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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의당’ 창당, 안철수 발 정계개편 신호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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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킬 수 없는 야권 대격변…진보·보수 사이 중간세력 만들어질까

“인편으로 탈당계를 제출했다. 결과 통보는 문자로 받았다. ‘탈당 처리되었습니다. 그동안 성원에 감사드립니다.’ 잘 저장해두긴 했다.” 18대 선거 때 당시 민주통합당 비례 15번으로 국회에 입성해 당 대변인, 원내부대표를 역임했던 김유정 전 의원(국민의당 발기인)의 말이다.

그는 MB정부 시절, 민간인 불법사찰 사건이나 용산참사 때 ‘MB정권 저격수’로 맹활약했다. 그러나 2012년 치러진 총선에서 공천을 받지 못했다. “25년 동안 적을 두었던 당을 떠나기로 결심을 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지나간 이야기를 길게 하고 싶진 않다. 공천 탈락 과정에서 상처가 컸지만 대의를 위해 묵묵히 받아들였다. 지리멸렬하게 분열로 가는 출발점이 19대 총선 당시 패권주의 공천 때부터라고 본다. 공천 실패와 대선 실패, 누군가는 반성하고 사죄해야 하는데 아무도 하지 않았다. 솔직히 그 과정에서 상처가 컸다.”

기자는 안철수 의원이 주도하고 있는 국민의당 발기인 명단에서 김 전 의원의 이름을 발견했다. 김 전 의원은 손학규계로 분류되는 인사다. 그의 ‘결심’이 미묘해 보이는 까닭이다. 김 전 의원은 1월 12일 기자와 통화에서 “개별적으로 결단한 일”이라고 말했다. 칩거 중인 손학규 전 민주통합당 상임고문과 상의했느냐는 질문에는 “노 코멘트”라고 답했다. 다음날, 그는 광주광역시 북구갑 출마를 공식 선언했다.

1월 8일 안철수 의원과 한상진 창당준비위원장(가운데) 등이 서울 마포구 당사에서 국민의당이라는 신당 당명을 발표한 뒤 설명하고 있다. / 강윤중 기자

1월 8일 안철수 의원과 한상진 창당준비위원장(가운데) 등이 서울 마포구 당사에서 국민의당이라는 신당 당명을 발표한 뒤 설명하고 있다. / 강윤중 기자

떠난 사람들, 그리고 남은 사람들

“내가 따랐던 김근태 의장의 기본 정치철학은 민주세력의 연합과 단결을 주장하는 민주대연합 노선이었다. 정치에 나서겠다고 결심한 것도 그런 정치 원칙과 노선에 동의했었기 때문이다.”

허영. 2012년 당시 그는 안철수 대선후보의 비서실장을 역임했다. 후보단일화 논의 막바지 때 안철수와 문재인 후보의 단독회동에도 배석했다. 말하자면 그는 안측 핵심인물이었다. 그는 국민의당에 합류하지 않았다. 강원 춘천에서 더불어민주당 후보로 출마할 예정이다. “개인적인 이유로는 저를 위해 1600분이 당원 가입을 해주셨다. 그 분들 뜻을 저버릴 수가 없었다.”

안 후보의 비서실장을 역임했지만, 그의 지역구에는 국민의당 쪽으로 출마를 준비하는 인사가 있다. 둘 다 출마한다면 김진태 새누리당 의원이 당선될 가능성이 높다. “당을 달리했다고 배신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큰 길’에서 다시 만날 것으로 확신한다. 저도 누구를 따라다니는 사람, 누구의 사람이 아니라 자기 정치를 하는 정치인이 될 것이다. 비서실장의 경험이 새로운 세대교체의 선봉으로, 통합의 구심점 역할을 하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한다.”

1월 10일, 국민의당 발기인 1978명의 명단이 발표됐다. 발기인으로 어느 지역의 어떤 사람이 참여했느냐는 그 당의 조직력을 뜻한다. <주간경향>이 발기인 명단을 정밀 분석한 결과 발기인 1978명은 사실이 아니다. 최소 3명의 인사가 중복 게재됐다.

