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안… 이역만리 정략결혼 여인의 ‘기구한 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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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살던 익숙하고 정든 곳을 떠나 이역만리 물설고 낯선 곳으로 떠나 살아야 하는 건, 마치 나무가 뿌리째 뽑혀 전혀 다른 토양에 심겨지는 것과 같다. 그 누가 이런 처지에 놓이기를 원하겠는가. 하지만 많은 여인들이 그런 처지에 놓일 수밖에 없었다.

물고기가 호수에 비친 아름다운 여인을 보고 넋을 잃어 헤엄치는 것조차 잊은 채 물밑으로 가라앉는다, 기러기가 구슬프게 비파를 연주하는 아름다운 여인을 보고 날갯짓하는 것조차 잊은 채 땅으로 떨어진다, 밝은 달이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에 가만히 구름 뒤로 숨는다, 활짝 핀 꽃이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에 부끄러워 고개를 숙이며 움츠러든다. 물고기를 가라앉힌 침어(浸魚), 기러기를 떨어뜨린 낙안(落雁), 달을 숨게 만든 폐월(閉月), 꽃을 부끄럽게 만든 수화(羞花). 침어·낙안·폐월·수화는 중국의 4대 미녀로 꼽히는 서시·왕소군·초선·양귀비를 가리키는 말이다. 각기 다른 시대(춘추시대·전한·후한·당)를 살았던 네 여인, 절세미녀였고 삶은 비극적이었다.

각자 자신의 삶의 무게가 가장 무거운 법이겠지만, 네 여인 중 누가 가장 힘겨운 삶을 견뎌내야 했는지 굳이 그 무게를 저울에 달아보자면 왕소군(王昭君)이 아닐까 싶다. 한나라의 궁녀였지만 흉노 선우의 아내로 살아야 했던 왕소군, 그녀는 무슨 사연으로 장안을 떠나게 되었으며 장안을 떠나서는 어떻게 살았는지, 2000여년 전으로 돌아가 보자.

양귀비 묘에 전시된 중국 4대 미녀상. 서시·왕소군·초선·양귀비

양귀비 묘에 전시된 중국 4대 미녀상. 서시·왕소군·초선·양귀비

흉노 선우에게 보내진 왕소군
기원전 51년 정월, 흉노의 호한야선우(呼韓邪單于)가 한나라에 입조해 선제(宣帝)를 알현했다. 이는 흉노와 한나라의 오랜 대립관계에 마침표를 찍은 사건이다. 일찍이 기원전 200년에 한 고조가 백등산에서 흉노에게 패배한 이후로, 한나라는 늘 흉노에 시달렸다. 흉노의 침략과 약탈을 막기 위해 한나라는 여인과 물품을 바치며 흉노와 화친을 맺거나 혹은 전투를 치러야 했다. 그런데 한 무제의 적극적 원정과 더불어 흉노의 세력이 약화되기 시작했다. 저제후선우 시기부터 흉노는 실크로드 상의 요새 지역을 한나라에 빼앗겼다. 서역 경영을 통한 수입이 감소하면서 흉노의 경제는 심한 타격을 입었다. 자연재해까지 더해졌다. 눈이 여러 달에 걸쳐 내리면서 가축은 죽고 백성은 병에 걸리고 곡식은 열리지 않았다. 게다가 내부의 권력투쟁까지 극에 달했다. 다섯 명의 선우가 병립하던 상태를 호한야선우가 종식시키자마자 호한야선우의 형인 질지 역시 선우로 나서서 그를 공격했다. 질지선우에게 패한 호한야선우는 한나라에 원조를 구할 수밖에 없었다. 신하들은 기백을 우러르는 흉노가 한나라에 복종하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라며 반대했다. 그런데 이때 좌이질자가 이렇게 말한다.

“강함과 약함에는 때가 있습니다. 지금 한나라가 강성하여 오손(烏孫)과 제후국이 모두 한나라에 복종하고 있습니다. 저제후선우 이래 흉노는 날로 쇠약해져 회복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비록 지금 강하게 버틸지라도 하루조차 안전할 수 없습니다. 지금 한나라를 섬기면 안전하게 생존할 수 있으나 섬기지 않으면 멸망의 위기에 처할 것입니다. 이보다 나은 계책이 어디 있겠습니까!”

