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동네 책방, 서점을 편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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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촌에 문 연 문학전문점, 책을 직접 골라 들여오고 손님들에게 추천

“좋아하는 일을 하고 싶다.” 언뜻 소박한 바람처럼 들린다. 그러나 한국 사회에서 이는 여간한 야망이 아니다. ‘좋아하는 일’을 하기 위해서 감수해야 할 위험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선호도 취향도 감각도 대형자본이 제시하는 길을 따라 결정되는 게 한국 사회다. 대형마트의 진열대, 모든 동네에 똑같은 모습으로 자리한 프랜차이즈 등은 대형자본의 질서정연한 구획짓기에 획일화된 한국 사회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 질서에서 벗어나 ‘좋아하는 일을 하겠다’는 선언은 더 이상 소박한 바람이 아닌, ‘계란으로 바위치기’와 같은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다.

출판사 편집자 출신이 차린 ‘고요서사’
지난해 10월, 서울 용산구 후암동에 있는 해방촌 오거리(신흥로 98)에 ‘고요서사’라는 이름의 작은 책방이 생겼다. 문학책과 인문사회예술책을 판매하는 서점이다. 책방을 연 차경희씨(33)는 출판사 편집자 출신이다. 편집자 일을 그만두고 서점을 낸 것은 “좋아하는 일을 하고 싶어서”였다. 물론 편집자 일도 좋아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2년 전 유럽 여행에서 동네마다 작은 책방들이 있는 것을 보고 우리나라에도 좋은 작은 책방들이 많이 생겼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편집자 일을 그만두면 수입은 줄고 생활이 불안정할 것은 명백했다. 8년의 경력이 단절될 수도 있었다. 주변에서는 편집자 일을 마치고 60살이 되면 그때 해보라고 조언했다. 다음 주의 재정상황도 예견하기 어려울 정도로 경제적으로 힘들 것이고, 책방이 문을 열어 안정되더라도 젠트리피케이션의 영향을 받을지도 몰랐다. 긍정적인 전망보다 부정적인 전망이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아한다는 것은 그만큼 드문 가치”임을 알기에 시작했다.

서점 ‘고요서사’의 대표이자 서점 편집자인 차경희씨가 서점에서 업무를 보고 있다. / 박송이

서점 ‘고요서사’의 대표이자 서점 편집자인 차경희씨가 서점에서 업무를 보고 있다. / 박송이

서울 시내 곳곳에 대형서점이 자리잡고 있고 인터넷 서점에서는 언제든 원하는 책을 살 수 있다. 거기에서 웬만한 책은 다 구할 수 있고 멤버십 서비스에 무료배송까지 소비자들에게 편의를 제공하는 서비스도 다양하다. IMF 사태 이후 동네 서점이 하나둘 자취를 감추고, 책 소비의 패턴이 대형서점을 중심으로 굳어진 지금, 해방촌 꼭대기의 작은 책방에서 책을 사려는 사람들이 있을까? 시작할 때만 해도 차씨 본인마저 사실 자신이 없었다. 그러나 많지는 않더라도 SNS를 보고 일부러 찾아오는 손님이 있을 만큼 책방을 찾는 발길은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차비, 할인율, 마일리지 혜택 등등을 살펴보면 결코 합리적 소비는 아니다.

차경희 서점 편집자는 “책을 싸게 사는 것도 아니다. 여기서 산다고 특별한 책을 사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독자들은 작은 서점에서 책을 구매하면서 대형서점에서 느낄 수 없는 것을 느낀다”고 말했다. 차 서점 편집자는 그런 의미에서 자신을 ‘사장’이나 ‘대표’가 아닌 ‘서점 편집자’로 소개했다. 단순히 돈을 받고 책을 파는 것이 아니라 편집자가 책을 편집하듯, 서점이라는 공간을 편집한다는 의미에서다. 책을 고르고 진열하고 찾아오는 손님들에게 책을 소개하는 일은 끊임없는 편집과정에 다름 아니다. ‘고요서사’에는 현재 약 600종의 책이 진열돼 있다. 400종으로 시작했는데 신간이 조금씩 늘어 600종이 됐다. 차경희 서점 편집자가 매주 직접 고르고 배치한 책들이다. 더 진열하고 싶은 책들도 많지만 아직은 자금 사정상 마음껏 책을 들여놓지 못하고 있다. 매주 들여오는 책들의 내용을 꼼꼼히 알지는 못하지만 바쁘더라도 서문만이라도 읽어두려고 한다. 그래야 손님들에게 책을 추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도네시아로 여행을 가는데, 인도네시아 바닷가에서 읽을 만한 책을 추천해달라는 손님도 있고, 퇴사하는 직원에게 선물할 책을 골라달라는 손님도 있다. 출판사 편집 일을 했기 때문에 책이 만들어진 뒷이야기 등을 알고 있어서 책을 소개하면서 이러한 이야기도 해드리면 손님들이 호기심 있어 하고, 책에 대해 다른 이야기도 자연스럽게 소통하며 나눌 수 있게 된다.”