더 눈에 띄는 점은 과거 안철수가 대선후보로 나올 당시 함께 했던 진심캠프 및 정책네트워크 내일, 새정치연합 등에 포괄됐던 인사들의 상당수가 발기인 명단에서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 이들은 참여하지 않았을까.

“세 가지 경우가 있지 않겠나. 일단 지금 국면에서 신당이 만들어지는 것에 대해 의미가 있다고 보지만 하고 있는 생업 때문에 참여할 수 없는 나 같은 경우. 둘째, 당시에는 동의했지만 현재는 신당 창당 시점이 아니라고 판단한 경우. 마지막으로 김성식 선배처럼 다른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는 경우다.” 윤태곤 의제와전략그룹 ‘더 모아’ 정치분석실장의 말이다. 그는 지난 대선 당시 상황실 부실장을 맡았었다. 당시 상황실장은 금태섭 변호사가 맡았다.

윤 실장의 ‘분류’에 따르면 금 변호사가 두 번째 경우에 해당할 것이다. 2015년 8월, 금 변호사는 대선 당시부터 창당, 그리고 합당과정을 복기하는 내용을 담은 책 <이기는 야당을 갖고 싶다>를 냈다. 책에 따르면 지난 대선과정에서 안철수 후보의 출마나 후보 사퇴 결심과정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즉홍적이었다. 예컨대 후보단일화 담판 협상과정에서 안철수 쪽 협상팀이 받은 메시지는 ‘그냥 버텨라’였다. 더 심각한 이야기도 있었다. 금 변호사는 책에서 ‘비선의 전횡’, 정확히는 ‘비공식 기구의 발흥’을 주장했다. 공식 선거조직에 들어와 있지 않던 박경철 안동신세계병원 원장과 몇몇이 참여하는 모임이 중요한 결정을 내리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 모임과 관련해서는 이런 부분도 눈에 띄는 대목이었다. “…참석자 중 만일 알려진다면 언론에 대단히 부정적 기사가 실릴 수 있는 경력을 가진 사람이 있다는 것도 확인되었다.(…) 이 사람은 박 원장이 평소 멘토로 부르는 사람인데, 캠프에서 인화를 해치던 젊은 친구의 아버지이기도 했다. 그 친구가 자신의 아버지와 안 후보가 오랜 친분이 있다느니, 자신은 후보가 직접 선발했으며 캠프 내부에 문제가 없는지 감독하는 역할을 맡았다느니 하고 떠들고 다니던 말이 아주 근거가 없는 건 아니었던 것이다.” (위의 책 188~189쪽)

‘초창기에 합류했다 노래방 모임 이후 빠진 멤버’에 대한 술회나 나중의 일이지만 ‘비공식 라인의 구성원이 마스크를 쓰고 사무실에 들락거리다 기자들에게 걸려 조직 전체를 웃음거리로 만들기도 했다’(191쪽)는 기술도 충격적이다.

지난해 12월 21일 안철수 의원과 탈당한 의원들이 신당 추진계획을 밝히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강윤중 기자

지난해 12월 21일 안철수 의원과 탈당한 의원들이 신당 추진계획을 밝히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강윤중 기자

‘안철수 비선’은 아직도 작동할까

기자는 2012년 대선 당시 안철수 캠프의 거의 초기단계부터 취재를 했다. 대변인 격이던 유민영 전 참여정부 춘추관장을 여의도 인근의 커피숍에서 만나 인터뷰를 진행했다. 다른 핵심 관계자들의 취재도 마찬가지였다. 안철수 비공개 캠프의 활동에 대한 의혹기사를 썼지만 금 변호사의 ‘폭로’에 비춰보면 비선의 본류(本流)를 캐치하진 못한 셈이었다. 안 후보가 후보 사퇴하던 날, 그동안 나타나지 않았던 박경철 원장이 사퇴 기자회견장에 나타나 눈물을 흘렸다. 당시엔 박 원장의 말마따나 ‘절친관계’로 봤다.

