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라·상나라·서주는 여자 때문에 망했다?
  • 인쇄
  • |
  • 목록
  • |
  • 복사하기
  • 페이스북
  • 트위터
  • 밴드

역사서에서는 하·상·서주가 멸망한 책임을 여자에게 전가하고 있다. 여성을 희생양으로 삼는 프레임은 전통 시대 모든 분야에서 철저히 작동되었다. 말희·달기·포사는 그러한 프레임의 희생양이 아닐까.

시안은 13조의 고도(古都), 즉 13개 왕조의 수도로 말해진다. 하지만 시안을 수도로 삼았던 왕조의 수는 논자에 따라서 10조설부터 17조설까지 다양하다. 10조설은 서주·진(秦)·전한·전조(前趙)·전진(前秦)·후진(後秦)·서위·북주·수·당이다. 왕망이 세웠던 신(新)을 더한 것이 11조설이고, 여기에 서진(西晉)을 더하면 12조설이다. 또 후한을 더하면 13조설이 되는데, 13조설이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견해다. 14조설에는 두 가지 견해가 있는데, 앞의 13조설에 탕구트족이 세운 대하(大夏)를 넣거나 측천무후가 세운 무주(武周)를 넣는다. 13조설에 대하와 무주를 포함하고, 황소가 세운 대제(大齊) 및 이자성이 세운 대순(大順)을 넣으면 17조설이 된다. 혹은 13조설에 유현(劉玄)의 갱시(更始) 정권, 유현을 죽인 적미군에 의해 옹립된 유분자(劉盆子)의 적미(赤眉) 정권, 그리고 대제와 대순을 넣은 것 역시 17조설이다.

시안이 몇 개 왕조의 수도였는지가 왜 중요하다고 이렇게 공들여 언급한 것일까? 13조인지, 14조인지, 혹은 17조인지는 단순한 숫자의 차이가 아니다. 각 카테고리에 해당 왕조를 포함하느냐 배제하느냐의 문제는 그 왕조의 정통성을 인정하는가의 여부와 관계가 있다. 탕구트족의 정통성, 측천무후의 정통성, 황소의 정통성, 이자성의 정통성, 유현의 정통성, 적미의 정통성. 중국 역사에서 이들 정통성에 대한 시각의 차이가 바로 시안이 몇 개 왕조의 수도였는지를 판가름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시안이 꼭 13조의 고도라고만은 할 수 없다. 역사란 바로 이런 것이다. 다양한 입장에서 다양하게 해석할 여지가 있는 것, 그게 바로 역사다.

서주 풍호유지 거마갱 진열관

서주 풍호유지 거마갱 진열관

주지육림의 주인공인 주왕과 달기
이번 이야기에서는 시안에 도읍했던 첫 번째 왕조 서주가 어떻게 시작되었고 어떻게 끝장났는지 들여다보려 한다. 상나라가 조종을 울리게 되는 날 동틀 무렵, 주나라 무왕은 상나라 교외의 목야(牧野)에 집결한 제후들과 병사들에게 이렇게 외친다.

“옛말에 ‘암탉은 새벽을 알리지 않는 것이니 암탉이 새벽을 알리면 집안이 망한다’고 했소. 지금 상나라 주왕(紂王)은 오직 부인의 말만 듣고서 나라를 어지럽히고 백성에게 포학하며 온갖 악행을 저질렀소. 나는 그대들과 함께 하늘의 징벌을 집행할 것이오.”
무왕이 공격해온다는 소식을 들은 주왕은 70만 병력을 보내 무왕에 맞서게 한다. 하지만 이 많은 병사들은 죄다 싸울 마음이 없다.

무왕이 빨리 쳐들어오길 바라던 그들은 도리어 상나라를 공격하며 무왕에게 길을 열어주었다. 상나라 병사들은 폭군 주왕을 버렸다. 이제 주왕을 기다리고 있는 건 죽음뿐. 그는 녹대(鹿臺)로 올라가 불속에 몸을 던졌다. 상나라 도성으로 들어온 무왕은 주왕이 불타 죽은 곳으로 갔다. 무왕은 주왕의 시신을 향해 화살을 세 발 쏘았다. 그리고 검으로 주왕의 시신을 찌른 뒤 도끼로 그 머리를 베어서 흰 깃발에 매달았다. 무왕은 주왕이 총애하던 여자가 있는 곳으로 갔다. 여자는 이미 목매달아 자살한 뒤다. 무왕은 여자의 시신에도 화살을 세 발 쏘고 검으로 찌른 뒤 도끼로 목을 베어서 작은 흰 깃발에 매달았다. 깃발에 매달린 목의 주인공은 바로 중국 역사에서 망국의 대명사로 통하는 달기다.

