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지이야기

2015년 올해의 인물… 대한민국 ‘보통 국민’ 백남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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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경향>은 2015년 ‘올해의 인물’로 농민 백남기씨를 선정했다. 11월 14일, 민중총궐기에 참석한 백씨는 일부의 비난처럼 ‘전문시위꾼’도, ‘나라 전체를 마비시키는 것을 보여주고자’ 폭력시위를 주도한 이도 아니었다. 누구도 그일 수 있었다. 진보나 보수, 이념적인 문제가 아니다.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위해 테러방지법 제정이 필요하다”는 박 대통령에게 백남기씨는 국민이 아니었다. 박근혜 정부 3년 차, 물대포 직사로 차가운 아스팔트에 ‘대한민국 국민’이 내동댕이쳐졌다. 백씨 사건은 비상식과 몰염치, 민주주의 역진이라는 부끄러운 대한민국 2015년 자화상을 상징하고 있다. <주간경향>이 그를 2015년 ‘올해의 인물’로 선정한 이유다.

#1 12월 14일 서울 대학로
백남기 대책위 농성장

겨울비가 내린다. 12월 5일, ‘백남기 농민 쾌유 기원·민주회복· 민생살리기 범국민대회’ 참가자들이 백씨의 쾌유를 빌며 촛불과 꽃을 놓았던 마로니에 공원 앞 천막은 닫혀 있다. 맞은편 서울대병원 입구. 담벼락을 따라 천막 세 동이 세워져 있다. 중앙 천막은 ‘백남기 대책위’ 상황실이고, 양편으로 오후 미사나 매일 저녁 촛불시위가 열리는 천막, 그리고 가톨릭농민회 등 농민단체 천막이 세워져 있다. 농성장 맞은편, 가로수에는 11월 14일 민중총궐기 행사에 참여한 각계각층의 요구들을 담은 사진, 백씨의 쾌유를 비는 오렌지색 손수건과 종이학들이 걸려 있다. 노란색 현수막에는 여러 사람들이 손글씨로 쓴 간절한 바람이 적혀 있었다. 쌀부대 조끼를 입은 사람들이 플래카드를 들고 농성장을 떠났다. 쌀부대에 붉은 색 매직으로 투박하게 적혀 있는 있는 글씨들. ‘백남기를 살려내라.’

11월 14일, 서울 종로구청 입구 사거리에서 물대포를 맞고 쓰러진 백남기씨에게 경찰이 멈추지 않고 물대포를 쏘고 있다. 한국사진기자협회 12월 보도사진 최우수상 수상작. / 노컷뉴스 윤성호

11월 14일, 서울 종로구청 입구 사거리에서 물대포를 맞고 쓰러진 백남기씨에게 경찰이 멈추지 않고 물대포를 쏘고 있다. 한국사진기자협회 12월 보도사진 최우수상 수상작. / 노컷뉴스 윤성호

#2 한 달 그리고 또 하루,
12월 15일
비는 갰다. 아직 보도는 젖어 있다. “계속 위중한 상태입니다. 인공호흡기를 목으로 옮겼습니다. 기도 협착 우려 때문이라고 합니다. 장기적으로는… 어렵다고 하네요.” 손영준 가톨릭농민회 사무총장을 농성장에서 만났다. 그는 백남기 대책위 공동집행위원장이자 상황실장을 맡고 있다. “가족분들도 이제 몸도 마음도 많이 힘든 상황입니다. 셋째딸 민주화씨가 특히 많이 힘든 것 같아요. 네덜란드에서 시부모님이랑 남편, 아이도 왔다가 돌아가셨고, 혼자만 남아있는 상황입니다.” 중환자실 가족 면회는 오전과 오후 두 차례만 가능하다. 중환자 가족 대기실 의자에서 가족들이 돌아가면서 밤새 지키고 있다.