결국 호한야선우는 좌이질자의 계책에 따라 한나라 변방으로 남하하고 아들을 한나라에 입조시켰다. 질지선우 역시 아들을 한나라에 입조시켰다. 한나라와의 관계에서 질지선우보다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 호한야선우는 자신을 더욱 낮추었다. 기원전 51년에 그는 직접 한나라에 입조했고 장안에서 한 달이나 머물다가 귀국했다. 기원전 49년, 호한야선우는 또 한나라에 입조했다. 호한야선우는 한나라로부터 확실한 원조를 받았다. 질지선우는 열세에 빠졌다. 실크로드를 독점하려던 한나라에 의해 질지선우는 결국 살해되고 만다. 질지선우가 죽은 뒤 호한야선우는 다시 한나라에 입조한다. 이때(기원전 33년)의 입조는 특별한 의미가 있었으니, 호한야선우가 통혼을 요청한 것이다.

원제(元帝)는 세 번째 입조한 호한야선우에게 왕소군을 주게 된다. <후한서>에 의하면, 왕소군이 흉노로 가겠노라 자청했다고 한다. 입궁한 지 여러 해가 지나도록 황제를 만나지 못한 슬픔과 원망이 쌓였기 때문이다. 원제는 호한야선우를 위한 연회를 열고 그에게 하사한 다섯 명의 여인을 불렀다. 이때 원제는 처음으로 왕소군을 보게 된다. 궁전을 밝힐 정도로 아름다운 그녀를! 원제는 깜짝 놀란다. 그는 왕소군을 곁에 남겨두고 싶지만 흉노와의 신뢰를 저버릴 수 없다. 결국 왕소군은 흉노로 떠나게 된다.

<서경잡기(西京雜記)>에는 왕소군이 흉노로 가게 된 것과 관련해 전혀 다른 내막이 전해진다. 원제는 화가가 그린 초상화를 보고 후궁을 선택했기에 궁녀들은 죄다 화가에게 뇌물을 주었다. 그런데 왕소군은 뇌물을 주지 않았다. 화가는 왕소군을 추하게 그렸다. 결국 왕소군은 황제의 부름을 받지 못했음은 물론이고 흉노에 보내질 여자로 선택되고 만다. 왕소군이 흉노로 가기 직전에야 그녀를 본 원제, 후회해도 이미 늦었다. 왕소군을 떠나보낸 원제는 화가를 죽임으로써 자신의 분노를 삭일 수밖에 없었다.

왕소군 이야기는 여러 버전으로 변주되는데, 원나라 마치원의 <한궁추(漢宮秋)>에서는 원제와 왕소군이 사랑의 인연을 맺는 것으로 나온다. 어느 날 밤, 원제는 왕소군의 비파 소리를 듣고 그녀를 데려오게 한다. 왕소군이 궁에 들어온 지 꽤 오랜 세월이 지났건만 이제야 만나게 된 것이다. 왕소군에게 뇌물을 받지 못한 화가 모연수의 농간 때문이었다. 위기에 처한 모연수는 흉노로 도망쳐 호한야선우에게 왕소군의 실제 모습을 그린 그림을 보여준다. 호한야선우는 원제에게 왕소군을 달라고 한다. 왕소군을 사랑하게 된 원제는 불같이 화를 내며 거절하려 했지만 신하들이 반대한다. 달기 때문에 망국에 이른 상나라 주왕을 보시라,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는 왕소군을 흉노로 보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결국 왕소군은 흉노로 가겠노라 자청한다. 원제는 황제인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왕소군을 떠나보낸다. 흉노로 가던 왕소군은 흑룡강 강변에 이르렀을 때 강물에 몸을 던진다. 호한야선우는 그녀를 묻어주고 모연수를 한나라로 보낸다. 한편 왕소군의 그림을 걸어 두고 밤낮으로 바라보며 슬퍼하던 원제, 꿈속에서 왕소군을 보고 깜짝 놀라 깨어난다. 기러기 울음소리 들려오는 한나라 궁전의 깊은 가을밤, 원제는 슬픔에 잠긴다. 다음날 원제는 왕소군이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모연수의 목을 쳐서 그녀의 영혼을 위로한다.

