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어진 선거구 획정, 17대 총선과 ‘닮은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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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에도 선거구 조정 시한 넘겨… “지역구 늘리고 비례 축소” 이견 상황도

“‘선거법 처리 늑장’ 부작용 속출.”

“졸속 선거구 획정, 이젠 바꿔야 한다.”

“꼬인 선거구 획정 ‘출구’ 안 보인다.”

선거구 획정이 늦어지면서 이번 20대 총선의 상황을 말해주는 듯한 신문의 기사 제목들이다. 하지만 이 제목들은 차례대로 2004년 17대 총선, 2008년 18대 총선, 2012년 19대 총선에 실렸다. 이 제목만 봐도 늦어진 선거구 획정은 이번 총선뿐만이 아니라 4년마다 치르는 정기행사가 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경기를 앞두고 미리 확정해야 할 룰이 경기 바로 시작 전에 정해지는 엉뚱한 사태가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17대 총선에서는 선거(2004년 4월 15일)를 37일 앞둔 3월 9일에야 획정안이 담긴 선거법이 통과됐다. 2월 27일 선거구획정안이 제출돼 3월 9일 국회에서 통과됐지만 이후 선거 일정이 촉박해 선거 관리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했다. 18대 총선에서는 선거구획정안이 2월 15일 제출됐다. 선거(2008년 4월 9일)를 47일 앞둔 2월 22일 선거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최악이었던 17대 총선보다는 불과 열흘의 차이가 났다. 19대 총선 때에는 선거구 획정안이 일찌감치 제출됐다. 2011년 11월 25일이었다. 하지만 총선(2012년 4월 11일)을 44일 앞둔 2월 27일에야 선거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됐다.

가장 기록적인 ‘초유’의 선거는 뭐니뭐니 해도 2004년 17대 총선이었다. 올해 20대 총선은 선거구 획정 지연과 관련해 여러 모로 17대 총선과 닮아 있다. 당시 17대 총선을 앞두고 헌법재판소가 기존 국회의원 선거구에 대해 선거구 인구편차를 3대 1 이하로 조정하라며 한정 합헌을 내렸다. 2003년 12월 31일이 시한이었다. 하지만 여야 정당은 선거법 개정에 대한 합의를 이끌어내지 못했다. 자연스럽게 모든 선거구가 위헌인 상황이 두 달 정도 지속된 끝에 이듬해 3월 9일 국회에서 관련법이 통과됐다.

새누리당 원유철(왼쪽), 더불어민주당 이종걸 원내대표(오른쪽)가 2월 15일 국회의장실에서 정의화 의장(가운데) 중재로 선거구 획정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만나 인사한 뒤 등을 돌려 자리로 가고 있다. / 권호욱 기자

새누리당 원유철(왼쪽), 더불어민주당 이종걸 원내대표(오른쪽)가 2월 15일 국회의장실에서 정의화 의장(가운데) 중재로 선거구 획정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만나 인사한 뒤 등을 돌려 자리로 가고 있다. / 권호욱 기자

17대 총선 겨우 37일 앞두고 통과
이번 20대 총선 역시 17대 총선 때처럼 헌법재판소가 선거구를 조정하라고 한 시한(지난해 12월 31일)을 넘기면서 기존 선거구가 모두 사라지는 사태가 벌어졌다. 2004년 당시는 선거구 인구편차를 3대 1로 조정하라고 했지만, 이번 총선에서는 2대 1로 조정하라는 결정을 내렸다. 지난해 12월 15일부터 예비후보 등록이 시작됐지만 올해 1월 1일부터 모든 예비후보들이 불법 선거운동을 하는 결과를 낳았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편법이기는 하지만 예비후보자에게 선거운동을 허용했다. 모든 선거구가 위헌인 상황이 17대 총선처럼 올해 총선에서도 기록으로 남을 것으로 보인다.

2004년 초 16대 국회는 열린우리당이 소수여당이었다. 한나라당·민주당·자민련이 야당이었다. 2003년 국회 정치개혁특위가 선거구 획정과 의원 정수에 대한 합의를 도출하려 했으나 여야의 이해 대립으로 회의조차 열리지 못했다. 때문에 위원장(목요상 의원)이 사퇴하는 상황까지 벌어진 데다 시한 만료로 국회 정치개혁특위가 자동으로 해체됐다. 2004년 신년 초에 여야는 정치개혁특위를 재구성했다. 당시 국회에는 한·칠레 자유무역협정(FTA) 비준동의안, 이라크 파병안이 선거법과 얽혀 복잡한 양상을 띠었다. 여기에다 친일 반민족행위 진상규명 특별법안까지 야당 반대로 선거법 협상과 맞물렸다. 올해 20대 총선의 선거법이 여당인 새누리당에서 북한인권법, 테러방지법, 서비스산업발전기본법, 노동관계법 통과와 연계시키면서 합의가 늦어지는 것과 비슷한 경우다.