그는 농민들이 왜 상경해 서울 도심에 모이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없는 세상에 대해 이야기했다. 두 가지다. 박근혜 대통령은 후보자 시절에 쌀 80㎏ 한 가마를 21만원에 수매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런데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폭락했다. 현재 거래가는 가마당 14만원 선이다. “쌀은 식량안보 차원에서 정부가 챙겨야 하는 것이거든요. 그런데 쌀값 폭락도 서러운데 이제 밥쌀까지 수입한답니다. 수급으로 가격조절을 하는 것이 정부 역할인데 그걸 포기하겠다는 겁니다.” 두 번째는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가입 등 농산물 수입 전면개방이다. “TPP에 가입한 12개 나라 중 멕시코와 일본을 제외하고는 자유무역협정(FTA)을 다 한 상황이거든요. 10개 국가가 한·미 FTA 수준으로 개방을 한다는 것인데, 핵심이 쌀입니다. 원래도 농민들 사이에서 농민은 ‘등외국민’이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도대체 농사를 짓고 살 수가 없는 데다가 밥쌀도 전면 개방한다고 하니 정부가 이렇게까지 할 수 있느냐는 울분인 거죠.”

12월 14일 대학로 백남기 대책위 농성장. / 이상훈 선임기자

12월 14일 대학로 백남기 대책위 농성장. / 이상훈 선임기자

#3 한 달 전,
11월 15일 서울 종로1가

“보성군 농민회 깃발은 50m쯤 사거리에서 올라간 부근에 있었습니다. 6시가 넘어서 날도 어두워지고 귀가하려고 찾아 보니 다른 분들은 다 오셨어요. 남기 형님은 가톨릭농민회 전국 부회장도 하시고 또 오래 활동도 하셨으니, 처음에는 ‘오랜만에 옛 동지들 만나 이야기도 나누고 막걸리 한 잔 하신 갑다’ 싶어 근처 주막을 뒤져 봤는데, 안 계시더라고요. 혹시나 하고 앞에 계신가 싶어 제가 욱(위)으로 올라가 봤거든요.” 보성군 농민 최영추씨(64)의 말이다. “그런데 뒤에서 앰뷸런스가 오더라고요. 뭔가 불길한 생각이 들어서 앞에서 실려오는 사람을 보니 잘 모르겠어서 허리띠 버클을 보니… 남기 형님이 가톨릭농민회에서 1980년대 만든 버클을 하고 있었거든요. 머리에 한 대 맞은 것처럼 ‘아, 남기 형님이구나’.”

백남기씨가 쓰러지기 직전 상황이 영상으로 남아 있다. <뉴스타파>의 목격자들 36회 ‘11월 14일 광화문’ 편의 6분45초부터 볼 수 있는 영상이다. “농가부채 해결! 정책금리 1%로 인하!”라고 적힌 상여가 경찰의 물대포를 맞고 순식간에 부서지는 장면이다. 농민 백남기씨가 ‘따로’ 홀로 나선 것은 그 직후 시점이다. 전경차에 매어져 있는 줄을 두어 차례 당겼다. 그리고 백씨의 머리에 쏟아진 직사 물줄기. 백씨가 쓰러진 후에도 물줄기는 20여초간 계속 백씨의 머리를 겨냥하고 있었다.

“회장님(백남기씨)이 전혀 그러신 분이 아니었는데요. 그날은 어떻게 된 일인지 보성군 농민회와도 떨어져 있었고… 아마 백남기 농민은 ‘이놈들아 좀 그만해라’, 이런 심정으로 가셨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손영준 사무처장의 말이다. 최연추씨의 계속된 증언. “원래 형님이 농악도 좋아하고 소리도 좋아합니다. 사거리 갈 때까지 농악대를 따라가면서 춤도 추고 박자도 맞추고 했거든요. 거기서 막혀서 상여만 앞으로 나간 상황이었던 것 같습니다.” 최씨는 백씨 이웃에 사는 농민이다. 백남기씨에게 서울에서 열리는 행사에 가자고 권유했던 이도 그다. “사실 그날 다른 일정도 있는데 ‘밀도 다 갈아놓고 추수도 해놓았으니 마음 편히 갔다 오세’라고 말씀하셨어요.” 손 처장에 따르면 최씨는 계속 서울과 전남 보성을 오가며 주변을 챙기고 있다. “말은 안 하지만 자신이 권해서 그렇게 된 것 같아 최씨도 죄책감 같은 것이 큰 것 같다”고 손 처장은 말한다.

