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아스팔트 따라 흐르던 권력, 경부고속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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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부고속도로가 매우 거친 테크놀로지였음을 지적한다고 해서 그 성공신화가 사라질 리는 없다. 신화에는 언제나 사실과 과장과 허구가 뒤섞여 있고, 경부고속도로는 이 요소들이 적절하게 배합된 한국 현대사 성공신화의 원형이자 핵심사례다.

경부고속도로는 한국의 1970년대를 상징한다. 혹은 우리가 경부고속도로를 바라보는 시선이 70년대에 맞추어져 있다고 할 수도 있다. 더 정확하게는 1970년이다. 1968년 초에 시작한 공사가 아직 다 끝나지 않은 1970년 1월 1일, <동아일보>는 ‘서기 2000년의 한국 상상도’에 경부선을 중심으로 남북한 곳곳을 잇는 고속도로 네트워크를 그려 넣었다. 7월 7일에는 전 구간 개통식이 성대하게 열려 “근대화와 통일로 가는 길”을 축복했다. 준공 기념탑에 새겨진 ‘고속도로의 노래’는 이 길을 “세기를 앞당기는 고속도로”, “역사를 창조하는 고속도로”라고 불렀다.

언론과 학계에서 내놓는 경부고속도로에 대한 평가는 박정희 시대 전반에 대한 해석과 분리될 수 없을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왜, 어떻게 경부고속도로를 만들기로 결정했으며 그로부터 어떤 정치적 효과를 얻었는가? 고속도로는 한국의 근대화와 산업화에 얼마나 기여했는가? 경부고속도로라는 ‘공’은 그 시대의 ‘과’를 덮을 만큼 대단한가?

서울~부산 간 428km 경부고속도로 개통.

서울~부산 간 428km 경부고속도로 개통.

매끄럽고 비정한 도로
공과 과를 따지는 정치적·경제적 평가를 보완하는 한 가지 방법은 경부고속도로를 ‘테크노 컬처’의 관점에서 생각해 보는 것이다. 고속도로를 정치적·경제적·사회적 관계 속에서 만들어지고 작동하는 하나의 테크놀로지로 간주하고, 한국인들이 그 테크놀로지에 어떤 문화적 의미를 부여했으며, 그 테크놀로지가 사람들의 의식과 행동과 세계관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검토할 수 있다. 경부고속도로를 달리면서 한국인들은 무엇을 보고 무엇을 느꼈는가? 고속도로의 ‘감각’과 ‘경험’은 어떤 형태로 우리에게 남아있는가?

1970년 서울~부산 전 구간이 개통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경부고속도로에서 ‘매끄러움’을 보고 느꼈다. 대부분의 근현대 테크놀로지는 모종의 매끄러움을 추구한다고 말할 수 있지만, 그 느낌은 인공물의 모양과 크기와 용도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 1960년대에 한국인들이 대량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플라스틱 제품들의 매끄러움이 주로 촉각적이었다면, 1970년대에 펼쳐진 고속도로의 매끄러움은 시각적인 동시에 근감각적이었다. 탁트인 공간으로 끊김 없이 뻗어가는 선과 면을 보면서 느끼는 매끄러움이 있었는가 하면, 아스팔트 위를 달리는 자동차에 앉아서 온몸으로 느끼는 매끄러움도 있었다.

경부고속도로 전 구간 개통일인 1970년 7월 7일 박목월 시인은 ‘새벽을 달린다’라는 제목의 시에서 고속도로가 전달하는 감각을 표현했다(<동아일보>). “우리는 새벽을 달린다. 조국의 찬란한 내일을 약속하는 지평으로 뻐친 고속도로 위로 열리는, 열리는 장미빛 새벽을 우리는 달린다. 이슬에 젖은 아스팔트의 기름진 윤기. 꿈같은 리듬 찰찰찰 안으로 마찰되는 안정된 속도감. 우리는 어둡고 미련한 낡은 껍질과 인습을 벗고 태만과 타성을 벗고 신선한 근대의 속도를 체험한다.” 시인은 새벽 아스팔트에서 찬란한 근대가 움직이는 것을 느꼈다. “눈부신 광명 속에 황홀한 아스팔트… 야무진 각성이여. 우렁찬 전진이여.”

“뻗어가는 국력을 상징하며 조국의 중심부를 힘차게 달린다.” 건설부가 건설사와 운수회사 들과 함께 경부고속도로 전 구간 개통일인 1970년 7월 7일 <경향신문> 8면에 실은 축하 광고.

“뻗어가는 국력을 상징하며 조국의 중심부를 힘차게 달린다.” 건설부가 건설사와 운수회사 들과 함께 경부고속도로 전 구간 개통일인 1970년 7월 7일 <경향신문> 8면에 실은 축하 광고.