17대 총선에서 한나라당·민주당·자민련 등 야3당은 지역구 의원수 243명안(16대 국회의원 지역구 227명·비례 46명)을 주장했고, 여당인 열린우리당은 지역구 의원수 227명안을 주장했다. 야3당의 주장은 지역구를 16대 국회보다 16개 늘리는 것이었다. 반면 열린우리당은 지역구를 늘리는 것과 비례대표를 줄이는 것에 반대했다. 당시 한나라당과 열린우리당의 입장을 비교해 보면 올해 20대 총선 협상에서 새누리당이 지역구를 늘리고 비례대표를 줄이자고 한 상황과 비슷하다. 반대로 더불어민주당은 비례대표를 줄이지 않으려고 했다가 비례대표 선출방식을 바꾼다는 취지로 당론을 바꿨다.

2004년에는 1여(열린우리당)3야(한나라당·민주당·자민련)의 복잡한 의원 정수 싸움이 몇 달간 지속됐다. 2004년 3월, 총선을 거의 한 달 앞두고 결국 여야는 지역구를 243석으로 늘리고, 비례대표를 56석으로 늘렸다. 이 과정에서 273명이던 국회의원 정수가 299명으로 크게 늘어났다.

늦어진 선거구 획정, 17대 총선과 ‘닮은꼴’

17대 총선은 신인들에게 불리했다. 당시 정치신인들의 예비선거운동을 선거일 120일 전부터 허용하기로 하는 법안을 마련했다. 하지만 선거구 획정과 맞물려 이 법안의 통과가 늦어지면서 신인들은 현역의원들과 힘겨운 싸움을 벌여야 했다. 하지만 2004년 3월 12일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탄핵 소추안이 국회에서 가결되면서 총선구도는 격변했다. 열린우리당의 신인들이 대거 당선됐다.

올해 20대 총선에서 신인들 역시 힘겨운 선거를 맞이하고 있다. 선거구 조정 예상지역이 수십여 곳을 넘어서기 때문에 어디에서 선거운동을 해야 할지 신인들은 막막하기만 하다. 선거를 두 달도 채 남기지 않고 있지만 예비후보로 등록조차 하지 않은 신인들이 많다. 인천 중·동·옹진에 출마하는 더불어민주당의 권보근 후보는 “지역구에 강화지역이 합쳐질 가능성이 높아 아직 예비후보에 등록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권 후보는 “당에는 공천을 신청했지만 지역구가 불확실한 상황에서 선거운동을 할 수가 없어 그저 선거구 획정만 지켜보고 있다”고 말했다.

정치신인들의 힘겨운 싸움도 마찬가지
짧은 기간 안에 지역구가 크게 늘어나고 큰 변동이 생기는 것도 17대 총선과 20대 총선의 공통점이다. 올해 총선에서 선관위는 선거 실무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통·폐합 선거구가 결정되지 않아 투표소 확보 등의 선거업무를 한꺼번에 처리해야 할 것으로 예상된다. 각 정당에서는 선거구 획정 지연으로 올해 총선에서 처음 도입되는 안심번호 여론조사 일정에도 차질을 빚고 있다.

17대 총선에서는 전국적으로 25곳이 분구됐으며, 17개 지역이 통·폐합됐거나 조정됐다. 이번 총선에서는 경기와 서울 등 대도시 지역에서 13석이 증가하고, 농어촌에서 6석이 감소할 것으로 보인다. 국회의 한 관계자는 “이번 총선에서도 지역구가 조정되는 곳이 많다”면서 “이렇게 될 경우 해당 지역구에 이해당사자를 최소 5명씩만 잡아도 100여명의 후보가 피해를 보게 되는 셈”이라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어떤 경우든 여야 정당의 현역의원으로서는 답답할 일이 없기 때문에 결국 선거구 획정이 늦어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참여연대 의정감시센터는 2월 17일 “신속하면서도 올바른 선거구 획정”을 촉구했다. 의정감시센터는 “4월 13일 총선까지 60일도 남지 않았음에도 선거구가 획정되지 않아 정상적인 선거 준비가 안 되고 있는 비정상적인 상태를 빨리 끝내야 한다”고 말했다. 연세대 박명림 교수(정치학)는 “선거가 임박한 상황에서 이해당사자인 국회의원들이 선거구 조정을 한다는 사실 자체가 합의를 힘들게 하고 있다”면서 “선거 룰에는 이해당사자가 개입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민주주의 원칙”이라고 말했다. 박 교수는 “총선이 끝난 후에 바로 중립적인 선거구 획정위를 출범시켜 다시는 선거 전에 룰을 확정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윤호우 선임기자 hou@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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