최씨와 백씨 일행을 태운 버스는 당초 예정시간보다 30분 늦은 오전 8시30분에 출발했다. 올라오는 길, 최씨는 백씨와 나란이 앉아 ‘시국’ 이야기를 했다. “나라가 거꾸로 돌아간다고 하셨어요. 당신(백남기씨)이 아버지(박정희)에게 고초를 당했는데, 그 고초로 세상을 살게끔 만들어 놓으니 이번에는 딸이 나타나 세상을 뒤집고 있다고.”

2004년 6월 <주간경향>(당시 제호 <뉴스메이커>) 578호에 실린 ‘[긴조 9호세대 비화] 썩은 문인은 붓대를 꺾어라’ 기사는 ‘중앙대 학생운동 왕고참’ 68학번 백남기의 이야기를 싣고 있다. 1971년 위수령으로 제적된 그는 ‘전국대학생연맹’ 사건으로 두 번째 제적을 당한다. 그 후 수녀원과 수도원에서 날품팔이와 포도밭 머슴살이를 하다가 1980년 복교해 복교생으로 민주화 시위를 이끈다. 기사에 따르면 하이라이트는 5월 14일 결행한 ‘유신잔당 장례식’이다. 상여는 백씨가 흑석3동의 목공집을 수배해 제작한 뒤 교내에 보관했던 것이다. 중앙대생들의 서울역에 이르는 상여행렬은 4시간30분이 걸린 대장정이었다. 때마침 비까지 내려 시위대는 더욱 처연해 보였다. 그리고 35년 후. 물대포에 부서지는 농민들의 상여는 그에게 어떤 기시감을 불러일으켰던 것은 아닐까. 쓰러진 백씨는 아무런 말이 없다.

백남기씨의 첫째딸 도라지씨(왼쪽)와 셋째딸 민주화씨가 중환자실에 입원한 백씨의 상태를 설명하고 있다.  / 이상훈 선임기자

백남기씨의 첫째딸 도라지씨(왼쪽)와 셋째딸 민주화씨가 중환자실에 입원한 백씨의 상태를 설명하고 있다. / 이상훈 선임기자

#4 한 달, 그리고 이틀.
12월 16일 서울대 병원 중환자실

“학생운동을 하셨고, 수도원 생활을 하신 것을 알고 있어요. 일상 이야기하다가 관련된 이야기가 나오면 무심히 한마디씩. 무슨 업적처럼 이야기하진 않았어요. 이력 정리해 놓은 것을 보고 그제서야 퍼즐이 맞춰졌습니다. 아버지가 그런 사람이었다는 게.” 첫째딸 백도라지씨의 말이다. 12월 16일, 서울대병원 중환자실 앞에서 백씨의 두 딸 도라지씨와 민주화씨를 만났다. 두 딸에게 아버지는 “비록 정답은 아닐지라도 뭘 물어도 현명한 대답을 기대할 수 있는, 정신적으로 많이 의지했던 사람”이었다.

“토요일 오후 집에 있는데 엄마에게 전화가 왔어요. 같이 간 사람들이 아빠가 안 보인다고, 혹시 전화라도 왔냐고요. 아빠가 휴대폰을 안 쓰세요. 그래도 혹시 일행에서 떨어질 수도 있어 제 휴대폰 번호와 몇몇 번호를 적어갔는데, 혹시나 싶어 전화를 하신 거죠. 그 다음에 전화가 왔는데, 아빠가 물대포를 맞으신 것 같다고. 그때부터 안절부절못했는데….” 딸 도라지씨의 말이다. 도라지씨가 택시를 타고 이송된 서울대병원을 가는데 다시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카톡에 영상이 돈다’고. 차마 보지 못했다. 그런데 차가 광화문을 통과 못한다는 것이다. 택시 운전기사는 경복궁역 인근에서 내려줬다. 도라지씨는 걸어가다 택시가 오면 잡아탈 요량으로 걷기 시작했다. “서울대병원에 도착하니 다리가 후들리며 풀리더라고요. 가 보니 남편이 먼저 도착해 있었습니다.” 셋째딸이자 막내인 민주화씨는 네덜란드에 거주하고 있다. 마침 그날은 네덜란드에서 1년 중 가장 큰 축제인 신터클라스데이 행사가 시작하는 날이었다. 그날부터 시작해 3주간 열리는 축제다. “아침에 아이를 데리고 나가 보여주고 돌아와 쉬고 있는데, 언니에게 전화가 왔어요. 진짜 아빠가 이 정도로 다쳤을 것으론 생각 못했어요. ‘수술도 의미가 없고, 아빠를 집 근처 요양원으로 옮기는 것이 낫겠다’는 의사 말을 전해 들었을 때 하늘이 무너지는 줄 알았습니다. 한국으로 올 때까지 3일 내내 울었습니다.”

