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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점강화 종속심화 테제 여전히 유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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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D이론’ 정초했던 윤소영 교수 80년대 ‘한국사회성격논쟁’에 대해 입을 열다

문패도 없었다. 평범한 아파트 철문이다. 초인종도 작동하지 않는다. 윤소영 한신대 국제경제학과 교수는 “휴대폰을 쓰지 않는다”고 말한 바 있다. 연구실 전화로 전화하니 잠시 후 윤 교수가 웃음 띤 얼굴로 반갑게 문을 열어준다.

과천연구실. 1994년 만들어졌다. 처음 만들어졌을 때 과천정부청사 앞에 지금처럼 아파트 한 칸을 빌려 1년 동안 유지했다가 현재의 사당동으로 이사왔지만 아직 이름은 과천연구실이다. “연구소가 위치한 지명이기도 했지만 과학과 실천의 약칭이기도 했으니까요.” 윤 교수의 말이다.

안쪽 방 벽을 두른 책꽂이에는 책이 가득 차 있다. 나무 책상 가운데에는 담배꽁초가 수북이 담긴 큰 유리병이 놓여 있다. 언젠가 읽은 프랑스 철학자 알튀세르의 강의실 풍경이 떠오른다. 교수와 맞담배질을 하며 토론하는 학생들.

개인 서가 구경은 항상 설렌다. 20년 전쯤, 윤 교수 논문의 각주에서 봤던 <한국 전위조직 운동사>라는 책이 눈에 들어온다. 동해라는 정체불명의 위장출판사에서 출간한 책이다. 윤 교수 뒤로는 해평윤씨 족보와 전주이씨 족보가 눈에 띈다.

인터뷰의 계기는 윤 교수가 낸 신간이다. ‘한국사회 성격논쟁 30주년’이라는 부제가 붙은 <한국자본주의의 역사>라는 책이다. 벌써 30년이다. 고 박현채 교수와 이대근 성균관대 무역학과 교수가 <창작과비평> 지상에 ‘한국 자본주의 논쟁’이라는 제목으로 각각 상대방의 논지를 비판하는 글을 쓴 게 시작이었다. 논쟁은 그 후 여러 지면과 현장을 오가며 ‘건곤일척의 대논쟁’(윤 교수의 표현)으로 번졌다. 속칭 NL과 PD 사이의 논쟁은 과거 CA(제헌의회)그룹으로 불렸던 민족민주파를 재건한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사노맹)의 ND그룹, 그리고 GD그룹으로 불리던 ‘중진자본주의론’까지 가세해 이어졌다. 윤 교수는 PD그룹을 대표하던 무크지 <현실과 과학>에 기고해 신식민지국가독점자본주의론(신식국독자)을 폈다. 경제학적 입장에서 ‘PD그룹’을 정초한 한 당사자다. 인터뷰는 당시 상황에 대한 소회부터 시작했다.

<주간경향>과 인터뷰 하고 있는 윤소영 한신대 국제경제학과 교수.  / 이상훈 선임기자

<주간경향>과 인터뷰 하고 있는 윤소영 한신대 국제경제학과 교수. / 이상훈 선임기자

“뉴라이트 경향 경고가 논쟁의 뿌리”

박현채-이대근 논쟁과 관련해서 나중에 <한국사회 구성체 논쟁>이라는 이름으로 논쟁을 정리한 조희연 교수(현 서울시교육감)는 “사전에 기획하면서 임의적으로 한쪽은 국가독점자본주의, 다른 쪽은 주변부자본주의의 입장에 서서 정리한 것일 뿐인데 오해가 있었다”는 박현채 선생의 회고를 전한 바 있습니다.
“그건 아닙니다. 박현채 선생님이 이대근 교수가 안병직 서울대 명예교수의 직계 후배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분들 입장을 생각해서 그런 이야기를 했지만, 그건 전혀 아니에요. 최근 두 사람(이 교수와 안 교수)이 뉴라이트 쪽으로 간 것을 포함해서, 그런 조짐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어요. 다시 말하면 박 선생님이 경제학을 중심으로 ‘좌파’의 향방을 놓고 문제제기를 하신 겁니다. 조희연 선생은 사회학과이니 잘 모를 수 있지만 ‘전향의 조짐’이라고까지 말하기는 그렇지만, 그런 분위기를 감지하고 비판한 겁니다. 일종의 짜고 치는 고스톱이었다는 식으로 이야기하는 건 박 선생이 후배 입장을 생각해서 하는 말이었어요.”