시안 동남쪽 란톈(藍田)현의 채문희(채염) 기념관에 세워진 채염의 상

시안 동남쪽 란톈(藍田)현의 채문희(채염) 기념관에 세워진 채염의 상

오손으로 보내진 세군과 해우
왕소군의 부재가 원제에게 정말 큰 타격이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아무튼 왕소군이 흉노로 떠난 지 몇 달 뒤, 42살의 원제는 장안의 미앙궁에서 세상을 뜨고 만다. 한편 왕소군은 흉노에 정착해 아들 한 명과 딸 둘을 낳는다. 그런데 아들의 아버지와 딸들의 아버지는 다른 사람이다. 게다가 아들과 딸의 관계는 삼촌과 조카 사이다. 이는 아버지나 형제가 죽으면 그 아내를 자신의 아내로 삼는 흉노의 풍속 때문이다. 이러한 수계혼제(收繼婚制)는 흉노를 비롯한 북방유목민에게서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데, 혈족의 단결과 재부의 보존을 위한 제도였다. 기원전 31년 호한야선우가 노환으로 세상을 뜬 뒤 그의 장자인 복주루선우는 흉노의 풍속에 따라 왕소군을 아내로 맞고자 했다. 이때 왕소군은 한나라 성제(成帝)에게 한나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상소를 올린다. 하지만 성제가 내린 칙령은 “흉노의 풍속을 따르라”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왕소군은 복주루선우의 아내가 되어 두 딸을 낳는다. 호한야선우의 아내로 있으면서 낳은 아들은 이 딸들의 오빠이자 삼촌이 되는 것이다. 왕소군이 복주루선우와 부부로 지낸 건 11년, 복주루선우가 세상을 떴을 때 왕소군은 서른 중반이었다. 이후 왕소군의 행적은 기록에 남아 있지 않다.

채옹의 <금조(琴操)>에는 선우가 죽은 뒤 왕소군이 음독자살한 것으로 나온다. “너는 한나라 사람이고 싶으냐, 흉노 사람이고 싶으냐?”라는 왕소군의 질문에, 그녀의 친아들이 “흉노 사람이고 싶다”고 답했기 때문이다. 친아들의 아내가 되지 않고자 왕소군은 결국 독약을 삼켜 자살했다고 한다. <금조>의 기록은 <후한서>의 바탕이 되긴 했지만 <후한서>의 작자 범엽은 이 부분만큼은 채택하지 않았다. 사실 수계혼제에서 친모자 관계는 예외이기 때문에 <금조>의 기록은 신빙성이 떨어진다. 아무튼 한나라에서 나고 자란 왕소군으로서는 흉노의 혼인 풍속을 받아들이는 것이 무척 괴로운 일이었을 것이다. “부자(父子)에게 능욕당하니 부끄럽고 놀라워라. 스스로 죽는 게 참으로 어려워 묵묵히 구차하게 살아가네”(석계륜(石季倫)의 <왕명군사(王明君詞)>)라는 표현은, 엄청난 가치관의 충돌과 문화충격으로 괴로웠을 왕소군의 마음을 대변해준다.

자신이 살던 익숙하고 정든 곳을 떠나 이역만리 물설고 낯선 곳으로 떠나 살아야 하는 건, 마치 나무가 뿌리째 뽑혀 전혀 다른 토양에 심겨지는 것과 같다. 그 누가 이런 처지에 놓이기를 원하겠는가. 하지만 많은 여인들이 그런 처지에 놓일 수밖에 없었다. 나라(?)를 위해서! 한나라 고조 때부터 중국은 왕족의 딸이나 후궁을 이민족 우두머리의 아내로 보내는 통혼 정책을 통해 화친을 도모했다. 이렇게 정략적으로 이민족에게 보내진 여인들을 화번(和蕃)공주라고 한다. 한나라 때는 흉노뿐 아니라 오손에도 화번공주를 보냈다. 오손왕의 아내로 보내진 세군(細君)은 하늘 끝 먼 곳으로 시집온 신세를 한탄하며 “항상 고향 생각에 마음 아프니, 고니가 되어 고향에 돌아가고파”라고 애절하게 토로했다. 오손왕은 말도 통하지 않을 정도로 나이가 많았다. 결국 그는 자신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를 손자에게 세군을 취하게 한다.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세군은 한 무제에게 상서를 올린다. 무제가 보내온 냉혹한 답변, “그 나라의 풍속을 따르라. 나는 오손과 함께 흉노를 멸하고자 한다.” 결국 세군은 남편의 손자인 잠추의 아내가 된다.

이후 세군이 세상을 뜨자 한나라는 바로 해우(解憂)를 잠추의 아내로 보낸다. 잠추가 죽자 해우는 그의 종형제인 비왕의 아내가 되고, 비왕이 죽자 이번에는 잠추의 아들 니미의 아내가 된다. 비왕의 아내로서 3남 2녀를 낳고, 니미의 아내로서 아들 한 명을 낳은 해우, 그녀는 큰아들과 막내아들이 병사한 뒤 한나라 황제(선제)에게 상서를 올린다. “연로하여 고향이 그리우니, 돌아가 해골이라도 한나라 땅에 묻히기를 바랍니다”라고. 스물의 앳된 나이에 오손으로 보내진 해우가 장안으로 돌아온 건 일흔이 되어서다. 해우가 한나라로 돌아온 해는 공교롭게도 흉노의 호한야선우가 한나라에 입조해 선제를 알현한 기원전 51년이다.