백씨 가족은 11월 18일 검찰에 고발장을 접수했다. 고발인 조사는 33일 후인 12월 17일에야 이뤄졌다. 딸들은 두 가지에 대한 사과를 받고 싶다고 했다. “하나는 공권력을 행사하는 과정에서 사상자가 발생했다는 것에 대한 겁니다. 그것에 대해 책임지는 것은 행정부 맨 위에 있는 사람, 대통령이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둘째는 아빠가 시위에 나간 이유와 관련한 겁니다. ‘쌀값을 21만원까지 받게 해주겠다’고 공약한 사람이 공약을 지키지 않아 항의하러 간 것 아닙니까. 쓰러진 아빠에게 개인적으로 사과하고 나머지는 농민과 국민들에게 했던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것에 대해 사과했으면 합니다.”

11월 24일 국무회의에서 박근혜 대통령은 11월 14일 시위에 대해 ‘불법 폭력사태’라고 규정했다. 백씨 사건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었다. 그는 “특히 복면시위는 못하도록 해야 한다. 아이스(IS)도 지금 얼굴을 감추고 그렇게 하고 있지 않느냐”고 말하기도 했다.

1992년 7월 26일, 농촌봉사활동을 온 서울대 의대·간호대 가톨릭 동아리 회원들이 찍은 백씨 가족 모습.  / 백민주화씨 페이스북

1992년 7월 26일, 농촌봉사활동을 온 서울대 의대·간호대 가톨릭 동아리 회원들이 찍은 백씨 가족 모습. / 백민주화씨 페이스북

#5 10년 전,
2005년 12월 27일 청와대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국민 여러분께 머리 숙여 사죄드립니다. 그리고 돌아가신 두 분의 명복을 빕니다. 유가족 여러분께 깊은 사죄 말씀을 드리고 아울러 위로 말씀을 드립니다.” 연단에 선 노무현 대통령은 ‘시위농민 사망 관련 대통령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했다. 당시 노 대통령은 ‘폭력시위 때문에 경찰이 과잉진압한 것이 아니냐’는 의견을 의식해 이런 말도 했다. “공권력도 사람이 행사하는 일이라 자칫 감정이나 혼란에 빠지면 이성을 잃을 수도 있는 것인데, 폭력시위를 주도한 사람들이 이와 같은 원인된 상황을 스스로 조성한 것임에도 경찰에게만 책임을 묻는다는 것은 불공평하다는 비판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다음과 같이 입장을 정리한다. “그러나 공권력은 특수한 권력입니다. 정도를 넘어서 행사되거나 남용될 경우에는 국민들에게 미치는 피해가 매우 치명적이고 심각하기 때문에 공권력의 행사는 어떤 경우에도 냉정하고 침착하게 행사되도록 통제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므로 공권력의 책임은 일반 국민들의 책임과는 달리 특별히 무겁게 다루어야 하는 것입니다.” 농민대회 도중 경찰 방패에 찍힌 전용철·홍희덕씨가 사망한 사건은 2005년 11월 15일 발생했다. 공교롭게도 백씨 사건 꼭 10년 전이다. 사건이 일어난 뒤 인권위 직권조사 결과와 권고를 수용해 대통령이 사과한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에게 그것을 기대할 수 있을까.