그런데 당시 박 선생님의 글 취지를 보면 조금 복잡하지 않습니까. 국가독점자본주의론을 이야기하면서도 농촌사회 지주·소작관계의 반봉건성도 이야기하시고…. 궁극적으로 자립형 모델인 민족경제론을 이야기하신 것 아닙니까.
“변혁의 전망으로 민족경제론을 이야기하신 건 사실이죠. 과연 국가독점자본주의 단계에서도 그것이 가능하냐, 한 단계 더 나아가 PD라는 개념을 끌고 오신 것이죠. 그러니까 신식국독자 민족경제론을 이야기하신 겁니다. 일부 경제학자는 제가 박 선생을 왜곡했다고도 이야기하지만, 박 선생이 미처 이야기하지 못한 부분을 한 단계 더 발전시킨 것이에요. 박 선생의 기본 뜻은 30년 만에 마르크스주의를 복원하자는 거였습니다. 제 논지는 박 선생이 쓰신 글, 뜻을 계승하는 것이 옳다는 겁니다. 저는 지금도 제가 옳았다고 생각합니다.”

당시 연세대 박사과정에 있던 조희연 서울시교육감과 박현채 경제평론가는 진행하던 논쟁을 <한국사회 구성체 논쟁>이라는 4권짜리 책으로 집대성했다. 사진은 책의 1, 2권

당시 연세대 박사과정에 있던 조희연 서울시교육감과 박현채 경제평론가는 진행하던 논쟁을 <한국사회 구성체 논쟁>이라는 4권짜리 책으로 집대성했다. 사진은 책의 1, 2권

그런데 윤 교수님과 같이 작업한 이진경씨의 책 <사회구성체론과 사회과학방법론>(사사방) 같은 책을 보면 박현채 선생님의 글이 방법적으로 철저하지 못하다고 비판을 하잖아요.
“당시 같이한 사람들 그룹을 크게 나눠 본다면 큰 줄기가 사회학을 중심으로 정치학 전공자 같은 사람들이 모인 경우가 있습니다. 김진균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가 해직된 후 상도연구실을 열었는데, 거기 모인 팀이 있었거든요. ‘사사방’은 그 팀의 세미나 결과물입니다. 말하자면 집단창작물이에요. 이진경씨가 워낙 글재주가 있으니 그 세미나 결과를 정리한 것입니다. 1986년 말쯤으로 기억합니다. 그 책 중간에 박 선생에 대한 공격이 있길래 이진경씨 등을 광화문에 불러 만났어요. ‘경제학 내부에서 벌어지는 논쟁에 대해서는 너희들이 잘 모르는 것 같다. 앞으로 공부를 열심히 하되 경거망동하진 마라’고 전했습니다. 그랬더니 자기네가 세미나를 하고 싶은데 와서 지도해달라는 겁니다. 그래서 1~2년 정도 제 73학번 동기인 서관모 교수(당시 서울대 사회학과 박사)의 집에 5명 정도 모여서 세미나를 했습니다. 태호(이진경씨의 본명)가 학생운동 문건을 모아오면 제가 읽고 코멘트하고. 그걸 어떤 식으로든 이론화하면 좋겠다 해서 나온 것이 반제반독점 신식국독자론입니다.”

당시 이정로라는 필명으로 활동하던 백태웅씨가 신식국독자론은 자신들이 성격과 임무 문건에서 최초로 정립한 것이라고 주장했었죠. 백태웅씨의 이른바 ‘낮은 생산력’ 신식국독자론을 두고 현실과과학 지면을 통한 반박이 있었고요.
“사실 CA나 ND 쪽 문건은 박 선생이 써놓은 글을 중심으로 얼기설기 엮은 겁니다. 학생운동 수준에서 해놓은 것이라 조잡하기 이를 데가 없어요. 제가 개입해서 박 선생의 본뜻은 뭐고, 마르크스주의 이론사의 계보를 보면 어떤 뜻을 잇는 것인가 정리했습니다. 박 선생이 제기한 것을 이론화한 것이죠. CA나 ND그룹이 학생운동에서 기여한 것은 있는데, 이론적 기여라기보다는 그런 문제제기를 통해 학생운동이나 노동운동에서 논쟁구도를 잡은 거죠.”