정말 박경철 원장은 별도의 비선을 운영했을까. 마스크를 쓰고 나타난 비공식 라인의 구성원은 누구였을까. 취재 결과 당시 마스크를 쓰고 나타난 인사는 삼성경제연구원 선임연구원 출신 곽수종씨였다. 한 핵심 인사는 “널리 공유된 이야기는 아니지만 당시 핵심 관계자들 사이에 이른바 ‘곽박모임’이라는 이름으로 비선조직 ‘서초동 모임’이 불리기도 했다”고 밝혔다. 그는 당시 새정치연합과 민주통합당 통합 협상과정에 당 총무팀장의 직함으로 주도적인 역할을 해 안 의원의 ‘집사’라는 별명을 얻기도 한다. ‘곽박모임’의 핵심인 곽수종, 박경철은 모두 이번 국민의당 발기인에 이름을 올리지 않았다. 비선논란에 대해 안 의원은 “외부에 있다고 모두 비선은 아니다”라며 “많은 분들의 의견 듣고 본부장 레벨에서 의사결정을 했다”라고 답했다. 앞의 핵심인사는 이야기 끝에 이런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금 변호사가 ‘캠프의 인화관계를 해치던 젊은 친구’라고 적은 인사는 배모씨(30)다. 배씨의 아버지는 영남일보 회장·동양종합건설 대주주인 배성로씨(61)다. 배 회장은 이른바 ‘서초동 모임’의 핵심 멤버였다. <노컷뉴스>는 지난해 3월 30일 “안 의원이 배 전 대표의 서울 강남구 대치동 자택에서 회동해 중요한 결정을 한다고 알려지면서 일부 캠프 참모진들이 거세게 항의한 일이 있었다”고 보도한 바 있다. 금 변호사가 책에서 밝힌 ‘우려’는 현재진행형이다. 검찰은 지난해 여름 정준양 포스코그룹 회장 비리사건을 집중 수사했다. 배 회장의 회사 동양종합건설 특혜와 비자금 논란이다. 게다가 중요한 결정이 내려진 시점은 안철수 의원이 포스코 사외이사로 재임하던 시기였다.

금 변호사는 더불어민주당에 남았지만, 창당절차를 밟고 있는 국민의당에 대한 공식적인 입장표명은 하고 있지 않다. 안철수 의원의 탈당(12월 13일) 이틀 후 ‘자주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는 분’(금 변호사의 표현) 17명과 함께 문재인 대표에게 ‘쇄신 당직인사 단행 및 주류부터 솔선하는 물갈이 혁신’을 촉구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참여한 면면을 보면 과거 새정치연합의 핵심 인사들과 박원순 서울시장 측근으로 분류되는 인사들이 주축이 되고 있다. 금 변호사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서 이 성명은 자신이 기초했다고 밝히고 있다. 이들 중 탈당해 국민의당에 합류한 인사는 아직 없다.

탈당과 신당 결성에 대한 더 근본적인 공격은 이제 막 시작되고 있다. 국민의당이 박형준 국회 사무총장 영입을 시도하고 있다는 보도가 나온 1월 13일, 조국 교수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글을 올려 국민의당에 합류한 MB 청와대 연설기록비서관 출신 정용화, 이태규와 함께 박 사무총장의 MB 대선캠프 대변인, 청와대 정무수석 출신 경력을 거론하며 “이제 안철수에게는 문재인이 아니라 이들이 ‘동지’”라면서 “국민의당이 선택한 ‘중도’의 길이 무엇인지는 그 안에 있는 사람을 보면 안다”고 비판했다.

“그의 첫인상은 차가워 보였다. 그러나 사람은 겪어 봐야 그 진면목을 안다. 단언컨대 그는 누구보다 성실했다. 가장 일찍 하루 업무를 시작하는 곳이 상황실인데, 아침 7시에 출근하는 우리 상황실 사람들보다 먼저 나와서 사무실 불도 켜지 않은 채 모니터를 지켜보고 있었다.” 지난 대선 당시 안철수 진심캠프 상황실에서 일했던 이유미씨가 펴낸 책 <안철수와 함께 한 희망의 기록 66일>에 나오는 이태규 당시 미래기획 실장에 대한 묘사다.