고속도로 아스팔트에서 윤기와 황홀을 경험한 박목월 시인과 달리 이청준 작가는 고속도로가 “좀 비정(非情)적인 길”이라고 느꼈다. 고속도로에는 가로수 그늘도 없고 개구리도 없었다. “엄격하고 단조로운 주행선과 잔디가 입혀진 중앙분리대만이 끝없이 계속”될 뿐이었다. 이처럼 “지극히 기하학적인 길”에서는 속도를 실감하기가 어려웠다. 단지 인지할 수 있을 뿐이었다. “주행속도를 계기반에 의해서밖에 그 당장은 별로 실감을 할 수 없는 것도 하나의 특징”이라고 말할 때, 작가는 고속도로를 달리는 자동차 운전석과 하늘을 나는 비행기 조종석 사이의 유사성을 지적하는 것처럼 보인다.

고속도로에서 느끼는 독특한 속도감은 단지 빠른 움직임이 아니라 공간의 매끄러움과 운동의 단조로움에서 비롯하는 것이었다. 이청준 작가는 1970년의 고속도로를 달리면서 오늘날 우리가 자동차 내비게이션에서 경험하는 것과 비슷한 상황을 떠올렸다. “만약 우리들이 탄 차가 고속도로를 달리는 동안 5만분의 1 지도를 가지고 있다면 그 지도 위를 달리고 있는 우리 자신의 움직임을 육안으로도 역력히 읽을 수 있을 정도”라는 것이다. 고속도로를 달리는 속도감이란 제도하듯 잘 그려진 기하학적 공간 안에서 하나의 기호가 밋밋하게 움직이는 느낌이었다. 그에게 고속도로 주행은 육감적이 아니라 추상적인 경험이었다(<경향신문> 1970년 7월 13, 14일).

1970년 개통 이후 경부고속도로는 각종 우표에 자주 등장했다. 제7대 대통령 취임 기념우표 (1971), 제8대 대통령 취임 기념우표 (1972), 통일동산 만들기 우표 (1972).

1970년 개통 이후 경부고속도로는 각종 우표에 자주 등장했다. 제7대 대통령 취임 기념우표 (1971), 제8대 대통령 취임 기념우표 (1972), 통일동산 만들기 우표 (1972).

인프라들의 인프라
매끄럽고 단조로워서 더 강력한 고속도로의 가시성은 수도, 가스, 전기 등 다른 네트워크보다 더 큰 문화적 영향력을 발생시킨다. 경부고속도로는 도로, 철도, 통신망 같은 인프라가 경제와 산업 발전을 위한 기능만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자리잡고 있는 영토에 대한 상상이나 그것을 건설하고 관리하는 국가와 권력에 대한 상상을 만들어낸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고속도로가 미치는 곳이 곧 국가의 경제력과 지도자의 정치력이 선명하게 작동하는 영역이었다.

고속도로의 상징적 역할을 당시의 우표들에서 관찰할 수 있다. 1972년 발행된 ‘통일동산 만들기’라는 제목의 우표는 나무가 빼곡한 녹색의 한반도 지도 위에 부산에서 서울을 거쳐 평안북도와 함경북도 끝까지 뻗은 고속도로를 그려넣음으로써 정치, 경제, 자연의 남북통일을 형상화했다. 1967년 6대 대통령 취임 기념우표와 1971년 7대 대통령 취임 기념우표 사이의 변화는 우리가 지금 경부고속도로를 기억하는 관점의 시작이라 부를 만하다. 경부고속도로가 완공된 바로 다음 해에 또 취임한 7대 대통령 박정희의 얼굴 옆에는 고속도로 인터체인지가 새로 등장했다. 그 다음 해의 8대 대통령 취임 기념우표에서도 대통령 얼굴 옆으로 고속도로를 볼 수 있다. 경제발전의 활력과 대통령의 정치력이 고속도로를 따라 흐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 이후 경부고속도로는 박정희라는 캐릭터와 떨어진 적이 없다.

“싸우면서 건설”했던 경부고속도로 공사 현장의 모습(1970년).

“싸우면서 건설”했던 경부고속도로 공사 현장의 모습(1970년).

이 같은 강력한 상징성은 고속도로를 다른 인프라들의 기준점, 인프라들의 인프라로 만들었다. 경부고속도로의 역할과 의미를 한마디로 묘사할 때 흔히 사용된 것은 “국가의 대동맥”이라는 생명현상의 메타포였다. 기존의 인프라에 빗대는 것으로는 경부고속도로를 표현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반면 그 이후에 등장한 주요 인프라들은 고속도로라는 메타포를 통해 그 국가적 의미를 쉽게 전달할 수 있었다. 초고속 정보통신망은 곧 21세기로 향하는 “정보 고속도로”였다. 한반도 대운하 계획은 “물길의 경부고속도로”를 짓는 일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이 “고속도로”들도 경부고속도로처럼 국토의 곳곳을 연결하고 물질과 정보를 순환시킴으로써 한국 사회를 재구성하겠다는 정치적 비전을 표출하고 있었다.