다시 윤 교수가 이번에 낸 책으로 돌아가자. ‘한국사회 성격논쟁 30주년’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지만, 실제 신식국독자론이나 핵심 주장이었던 ‘독점강화 종속심화’ 테제는 거의 언급되지 않는다. 책은 한국개발원(KDI)과 하버드대학의 ‘한국경제 60년사’ 공동연구를 리뷰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윤 교수는 특히 1987년에서 2007년의 국면에 대한 분석에서 베리 아이켄그린이 강조했던 ‘중진국 함정’에 주목한다. 한국 경제의 미래가 낙관적이지 않다는 전망을 담고 있다. 이어 재벌의 지배체제, 상호출자구조를 분석한 윤 교수는 “한국 자본주의는 1997년~98년 외환위기 시점에 이미 붕괴했다”고 평가한다.

“한국 자본주의는 이미 붕괴했다”
신식국독자론의 이론적 배경에서 핵심은 국가독점자본주의 특성론 내지는 경향론이다. 즉, 붕괴위기가 항상적이 된 현대자본주의사회(자본주의의 ‘일반적 위기’)에서는 모든 자본주의 사회는 국가독점자본주의의 특성 또는 경향을 갖는다는 것이다. 여기에 신식민주의적 예속은 다시 한국 국가독점자본주의를 규정하는 특성이 된다. 다시 말해 초국적 자본에 대한 예속이 심화되는 것과 독점이 강화되는 것은 동시에 진행되는 메커니즘이라는 설명논리다. 이것이 ‘독점강화 종속심화 테제’다. 거의 언급하지 않지만, ‘자본주의의 일반적 위기’와 테제에 대한 윤 교수의 시각은 책에서 우회적으로 확인된다. 즉, 한국경제 60년사에 대한 연구나 한국 재벌체제 지배구조에 대한 분석, 그리고 한국 경제 통사를 확인하려는 낙성대연구소나 펠레학파의 연구에서 신식국독자적 특성은 우회적으로 발견된다는 시각이다.

논쟁 이후 뉴라이트로 간 그룹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죠. 이영훈 교수와 안병직 교수의 대담집 <대한민국 기로에 서다>의 한 대목이 기억납니다. “지방에서 세미나를 열고 돌아오는 봉고차에서 이영훈 교수가 박현채 교수에게 올림픽대로의 가로등 불빛을 보며 ‘저게 왜 신식민지냐’고 말했더니 박 선생이 크게 화를 냈다”는 이야기가 인상적이었는데요.
“개인적으로 안 선생님을 별로 좋아하진 않았어요. 어쩔 수 없이 한두 과목 정도 수업을 듣긴 했는데, 그 분이 상당히 고집이 있는 분입니다. 자기가 전향을 했으니, 제자들이 잘못된 길로 가면 안 된다면서 제자들을 끌고 가려고 하시는데…. 안 선생님이 뉴라이트로 가는 게 1980년대 중반 일본에 다녀온 뒤부터라고 공식적으로 이야기하시는데 사실은 그전이었어요. 제가 원래 부르주아 경제학을 했어요. 1982년에서 83년 초반입니다. 박사과정에 들어와서 마르크스주의를 공부하기 시작했어요. 서울대에서 조교를 7년 정도 했는데, 밤에 조교실에 혼자 남아 공부하는데 안 교수님이 내려오셨어요. 저에게 ‘뭐하냐’고 묻길래 제가 요즘 고민이 많아서 종전에 하던 공부를 때려치우고 마르크스를 해볼 생각이다, 소위 ‘마르크스주의로의 전향’을 최초로 알린 사람이 안 교수입니다.

그런데 하지 말라고 저를 설득하더군요. 자기가 아는 친구들도 마르크스를 하다가 다 좌절했다는 식으로 말씀했어요. 낙성대연구소가 자료를 재구성하는 것은 의미있는 작업입니다. 80년대 논쟁 이후 저도 낙성대연구소에 가봤어요. 그런데 그걸 넘어서 역사적 분석을 하고 판단을 하려고 합니다. 그걸 제일 큰 문제로 보고있어요. 마르크스주의든 부르주아든 이론을 제대로 공부하려는 사람이 없다 보니 뒤죽박죽입니다. 낙성대연구소가 제기하는 ‘식민지 현대화론(그는 식민지 근대화론보다 현대화론이 맞다고 주장한다)’은 개념이나 이론이 명확하지 않아요. 마르크스주의 좌파의 관점에서는 수탈이나 착취가 일어나면서 생활의 개선이 가능합니다. 조선 말기에 비해 식민지 시대가 살기 좋아진 것은 사실이지만, 대만이나 일본에 비하면 못 미친 것 역시 사실입니다.”