국민의당 주변에서는 지금 창당작업을 기획·주도하는 인사가 이태규 기획단장이라고 입을 모은다. 그는 지난 대선 당시 일각에서 제기된 의혹, ‘안철수 후보와 MB정부의 은밀한 연계설’의 핵심 당사자다. 지난 대선 당시 진심캠프에서 일했던 한 핵심 인사는 이렇게 말했다. “그런 이야기는 당시에는 다 헛소리였다. 안 후보도 그런 의혹이 제기되는 것을 의식했는지 이 실장을 핵심 의사결정 과정에 포함시키지 않았다. 그러다가 새정치연합을 만드는 시점부터 신뢰를 얻어낸 것 같다. (지금은?) 나도 직접 겪지는 못했지만 전적으로 신뢰하고 일을 맡기는 것으로 안다.”

이태규 전 실장은 왜 합류했을까. 국민의당 공동창당 준비위원장을 맡고 있는 윤여준의 행보와 관련 있다는 것이 당시 진심캠프 주변 인사들의 평가다. 그는 항공대 82학번으로 총학생회장을 역임했다. 운동권 출신이었다. 정치는 이기택 총재가 이끌던 ‘꼬마민주당’으로 입문했다. 꼬마민주당은 나중에 신한국당에 통합된다. 이것이 운명을 갈랐다. 따라가지 않은 노무현 의원 등의 선택과 달리 다수를 따라 그 역시 여권 인사가 된 것이다. 조순형 의원의 보좌관으로 정치를 시작한그는 윤여준 전 장관이 국회의원을 하던 시기에 보좌관을 역임했다.

김성식 의원 등과 함께 MB계 인물이라는 면에서 커넥션 의혹을 샀지만, 기자들 사이에서는 다른 측면에서 그의 역할을 주목했다. 2007년 한나라당 경선 당시 그는 정두언 의원이 이끌던 네거티브 대응팀의 멤버로 일했다. 당시 대응팀은 이명박 후보에 대한 네거티브 대응 차원으로 만들어진 것이지만, 박근혜 당시 후보에 대한 광범위한 자료를 수집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가 안철수 캠프로 넘어올 때 당시 수집한 수많은 ‘자료’를 들고 왔으리라는 추측 때문이었다. “그럴 사람이 아니다. 설혹 자료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걸 후보에게 제공할 이유가 없다. 오히려 해가 된다. 정말 네거티브를 하려 했다면 후보와 상관없이 밖으로 뿌렸으면 그만 아닌가.” 윤태곤 실장의 말이다.

금태섭 변호사는 지난해 8월에 펴낸 2012년 대선 당시를 회고하는 책에서 안철수 후보의 비선이 후보 사퇴 등 중요사항을 결정했다고 주장해 논란이 일었다. 사진은 2012년 11월 23일 사퇴회견을 마치고 떠나던 안철수 후보가 울먹이는 유민영 대변인(왼쪽), 허영 비서실장을 위로하고 있다. / 강윤중 기자

금태섭 변호사는 지난해 8월에 펴낸 2012년 대선 당시를 회고하는 책에서 안철수 후보의 비선이 후보 사퇴 등 중요사항을 결정했다고 주장해 논란이 일었다. 사진은 2012년 11월 23일 사퇴회견을 마치고 떠나던 안철수 후보가 울먹이는 유민영 대변인(왼쪽), 허영 비서실장을 위로하고 있다. / 강윤중 기자

끊이지 않는 ‘안철수-MB 커넥션’ 의혹

이태규 단장을 주목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결국은 새누리당 안팎의 ‘합리적 보수파’와 지지층을 끌어올 핵심적인 라인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딜레마가 생긴다. 이른바 친박-진박 논란에 휩싸여 있는 새누리당 주변의 ‘합리적 보수파’란 결국 실용주의라는 이름으로 이명박을 선택했던 40대에서 50대까지 유권자들의 지지를 받은 인사들과 ‘당 쇄신파’이기 때문이다. <하드볼게임>의 저자 김장수 박사(그는 현재 새누리당 남양주 예비후보로 등록하고 있다)는 과거 기자에게 이런 설명을 한 적이 있다. “이명박을 선택했던 유권자들을 면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계산해 보면 답이 나온다. 2002년 대선에서 노무현을 찍었다가 참여정부에 실망해 2007년 대선에서 이명박을 찍은 사람의 표수에 대한 계산이 가능하다. 461만 표다.” 야권이 정권교체를 이루기 위해서는 실망 때문이든, 아니면 부동산·성공신화를 쫓았든 ‘한때 MB 지지자들’을 돌려세워야 한다. 여기에 지난 대선에서 박근혜를 지지했지만, 국정화 교과서나 노동정책, 외교정책에 실망한 ‘합리적 보수’ 역시 흡수해야 한다.

