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는 싫지만 좋은 정치인은 좋다
  • 인쇄
  • |
  • 목록
  • |
  • 복사하기
  • 페이스북
  • 트위터
  • 밴드

약자 위하는 양심적 대변자에 대한 갈망… 한국에서 찾지 못하고 미국 정치인 선망

새로 열리는 20대 국회에서 유권자들은 어떤 정치인을 만나길 바랄까. 정치의 계절이지만 유권자들의 정치에 대한 냉소와 무관심은 깊다. 새 정당도 새 인물도 필요 없다는 여론이 높다. 기존 정당, 기존 정치인이 만족하기보다는 정치 자체를 불신하는 것이다. 책 <표심의 역습>은 정치 불신이 심해지고 정치에 대한 기대가 낮아진 현상을 분석했다. “일반적으로 정치 불신이 커지면 새로운 정당이나 인물에 대한 기대감이 높아진다. 그러나 지난 대선 당시와 비교하면 이런 기대감도 낮아졌다. 지난 대통령 선거에서 ‘안철수 바람’이 불었던 것과는 확연히 다르다. 이른바 ‘안철수 신당’의 학습효과로 풀이된다.”

그러나 정치 냉소주의가 심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정치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여론은 여전히 높았다. 2014년 2월 <내일신문>과 서강대 현대정치연구소가 발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정치가 국가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문항에 찬성하는 응답이 89.1%를 차지했다. 정치인을 잘 뽑으면 나라가 달라질 수 있다는 문항에도 91.3%가 찬성했다. 정치에 대한 냉소는 깊지만, 정치의 중요성에 공감하는 응답이 높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좋은 정치, 좋은 정치인에 대한 갈급함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버니 샌더스 미국 민주당 대선 예비후보가 3월 1일(현지시간) ‘슈퍼 화요일’ 경선 투표 전 버몬트주에서 지지를 호소하고 있다. / EPA연합뉴스

버니 샌더스 미국 민주당 대선 예비후보가 3월 1일(현지시간) ‘슈퍼 화요일’ 경선 투표 전 버몬트주에서 지지를 호소하고 있다. / EPA연합뉴스

샌더스, 중산층 재건과 빈곤층 지원 강조
올해 치러질 미국 대선을 앞두고 한국 사회에도 큰 반향을 불러왔던 ‘샌더스 열풍’도 같은 맥락이다. 버니 샌더스의 자서전 <버니 샌더스의 정치혁명>의 추천사를 쓴 조성주 미래정치센터 소장은 ‘나는 왜 정치를 하는가’라는 질문에 정확하게 답을 하고 이와 일치하는 삶을 살았다는 점에서 ‘샌더스 열풍’이 가능했다고 말했다. “최근 몇 년간 한국 정치 한쪽에서는 일베류의 정치 냉소주의가 퍼지고 있지만, 반대 쪽에서는 정치에 대한 갈급도 굉장히 커지고 있다.” ‘샌더스 열풍’은 한국에서 찾지 못한 ‘좋은 정치인’에 대한 갈급함의 대리 해소인 셈이다.

샌더스는 1981년 공화당의 텃밭이라고 할 수 있는 버몬트주 벌링턴시의 시장 당선을 시작으로 4선의 벌링턴 시장, 8선의 연방 하원의원, 2선의 연방 상원의원을 연임했다. 중산층 재건과 빈곤 감소를 주장하는 그의 연설은 한국 사회에서도 화제가 됐다. “(내가 과격하다고 하지만) 과격이란 부자들에게 감세해 준 정치인들이 최저임금 인상을 반대하는 것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국가에서 새롭게 창출되는 소득의 대부분을 최상위 1%가 가져가는 상황이야말로 과격한 것입니다. 또한 (월마트 소유주인 월턴가) 한 집안의 경제적 부가 하위 1억3000만명의 재산을 합친 것보다 많다는 사실, 이런 미국의 현실이 과격한 것입니다.” “민주사회주의란 주당 40시간 이상 일하는 국민이라면 누구나 빈곤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최고 부유층 15명이 하위 40% 국민보다 많은 부를 소유한 체제는 뭔가 잘못되었다고 외치는 것이며, 아이들의 급식과 빈곤층에 대한 지원을 줄이면서 부자들의 세금을 깎아주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중산층과 서민의 정당’을 표방해 온 더불어민주당은 선거 때마다 ‘좌클릭’ ‘우클릭’ 논란에 휩싸이면서 유권자들로 하여금 제1야당이 어느 집단을 대표하는지 가늠하기를 어렵게 했다. 조성주 소장의 말이다. “한국에서는 버니 샌더스와 같은 정치인을 찾기가 힘들다. ‘미디어 스타’ 같은 정치인은 있어도 버니 샌더스처럼 그 사람으로 대표되는 문제의식과 이를 꾸준히 자기 영역에서 실천해 왔던 정치인은 찾아보기 어렵다. 단순히 시스템에 반기를 드는 아웃사이더가 아니라 그보다 깊은 철학과 이를 설명할 수 있는 삶을 살아온 것이다.”