백남기씨의 ‘행동’을 비판하는 ‘뉴스댓글들’은 ‘백씨가 불법행위를 했으니 자업자득’이라는 말이 많다. 백씨가 경찰차에 묶인 줄을 당긴 행위를 한 것은 사실이 아니냐는 것이다. 시위진압 공무수행 중 벌어진 미필적 사고라는 것이다. “당일 집회 상황을 봐야 합니다. 그날 하루 물대포 사용량이 지난해 전체 동안 쓴 것보다 더 많았습니다. 물대포 사용시점도 오후 5~6시면 시작됩니다. 보통 집회시위가 끝나고 해산할 무렵에 사용한 것이 일반적이었는데요. 게다가 내부수칙도 무시하고 머리를 조준해 물대포를 쏜 것이 여러 증거영상에 명확히 드러납니다.” 민주화를위한변호사모임(민변) 사무처장을 맡고 있는 조영선 변호사의 말이다. 만에 하나, 백씨가 과격행동을 했다고 하더라도 헌법 37조 2항에 규정되어 있는 ‘국민기본권 제한’에서 적용되어야 할 ‘비례원칙’을 적용해야 한다는 것이 조 변호사의 설명이다. “쉽게 말해 아이가 주먹으로 한 대 때렸다고 어른이 똑같이 때릴 수는 없는 거거든요. 공권력은 최후에 최소한도로 나서야 하고, 기본권 침해가 이뤄질 때는 목적에 부합하고 수단과 방법이 적절해야 합니다. 헌법상 비례의 원칙을 위반해 과잉대응했다면 국가보상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민주화씨는 이렇게 말했다. “무관심은 이해할 수 있어요. 하지만 아빠 일을 조롱거리로 만드는 사람들을 보면 정말 화가 나요. 민주사회라는 게, 권력의 주인인 국민이 권력을 5년 동안 대통령에게 빌려준 겁니다. 왕에 반대했기 때문에 역적이라는 식입니다. 종편 출연자들이 원래부터 종북이니 반정부 세력이었다는 식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기가 막힙니다. 내가 너무 외국에 오래 살아서 그런지, 그 전하고 전혀 다른 세상에 사는 느낌입니다.”

현재까지 상황으로는 백씨의 의식이 돌아올 가능성은 없다. 혹시나 정말로 기적이 일어나 아버지가 깨어나신다면. “그것만큼 바랄 일이 없는데, 아빠가 일어난다면 싸웠으면 합니다. 아빠가 증언해서 이렇게 만든 사람들을 다 잡아넣으라고.”(민주화씨) “만약 깨어난다면 정말 어떻게 하실까…. 아빠가 마음은 되게 넒으시거든요.”(도라지씨) 웃고 있었지만 두 자매의 눈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다.

에필로그 8511일 전.
1992년 7월 26일 전남 보성군 웅치면

한 장의 사진엔 젊은 백씨와 초등학교 1학년 민주화씨, 두산씨(아들), 초등학교 4학년 도라지씨가 서 있다. 당시 전남 보성으로 농활을 왔던 서울대 의대·간호대학 가톨릭학생회 CASA 학생들이 찍어 보관하고 있던 사진이다. 그때 학생이었던 ‘대학생 언니 오빠들’이 서울대병원 의사, 교수가 되어 입원해 있는 백씨 가족에게 전달한 사진이다. 민주화씨의 말. “당연히 기억하지요. 당시 대학생 농활이 의식화라고 잘 안 받아줬거든요. 그때 우리 아빠는 ‘나는 좋으니 우리 집으로 보내라’ 해서 왔었습니다. 의료팀이 있었고, 논밭에서 일하는 팀, 아이들과 놀아주는 팀이 있었어요. 사진을 보내 주신 선생님 얼굴을 보니 여전히 똑같으시던데요. 그때 농활 온 가톨릭학생회 지도교수가 아빠 수술해주신 분입니다. 그때 분들이 일부러 찾아와 병세도 물어보고 많이 챙겨주시고 있습니다.” 사건이 나고 한 달이 지난 12월 15일, 백민주화씨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이런 글을 올렸다. “아빠. 난 남편도 있구 아이도 있구 나름 완성된 어른이라고 생각하며 살았던 거 같아. 이런 내 철없는 생각이 우스웠어? 이제 와서 딸한테 세상공부 참 호되게 시킨다. 상식과 비상식이 뒤죽박죽 섞여버린 이곳에서 아빠를 구하는 일은 참 쉽지 않네. (중략) 지금 아빤 아빠 없이도 혼자 대답을 찾을 수 있는 훈련을 시키고 있는 거라 생각해. 그렇게 될 게요. 아빠가 그랬듯 내 아이에게 존재가 커다란 부모가 될게요. 그렇게 진짜 어른이 될게요. 미안하고 많이 보고 싶어요.”

<정용인 기자 inqbu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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