국민의당은 향후 총선에서 어느 정도의 의석을 받으면 성공하는 것일까. 안철수 의원은 개헌 저지선이라며 100석을 언급한 바 있다. 안 의원의 발언에서 100석의 주체는 명확하지 않다. 하지만 국민의당 단독으로 100석을 확보하는 것은 쉽지 않다. 오히려 야당 분열로 수도권 궤멸-거대여당의 탄생 시나리오가 현실성이 높다. 그리고 그렇게 된다면 그 책임은 야권의 두 지도자 문재인과 안철수에게 돌아갈 가능성이 있다. 당장 탈당을 감행해 당을 만든 안철수에게는 1987년 6월 민주항쟁 후 이른바 ‘4자 필승론’을 내세우며 출마를 고집했던 DJ의 ‘오판’이 겹친다.

“안철수 신당의 창당으로 한국의 정치질서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아직 새누리당에서는 그것을 눈치 채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새누리당에서 고위 당직자를 역임했던 인사의 말이다. 무슨 말일까. “지난 총선이나 대선과정을 복기해 보라. 새누리당이나 박근혜 후보가 시쳇말로 ‘꼴통짓’을 하고 당이 위기상황으로 빠져들었다. 지지율이 떨어지니 비상대책위를 만들어 중도노선을 걸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 자리가 없다. 그 자리에 안철수가 당을 만들어 꿰차고 들어온 것이다.”

이 인사는 2000년대 중반부터 10여건이 넘는 크고 작은 선거 기획에 관여했다. 이 인사의 말에 따르면 “새누리당에 가장 유리한 패는 양자대결 구도”였다. 그런데 국민의당의 등장으로 그 패가 깨진 것이라는 설명이다. “가장 쉬운 예를 들어보자. 여권의 공천은 상대 당의 전략을 봐가며 결정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한명숙이 후보로 나오는 것을 보고 오세훈을 서울시장 후보로 낼 수 있었고, 야권 동작을 후보가 노회찬으로 결정되자 나경원을 내세울 수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3당 구도다. 그것도 안 먹히게 되었다.” 유권자 입장에서는 이념구도에서도 기존의 진보·보수 구도에서 중도이념이라는 ‘선택지’가 생긴 것이 큰 변화라는 것이다.

이 인사는 야권의 사실상 ‘제3당’ 출현을 “87년 체제의 시작 지점으로 돌아간 대격변이 일어난 것”이라고 평가했다. “안철수 의원이 탈당한 것이 12월 13일이다. 아직 채 한 달밖에 안 되었다. 아직 국민들은 양당체제라는 프레임에 익숙하다. 그런데 일단 이 프레임이 깨지고, 3당 체제를 현실로 받아들이는 순간부터 달라질 것이다. ‘A 아니면 B’라는 ‘진영 순혈주의’ 외에 다른 대안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당장 야권이 차지하는 포션에서부터 드러나지 않나. 전체적으로는 대안을 놓고 경쟁하는, 마이너스 정치가 아닌 플러스 정치가 될 것이다.” 과연 그렇게 될까.

한국 정치 질서 근본변화 시작됐다?

“왜 그때는 안 된다고 했고, 지금은 그래도 된다고 이야기하는 것인가. 잘 생각해 보면 상당히 이상한 일이다. 이런 사태가 없었다면 이번에 영입하는 사람은 좋은 분이라고 말할 수 있었을까.” 국민의당 발기인으로 참여한 김병규씨의 말이다. 그가 말하는 ‘그때’는 과거 이상돈 전 중앙대 교수를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영입하려다 ‘비토’를 당한 사건을 말한다. ‘이번’은 1월 14일 더불어민주당이 발표한 김종인 전 경제수석 영입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의 경력은 독특하다. 참여정부 시기 청와대에서 일했다. 우상호 더민주당 의원이 총학생회장을 했던 1987년 연세대 총학생회에서 부학생회장을 했다. 안 의원 등이 탈당의 근거로 들었던 ‘친노+386운동권 패거리주의’의 핵심이라면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인사였다. 그는 자신은 일찌감치 새정치연합을 만들 때부터 지역에서 함께 해왔다고 밝혔다.

