수 협약을 하도록 했다. 은평구는 간병인 등 돌봄노동에 종사하는 여성노동자들을 위한 건강관리 서비스를 마련했다. 노원구와 성북구는 ‘생활임금’을 조례로 명기했다. 안산시는 ‘노동인권 조례’를 추진하고 있다.

지방정부의 노동정책은 공공기관 스스로가 ‘좋은 사용자’가 되는 것과 ‘행정적·금전적으로 노동자의 힘이 되어 주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나아가 노동정책을 매개로 지역 전체를 재조직하는 역할까지 한다. 박점규 전국비정규직없는세상만들기 집행위원은 “노동문제는 고용노동부 관할이라는 이유로 지방정부에서 소극적인 경향이 강했는데, 최근 지방정부에서도 적극적으로 다양한 노동정책을 펼칠 수 있다는 사실을 여러 사례가 보여주고 있다”고 말했다.

<박은하 기자 eunha999@kyunghyna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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