권력자가 인프라를 통해 자신의 국가관, 세계관을 물리적으로 구현하려는 시도가 항상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경부고속도로의 성공을 모델로 삼은 인프라 프로젝트들은 고속도로 위로 사람과 물자, 그리고 권력까지도 매끄럽게 이동하는 이미지를 모방하고 싶었을 것이다. 현대건설에서 일하면서 경부고속도로의 힘을 목격했던 이명박 대통령이 “물길의 경부고속도로”를 만들고 싶었던 것은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충동이다. 그러나 한반도 대운하 계획이 변형된 ‘4대강 살리기 사업’은 경부고속도로처럼 매끄러운 표면과 운동을 만들어 내지 못했다. 강들을 멈춤 없는 하나의 흐름으로 연결하겠다는 야심은 물과 물고기가 움직임을 멈추면서 실패했다. 물길은 고속도로가 되지 못했다.

대신 이명박 대통령은 2012년 개통한 ‘4대강 자전거길’을 통해 국토를 가로지르는 고속도로의 꿈을 이룰 수 있었다. 4대강변을 따라 건설된 총 1757㎞의 자전거길이 “자전거 고속도로”라고 불리는 것에서 경부고속도로의 영향력을 느낄 수 있다. “1970년 7월 7일 제1호 고속국도인 경부고속도로가 준공된 지 42년 만에 한국인들은 ‘경부 자전거도로’를 갖게 됐다”는 것이다(<조선일보> 2012년 7월 27일). 한강과 낙동강을 연결해서 운하로 만들겠다는 계획은 좌절되었지만, ‘한강 자전거길’과 ‘낙동강 자전거길’은 충주 탄금대와 상주 상풍교를 잇는 100㎞짜리 ‘새재 자전거길’을 통해 기어이 연결되고야 말았다. 강을 따라 가는 것이 아니라 이화령 고개를 숨차게 넘어가는 새재 자전거길을 굳이 4대강 자전거길 사업에 포함시킴으로써 명실상부한 “경부 자전거도로”를 완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경부고속도로가 개통한 1970년에는 모두가 앞으로 달려나가고 있었다. 사진은 경부고속도로 개통기념 마라톤 대회 모습(1970년).

경부고속도로가 개통한 1970년에는 모두가 앞으로 달려나가고 있었다. 사진은 경부고속도로 개통기념 마라톤 대회 모습(1970년).

다시 써야 할 성공신화
경부고속도로에서 연상되는 매끄러운 표면 아래에는 거칠고 위험한 현실이 있었다. 428㎞의 고속도로를 29개월 만에 건설하는 현장은 산업전사들이 적을 향해 무작정 돌격하는 전쟁터였다. 개통 날짜에 맞추어 겨우 마무리한 도로는 이내 파이고 깨져 나갔다. 본공사에서 시간과 돈을 아낀 대신, 도로공사 엔지니어들은 험난한 유지·보수 작업을 떠맡았다. 신화처럼 전해지는 최단기간, 최소비용의 업적이 이들에게는 “자랑할 수 없는 기록”으로 남았다. 박정희 정권이 막을 내린 직후인 1980년 무렵에는 “누더기 고속도로”, “졸속의 표본”이라는 비판도 받았다(<동아일보> 1980년 7월 7일, 11월 25일). 1994년 성수대교가 무너졌을 때에는 건설업계에 팽배한 온갖 부조리의 근원이 경부고속도로 사업에 있다는 얘기도 나왔다.

경부고속도로가 매우 거친 테크놀로지였음을 지적한다고 해서 그 성공신화가 사라질 리는 없다. 신화에는 언제나 사실과 과장과 허구가 뒤섞여 있고, 경부고속도로는 이 요소들이 적절하게 배합된 한국 현대사 성공신화의 원형이자 핵심사례다. 다만 우리는 신화가 시대적 배경 속에서 탄생하고 변형된다는 사실을 상기할 수 있을 것이다. 개통 30주년인 2000년 무렵에 경부고속도로에 대한 관심과 찬양이 부쩍 늘어난 것은 그즈음 한국 사회가 박정희와 그의 시대에 대한 향수에 젖어든 현상과 무관하지 않다. 그러면서 경부고속도로는 1970년대, 그 중에서도 1970년의 테크놀로지로 각인되기 시작했다.

경부고속도로는 1970년 7월 7일 개통식 순간에 완성된 것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 서서히 마무리되고, 힘들게 자리를 잡고, 꾸준히 개선되어 왔다. 이것이 모든 인프라가 존재하고 작동하는 방식이다. 경부고속도로가 한국 사회의 바탕을 이루고 그 구성원들의 삶을 떠받치는 인프라의 역할을 계속하려면, 1970년에 머물러 있는 성공신화도 더 길고 복잡한 이야기로 업데이트할 필요가 있다.

그 시절 “하면 된다”와 “잘 살아보세”를 이정표로 삼았던 경부고속도로가 이제 새로운 목적지를 설정할 수 있을까. 2010년 7월 7일 당시 국회의원이었던 박근혜 대통령이 트위터에 올린 글이 여러 의미로 참고할 만하다. “오늘 경부고속도로 개통 40주년입니다. 경부고속도로의 의미는 큰 공사가 아니라 발상의 전환에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가 선진국이 되기 위해 필요한 것도 발상의 전환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전치형 KAIST 과학기술정책대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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