“참여정부 당시 청와대에서 일했지만 역시 한계는 부인할 수 없다. 그때 쌓은 역량이 있다면 더 발전해야 하는데 퇴행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합리적 진보와 성찰적 보수, 거꾸로도 가능하다. 성찰적 진보와 합리적 보수가 함께 해야지만 새로운 발전이 가능하다고 생각해 ‘국민의당’에 참여하게 되었다. 인재영입 경쟁이 벌어지는 것은 전체적으로 긍정적으로 본다. 갈라서기 전에 있었으면 더 좋았겠지만 결국 이렇게 되면서 선의의 경쟁이 일어나는 것 아닌가.” 두 야당이 된 것이 생산적인 측면도 있다는 주장이다. 그럴까. 확실한 것은 이전보다 야권의 진로를 둘러싼 방정식이 훨씬 더 복잡해졌다는 것이다.

두 정당 사이의 전략적 연합 가능성은

“개인적으로 겪어본 ‘문재인’이라는 사람의 인간성은 부인하지 않는다. 착한 사람이다. 사실은 그게 문제다. 남에게 쓴 소리를 못한다. 그러다보니 비판을 받는 당직자 한 사람도 바꾸지 못한다. 어떻게 보면 민주주의다. 하지만 국가를 이끌 리더십이라는 측면으로 봐선? 나는 그 능력에는 물음표를 던질 수밖에 없다.”

더민주당을 탈당해 국민의당에 합류한 인사의 말이다. 지금대로라면 각자도생이다. 실제 수천 표에서 수만 표 내외로 당락여부가 결정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그러기 때문에 ‘전략적 선택’이라는 말이 나온다. 주체는 호남유권자들과 그에 연계되어 있는 호남출신 수도권 유권자다. 정권교체라는 ‘대의’에 보다 충실한 정당에게 표를 몰아주는 전략적 투표를 할 것이라는 것이다.

지난 2002 대선에서 노무현 전 후보에 대한 전폭적인 지지가 그랬고, 지난 대선 초기 ‘안철수 바람’이 호남에서 먼저 불었던 것이 그랬다는 설명이다. 단지 안철수 의원의 부인 김미경씨의 지역적 연고 때문은 아니라는 주장이다. 지금처럼 따로 따로 치루게 될 경우 새누리당 200석 석권이라는 비관적 전망도 있지만 총선국면엔 ‘호남에서는 자유경쟁, 다른 지역에서는 선택적 협력’이라는 협정을 맺을 가능성이 있다는 지적도 있다. 앞의 새누리당 전 당직자는 “문재인과 안철수 사이는 어떨지 모르지만, 더민주당이 영입한 김종인 수석이나, 국민의당 공동대표를 맡은 윤여준 전 장관, 그리고 이상돈 교수까지 다 막역한 사이”라며 “이들 주도아래 조건에 따라 유연한 전략적 판단을 하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윤태곤 실장은 “향후 전망까지 고려한다면 국민의당은 최소 교섭단체를 구성하는 정도만 하더라도 충분한 성공이라고 할 수 있다”라며 “지역구 13,14석에 비례 7,8명만 확보하면 되기 때문에 어려운 목표치는 아니다”라고 덧붙였다.

창당작업 중인 국민의당은 자신들이 그리고 있는 ‘그림’을 공개하지 않고 있다. <주간경향>은 이태규 기획단장의 역할과 관련, 그에게 문자를 남기고 전화를 했으나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국민의당 공보는 박인복 전 청와대 춘추관장이 총괄하고 있다. 그는 안 의원, 그리고 이 단장의 역할 등에 대한 <주간경향>의 질의에 대해 “제기하는 주장은 처음 들었고 개인의 문제는 개인이 답해야 할 문제”라며 입을 다물었다.

<정용인 기자 inqbu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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