주왕과 달기, 이들은 주지육림(酒池肉林)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술을 가득 채운 연못, 고기를 주렁주렁 매단 나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쫓고쫓기는 남녀의 무리…. 주왕과 달기는 방탕한 주연을 즐기며 환락을 추구했다. 그들은 잔인함도 즐겼다. 기름이 칠해진 뜨거운 구리기둥 위를 지나가게 하는 포락지형을 자행하며 죄인의 고통스런 비명 소리에 쾌감을 느꼈다. 주왕의 음란함과 포악함은 날로 심해졌고, 충신들의 간언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충신은 상나라를 떠났다. 죽음을 무릅쓰고 계속해서 간언한 비간(比干)은 심장이 꺼내져 죽임을 당했다. 백성의 원망은 높아져가고 제후들도 주왕에게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반면, 덕을 베풀고 선정을 행하던 서백창(西伯昌, 주나라 문왕)이 제후들의 지지를 얻으며 강성해졌다. 결국 그의 아들 무왕이 제후들을 거느리고 상나라를 정벌하게 된다.

문왕 때 이르러 주족(周族)은 시안 서남쪽 풍하 유역에 자리를 잡고 힘을 키웠다. 문왕 당시의 수도 풍경(豊京)은 풍하의 서쪽 기슭에 있었는데, 무왕이 즉위한 뒤 풍하의 동쪽 기슭에 수도 호경(鎬京)을 건설했다. 풍하 양쪽 기슭의 풍경과 호경은 280년에 달하는 서주의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지였다. 이후 유왕(幽王)에 이르러 견융(犬戎)의 공격으로 서주는 끝이 나고 낙읍(낙양)에서의 동주 시대가 전개된다.

유왕은 어쩌다가 서주의 마지막 왕이 되었을까? 역사서에 전해지는 유왕의 이야기는 상나라의 마지막 왕 주왕과 꽤 유사하다. 주왕이 달기에게 푹 빠져 지냈듯, 유왕 역시 포사에게 완전히 빠져 지냈다. 유왕은 왕후와 태자를 폐위시키고 포사를 왕후로 삼고 포사가 낳은 아들을 태자로 삼기까지 했다. 그는 포사를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주었지만 도무지 포사의 웃는 얼굴을 볼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적군이 쳐들어왔음을 알리는 봉화가 피어올랐다.

제후들은 급히 군사를 이끌고 달려왔다. 그런데 정작 적군의 침략은 없었다. 이 어이없는 상황을 지켜본 포사는 비로소 활짝 웃는다. 포사의 웃는 모습을 본 유왕은 너무 기쁜 나머지 돌이킬 수 없는 과오를 저지르고 만다. 일부러 봉화를 올리도록 한 것이다. 그것도 여러 번! 유왕이 포사를 웃게 하고자 거짓 봉화로 제후들을 희롱한 이 일을 두고 ‘봉화희제후’라 한다. 유왕이 포사의 웃음과 바꾼 것은 제후들의 신뢰였다. 거짓 봉화가 반복되던 어느 날, 폐위된 왕후의 아버지 신후(申侯)가 견융과 함께 서주를 공격했다. 이번에도 봉화가 피어올랐다. 진짜로 적군이 쳐들어왔건만 군사를 이끌고 달려오는 제후는 아무도 없다. 결국 유왕은 여산(驪山)에서 적에게 죽임을 당하고 포사는 사로잡히고 만다. 제후들은 원래의 태자를 왕으로 옹립했다. 왕위에 오른 평왕(平王)은 동쪽의 낙읍으로 천도한다. 주왕실이 쇠약해지고 제후국이 패권을 다투는 춘추전국의 동주 시대가 이렇게 시작된 것이다.