일관된 노선은 구체적인 실천으로 뒷받침됐다. 샌더스는 벌링턴 시장 재임 당시 임대아파트를 헐고 콘도미니엄을 세우려던 지역 유지들을 막아내고 토지신탁을 통해 노동자들에게 시가보다 낮은 주택을 공급했다. 안병진 경희사이버대 교수는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이 개최한 <버니 샌더스 돌풍과 한국 정치> 포럼에서 샌더스 열풍이 한국 정치에 시사하는 것은 ‘도전자 정신’이라고 말했다. “한국판 뉴딜 민주주의를 꿈 꾸었던 김대중, 노무현, 김근태는 한국 민주당 리버럴들의 대표적인 도전자 브랜드다. 오늘날 한국 야권은 다시 역동적인 도전자 정당으로 대혁신을 하지 않으면 심각한 정치의 위기가 기다리고 있다. 미국은 오늘날 신진보주의와 경제혁신의 역동성의 계기를 만들어가고 있지만 한국은 아직 새로운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

샌더스 말고도 미국 정치인 엘리자베스 워런도 그의 책 <싸울 기회>를 통해 조용한 반향을 꾸준히 이어나가고 있다. 민주당의 유력한 대선후보로 거론되기도 했던 워런은 파산법 전문가로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금융구제 프로그램을 감독하는 의회 조사위원장에 임명됐다. 엘리자베스 워런 또한 중산층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정치인으로 알려져 있다. <싸울 기회> 머리말이다. “지금 세상은 돈과 권력을 가진 이들에게 유리하도록 게임의 판세가 조작돼 있습니다. 대기업들은 로비스트 부대를 고용해서 수십억 달러라는 세금을 내지 않으려고 조세제도에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고, 의회에 있는 인맥을 동원해 이 편향된 게임의 판도를 유지해주는 법들을 지지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동안 정직하고 성실하게 일해온 서민들의 자식들은 과거보다 더 작고 소박한 꿈에 만족하면서 살아가야 한다는 말을 듣습니다.”

워런, ‘구제금융 잔치’ 도덕적 해이 지적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로 미국 중산층들의 몰락이 가속화됐고, 금융회사들이 도산위기에 처했다. 미국 정부가 막대한 구제자금을 금융회사에 투입했지만, 실효성은 없고 구제자금으로 보너스 잔치를 하는 등 은행가와 관료들의 타락과 도덕적 해이만 일어났다. 워런은 이 실상을 유권자들에게 알렸고, 결국 정부는 대형 은행들에 쏟아부은 구제자금을 전부 회수했다. 김광기 경북대 사회학과 교수는 “미국의 은행은 미국 정치 자체를 좌지우지하는 곳인데, 당시 미국 정부의 구제금융 문제점을 이야기한 사람은 워런과 샌더스가 유일했다. 미국 정치에서 양심적으로 남아 있는 얼마 안 되는 정치인 중 하나다”라고 평했다. 제윤경 주빌리은행 대표는 워런의 책에 묘사된 2008년 금융위기의 상황을 한국의 현재 상황과 겹쳐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엘리자베스 워런은 금융에 있어서 약자 편에서 활동하는 데 충실했다. 금융위기가 터지고 나서도 월가는 정신을 차리지 않았다. 전혀 책임지지 않고 막강한 정치권력을 등에 업고 있었다. 워런을 비롯해 월가의 부도덕함에 대해 치열하게 싸우는 사람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다 막지는 못했다. 한국도 가계부채가 어디로 흘러갈지 모르는데 금융회사들이 여전히 도덕적 해이에 빠져 있는 이유는 망해도 위험을 사회화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기 때문이다.” 제 대표는 한국 사회에서도 워런과 같은 정치인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금융에 대해 잘 아는 정치인이 별로 없다. 곧 있을 총선과 대선이 중요한 이유는 가계부채를 뇌관으로 한 금융의 전반적 시스템에 크게 문제가 발생할 수 있어서 이에 대해 잘 아는 정치인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한국은 OECD 회원국 중 빈부격차가 큰 축에 속한다. 한국의 소득격차는 10.1배로 한국보다 소득격차가 큰 나라는 미국(18.8배), 영국(10.5배) 정도다. ‘내 편’이라고 할 수 있는 정치인을 만나지 못한 중산층과 서민들은 정치에 냉소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끊임없이 자신을 대변해 줄 정치인을 찾고 있는지도 모른다.

<박송이 기자 psy@kyunghyang.com>

바로가기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