파란만장한 삶, 채염의 <비분시>
생의 끝자락에서나마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해우는 왕소군이나 세군보다는 운이 좋았다고 해야 할까. 여기 한 여인, 채염(蔡琰)이라는 이 여인은 흉노에 잡혀가 지내다가 한나라로 돌아왔지만 그녀에게 귀국은 결코 평안이 아니었다. 왕소군의 이야기가 담긴<금조>를 지은, 한나라 말의 뛰어난 학자 채옹이 바로 채염의 아버지다. 채염은 위중도에게 시집가지만 얼마 뒤 사별한다. 또 그녀의 아버지마저 동탁을 암살한 왕윤에 의해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다. 왕윤은 동탁의 수하인 이각과 곽사 등에 의해 장안에서 처형당한다. 이후 조정을 장악한 이각과 곽사가 대립하며 서로 공격하는 동안 장안은 공포와 굶주림의 도시가 되고, 헌제(獻帝)는 장안을 빠져나가 낙양으로 피신하게 된다. 바로 이때, 이각과 곽사의 잔당을 격퇴한다는 명분으로 한나라에 투입된 흉노가 약탈을 일삼는다. 채염이 흉노에 잡혀간 것도 바로 이 시기(195년)다. 그녀는 12년 동안 흉노 좌현왕의 아내로 지내면서 아들 둘을 낳는다. 그리고 207년, 조조가 흉노에게 많은 금품을 주고 채염을 돌아오게 한 뒤 동사에게 시집보낸다. 훗날 동사가 형벌을 받아 죽게 되었을 때 채염은 조조에게 간청해 그의 목숨을 살려내기도 한다.

채염의 파란만장한 삶에서 가장 가슴 아픈 순간은 두 아들과 헤어질 때였을 것이다. <비분시(悲憤詩)>에는 그 장면이 생생히 표현되어 있다. 아이들은 어머니의 목을 끌어안으며 울부짖는다. “사람들이 말하길 어머니가 떠나셔야 한다는데, 다시 돌아오실 날이 있을까요? 늘 인자하시던 어머니가 지금 어째서 달라지셨나요? 우리는 아직 어린데 어째서 생각해주시지 않나요?” 채염의 눈에서도 눈물이 쏟아진다. “아이를 보니 억장이 무너지고, 정신이 아득해 미칠 것 같다.” 이 시를 읽노라면 채염이 과연 한나라로 돌아오고 싶었을지 의문이 든다. 한나라로 돌아와 재가한 채염은 평생 그리움과 근심을 품고 살았다. “내 배로 낳은 자식 생각하니 가슴이 메어지고 찢어지는구나” “떠돌다가 비천해진 몸, 다시 버려질까 늘 두렵다”던 채염. 조조에게 구원받은 재녀(才女)라는 평가가 과연 진실일까. 한나라로 돌아온 것이 과연 그녀의 삶에서 구원이었을까? 어쩌면 또 다른 절망의 늪으로 빠져든 게 아닐는지.

왕소군·세군·해우·채염, 그리고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원치 않는 삶의 현장으로 내몰린 수많은 여인들. 그녀들은 구원의 대상이 아니라 구원자였다. <한서>에서는 선제 이후 여러 대에 걸쳐 북방 변경지대에서 전쟁이 일어나지 않고 소와 말이 들판에 가득했다고 한다. 왕소군이 흉노로 시집간 뒤 한나라와 흉노는 수십 년 동안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했다. 명나라 시인 조개(趙介)는 <제소군도(題昭君圖)>에서 가냘픈 왕소군이 곽거병의 1000만 병사보다 낫다고까지 평가했다. 그런데 또 의문이다. 당신은 공동체의 구원자였노라, 이렇게 칭송하는 게 과연 최선일까? 칭송보다는, 공동체의 안녕을 위해 힘없는 여인을 희생양으로 삼은 공동체의 이기성과 폭력성을 성찰하는 일이 먼저이리라. 공동체의 이익이라는 명분 아래 희생을 강요당하는 이들이 조금이라도 줄어들길 바라면서 말이다. 장안의 평안은 이역땅에서 힘겹게 살아간 여인들의 한숨과 눈물로 지켜졌다. 그 평안은 엄청난 빚을 지고 있는 것이다.

<연세대 인문학연구원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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