해방촌의 작은 책방 <고요서사> / 박송이

해방촌의 작은 책방 <고요서사> / 박송이

“소수지만 작은 서점 찾는 독자 있다”
‘고요서사’와 같은 작은 서점의 흐름은 이전부터 있었다. 홍대의 ‘땡스북스’, 대학로의 ‘이음서점’, 해방촌의 ‘스토리지 북 앤 필름’, 연남동의 ‘헬로 인디북스’, 망원동의 ‘책방만일’ 등은 지역에서도 자리를 잡아 지역주민들도 많이 찾는다. 돈만을 매개로 한 소비가 아니라 다른 방식의 소비를 원하는 소비자들이 일부러 먼 거리에서 찾아오기도 한다. 그러나 여전히 수익은 보잘 것 없다. 대다수의 작은 서점이 책을 판매한 돈으로만 생계를 유지하기는 어렵다. 그러다 보니 ‘투잡’을 하는 서점 주인들도 많다. 디자인이나 외주 교정 등의 일로 수입원을 따로 만드는 경우가 다반사다. 동시에 한편에서는 작은 서점만이 팔 수 있는 책을 만들기 위해 다양한 기획을 시도하고 있다. 차경희 서점 편집자는 지난 크리스마스에 선물 패키지 기획을 했다. 날씨가 추워지면서 손님의 발길이 줄자 무언가를 새롭게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위기감이 들어서다. 해방촌 인근의 가까운 카페와 제휴해 크리스마스 선물 패키지를 마련했다. 크리스마스와 관련한 책을 소개하고 이를 쿠키와 함께 선물 포장했다. 블로그에 글을 올리자 의외로 많은 손님들이 블로그를 보고 찾아왔고, 찾아온 손님들이 다른 책을 함께 구매하기도 했다. 작은 책방들과 함께 헌책 기획전을 계획하고도 있다.

독자들이 작은 서점에서 책을 사는 이유는 무엇일까. 차경희 서점 편집자는 “돈을 매개로만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에 갈증을 느끼는 독자들이 아직 소수지만 분명히 있다”고 말했다. 책을 살 때 책 말고 독자들이 얻고 싶어하는 다른 무언가가 있다는 것이다. 최근 일본에서 성공한 ‘츠타야’ 서점은 이에 대한 힌트를 제공한다. 일본의 ‘컬처 컨비니언스 클럽’(CCC)이 운영하는 츠타야 서점은 독서인구가 감소하고 출판시장이 불황임에도 홀로 성장세를 이어가 화제가 됐다. 츠타야 서점을 만든 무사다 무네아키 CCC 대표는 고객에게 ‘책’만 팔지 않고 ‘라이프 스타일’까지 제공하는 것을 모토로 삼는다. 츠타야 서점의 회원 수는 5만명에 이르고, 일본 각지 매장 수만 1400여개에 이른다. 독자들의 욕구를 간파한 영리한 자본이 기존 대형서점에는 없었던 다른 가치들을 전면에 내세운 것이다.

그러나 동네의 ‘작은 서점’들의 가치는 자본이 돈으로만 만들어 낼 수 없는 것들이기도 하다. 차경희 서점 편집자는 “좁은 상권이라도 길을 가면 서점이 있고, 책을 사고 싶으면 그 서점에 가는 것이 일상화됐을 때 누릴 수 있는 것들이 많다고 생각한다. 유럽의 경우 동네 서점에서 저자와의 만남, 낭독회 등을 여는 게 오랜 역사 속에서 자연스러운 일이 됐다”고 말했다.

<박송이 기자 ps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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