책을 보면 ‘독점강화 종속심화’ 테제나 신식국독자 이론을 포기하진 않으신 것 같습니다.
“시기적절하지 않아서 이야기를 안 할 뿐이에요. 반독점 인민동맹은 지금도 객관적 과제는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수행할 주체가 없으니 독점을 이야기할 필요가 없는 것이죠. 재벌을 이야기하는 것이 독점을 이야기하는 것인데, 독점재벌과 중소기업 문제는 여전히 중요한 문제 아닙니까. 한국의 재벌은 수익이나 생산성을 무시합니다. 소유구조가 순환출자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종속도 마찬가지입니다. 종속이라고 이야기할 때 여러 가지 차원이 있어요. 우리 경제위기를 보면 특히 1979~80년 위기와 1997~98년 위기국면에 외채·외환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건 다시 말해 종속국가이기에 발생한 문제 아닙니까.”

종전에 말씀하셨던 종속심화는 초국적 금융자본체제에 편입이 되는 것과는 조금 다른 문제의식이 아니었나요.
“경제학에서는 기술부터 시작해서 금융에 이르는 과정을 말합니다. 핵심기술이나 원천기술도 있고, 거시경제적으로 중요한 것은 금융종속입니다. 이것이 외채나 외환 문제로 나타나는 것이죠. 요즘은 변혁의 전망이 없다고 생각하는데, 비경제적인 것은 관심도 안 갖고, 언급하고 싶은 생각이 없습니다. 예를 들어 정치·군사적 종속이 있을 것입니다. 주한미군은 지금도 전작권을 가지고 있고요. 하지만 남한 사회에서 사활적인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북한이 핵무장을 하는데, 전작권을 이양한다는 것 자체가 유토피아적 발상이에요.”

북한은 왜 ‘한국은 식민지’에 집착했을까

북한은 남한 사회를 볼 때 왜 식민지적 규정성을 강조하는 걸까요.
“북한의 입장도 그렇고 초기 안병직 교수의 입장도 그렇지만, 1945년부터 53년 해방정국과 한국전쟁기의 단절성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거예요. 일제강점기 때도 식민지 반봉건사회(식반)이니 해방 이후에도 식반사회라는 겁니다. 60년대까지는 그렇게 이야기해도 틀리지 않았어요. 그런데 1970년대를 식반사회로 볼 것이냐, 그건 회의가 든다는 것입니다. 80년대는 확실히 아니고요. 남북한이 다르게 발전한 데서 시작한 거예요. 남한은 식반사회에서 신식국독자로 이행했고, 북한은 식반사회에서 사회주의로 나간 겁니다. 남한이 독자적 사회로 발전했으니 민주혁명이 먼저 이뤄지고 통일이 되어야 하는데, 북한의 논리는 북이라는 ‘혁명기지’가 있으니 한국에서는 ‘자주적 민주정부’ 정도만 수립되어도 충분하다는 겁니다. 이것이 대선에서 누구를 지지할 것인가, 이를테면 DJ를 지지할 것이냐, 아니면 장기적인 진보 집권플랜을 가지고 민중후보를 낼 것이냐의 입장 차이로 나타난 것이었죠.”

이후에는 어떤 작업을 하실 계획입니까.
“사실 건강문제가 조금 있어요. 심장에 문제가 있어서 수술을 받았어요. 시사적인 쟁점을 따라가기보다 과거에 해왔던 것을 좀 돌이켜 보면서 정리할 부분이 있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국제학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미국도 자본주의의 종언을 전제로 자본주의 역사를 정리한다든지 그런 프로젝트들이 있습니다. 특히 요즘 상황과 관련해서 제가 아니면 다른 사람이 할 수 없는 부분을 찾아서 정리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독점강화 종속심화 테제는 틀렸다”

1980년대 한국사회 구성체 논쟁에 관여했던 지식인들. 왼쪽부터 조희연 현 서울시교육감, 고 박현채 교수, 이진경 서울과학기술대학교 교수, 장상환 경상대 경제학부 교수, 전효관 서울시 혁신기획관.  / 경향신문 자료사진

1980년대 한국사회 구성체 논쟁에 관여했던 지식인들. 왼쪽부터 조희연 현 서울시교육감, 고 박현채 교수, 이진경 서울과학기술대학교 교수, 장상환 경상대 경제학부 교수, 전효관 서울시 혁신기획관. / 경향신문 자료사진

“지금은 한국이 신식민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진경 수유+너머 연구원의 말이다. 그 역시 PD그룹의 반제반독점 신식민지국가독점자본주의론(신식국독자론)의 공동창작자 중 핵심 당사자다. “당시 식민지 반봉건사회론(식반론) 비판 차원에서 독점강화는 분명하게 확인되었다고 생각한다. 다만 종속심화에 대해 당시 개념으로 신식민지라는 것을 인정했지만, 이윤율 저하로 그것을 ‘논증’한 것은 윤소영 교수의 의견이었을 뿐이다.”

그는 <부커진 R2> 무크지 기고를 통해서 과잉제국주의라는 개념을 사용해 글로벌 자본주의적 착취의 시대가 도래했다고 주장했다. ‘자본주의 외부’에서 새로운 생활방식과 양식을 조직하는 것이 유의미한 저항적 실천이라는 것이 그의 현재 시각이다.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면, 1980년대 한국사회 구성체 논쟁의 중심에는 신식국독자론이 있었다. NL파의 이론적 근거였던 식반사회론에 대한 비판과 반정립이 시작이었다. (반제반봉건이 아닌 반제반독점) 이어 논쟁은 ‘낮은 생산력’의 신식국독자론을 주장하던 ND파, 그리고 안병직 교수가 주도한 ‘중진자본주의론’과의 논쟁으로 이어진다. 사실 논쟁 초기에는 정태인 교수 등이 참여한 무크지 <녹두서평>을 통한 NL파의 반박이 있었지만, NL진영이 식반사회론에서 ‘식민지 반자본주의론’(식반자)이라는 새로운 이론을 들고 나오면서는 거의 제대로 된 토론이 이뤄지지 않았다.

문제는 이 식반자론의 출처와 실체다. 기존까지 정설은 1988년 북한에서 송출하는 한민전 방송의 논설을 통해 제기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NL운동권 출신인 이동호 북한민주화포럼 사무총장은 최근 한 보수매체 기고 글에서 “1960년대까지 북한은 한국 사회를 식민지 반봉건사회로 규정했으나 1970년 11월 5차 당대회 이후 식민지 반자본주의 사회로 평가해 왔음을 상기하면 NL진영은 이를 모르고 있다가 한민전 방송 이후 수정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식반자 이론의 실체가 뚜렷이 드러난 것은 1991년 역시 한민전 방송을 통해 공개된 <주체의 한국 사회변혁 이론>이라는 책을 통해서다.

최근 공개된 김현환 재미자주사상연구소 소장의 <나와 주체사상과의 대화>(1998)라는 책을 보면 북측은 이 규정의 출처를 김정일의 교시로 못박고 있는 게 확인된다. 북한의 한국 사회 인식은 이후에도 큰 변화는 없는 것으로 평가된다. “사실 NL운동의 정서가 전통적으로 농민운동에 가까웠는데, 그런 감각과 떨어져 있는 사람들로서는 한국의 공업화 발전이 그 이론틀로는 설명되지 않는다는 공감대가 신식국독자론이 나오게 된 계기다.” 역시 현실과과학 필자로 참여했던 전효관 서울시 혁신기획관의 말이다.

당시 농촌사회의 지주·소작관계에 대한 성격 규정을 계기로 논쟁에 참여했던 장상환 경상대 교수는 “한국 사회의 자본주의가 국가가 주도해 독점자본을 육성했기 때문에 관료 독점성은 있다고 이야기할 수 있지만, 신식국독자론의 국독자론은 외환위기 이후에야 설명이 가능한 틀이라고 본다”고 말했다. 장 교수는 “사회운동의 전략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사회 성격 규명은 당연히 필요했지만 현실적 실사구시를 하지 못했기 때문에 결국 영향력은 감소할 수밖에 없었다”며 “일제시대의 식민지 반봉건사회론이나 소련의 이론을 가지고 와서 80·90년대 현실을 끼워맞추려고 했으니 결국 외면받을 수밖에 없었다”고 덧붙였다.


<정용인 기자 inqbu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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