시안 여산의 봉화대

시안 여산의 봉화대

포사의 웃음을 위한 유왕의 거짓 봉화
상나라의 마지막 왕 주왕과 서주의 마지막 왕 유왕, 그들은 정말 여자 때문에 나라까지 끝장낸 것일까? 놀랍게도 상나라 이전 하나라의 마지막 왕인 걸왕(桀王) 역시 말희라는 여인에게 빠져 지냈다. 걸왕은 주왕과 비슷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걸왕은 덕행에 힘쓰지 않고 무력으로 백성을 해쳤으며 주색에 탐닉했다. 반면 상나라를 세우게 되는 탕왕(湯王)은 덕을 베풀었기에 백성과 제후들이 그를 따랐다. 결국 탕왕은 제후들을 이끌고 하나라를 멸망시킨다. 이때 탕왕이 내세운 명분도 “하늘을 대신해 하나라를 징벌한다”는 것이었다. 하나라의 마지막과 상나라의 마지막은 마치 같은 이야기의 두 버전인 듯하다.

어느 버전이 먼저일까? 하나라가 상나라보다 먼저지만, 하나라가 전설의 왕조라는 게 문제다. 게다가 하·상·서주의 역사에서 마지막 왕과 그 곁에 있던 여인의 이야기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유사하다. 말희·달기·포사 모두 바쳐진 여인이었고, 걸왕·주왕·유왕은 여자에게 빠져 황음무도하고 포악무도한 일을 서슴없이 저지르다가 결국 망국에 이르렀다. 역사서에서는 하·상·서주가 멸망한 책임을 여자에게 전가하고 있다. 이는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애꿎은 여인을 희생양으로 삼은 것일 뿐이다. 망국의 왕이지만 ‘남성’이고 ‘왕’이기에, 망국에 대한 변명의 빌미를 여성에게서 찾았던 것이다. “암탉이 새벽을 알리면 집안이 망한다”는 무왕의 경종은 사실 그 당시 프레임의 반영이다. 무왕은 이 프레임을 새 왕조 건설의 동력으로 동원했던 것이다. 여성을 희생양으로 삼는 프레임은 전통 시대 모든 분야에서 철저히 작동되었다. 말희·달기·포사는 그러한 프레임의 희생양이 아닐까. 게다가 마지막 왕의 여인이었으니, 현실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것은 물론 역사 속에서도 억울한 오명을 뒤집어쓸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던 것이다. 말희·달기·포사가 만약 새 왕조를 세운 왕의 여인이었다면?

결국 우리가 보게 되는 역사란 승자의 기록일 수밖에 없다. 역사를 서술할 권력을 지닌 자의 손에서 이루어진 역사 기록, 당연히 권력자의 입장을 대변하지 않겠는가. 걸왕과 주왕은 정말 그토록 황음무도했을까? 나라를 멸망에 이르게 한 마지막 왕이 포악하게 묘사될수록 새로운 왕조의 정통성이 강화되는 건 자연스런 이치다. 이전 왕조의 마지막 왕을 최대한 악덕하게 묘사하는 반면 새 왕조의 왕은 선하고 덕 있는 인물로 묘사함으로써 천명(天命)이 새로운 왕조로 옮겨갔음을 대변하는 것, 이것이 바로 전통 시기의 역사 서술을 지배하던 전형적인 ‘프레임’이다. 역사 서술에 권력자의 프레임이 작동하는 게 어찌 과거만의 일이랴.

유구함을 강조하는 중국의 역사 프레임
역사가 객관적이라는 말은 어불성설이다. 사실(fact) 그대로의 역사는 현장에서 휘발된다. 그 자취를 그러쥐는 데는 각 시대, 각 사회의 프레임이 작동하게 마련이다. 여기에 서술자의 세계관과 역사관이 맞물려 역사는 기록으로 남는다. 앞서 살펴본 이야기에는 두 가지 프레임이 존재한다. 남성 중심 사회의 프레임, 그리고 승자가 정의라는 프레임이다. 남성과 승자가 역사의 주체가 되어 만든 이 프레임에서 여성과 패자는 역사의 타자이자 희생양이 된다. 말희·달기·포사가 자신의 이야기를 역사로 남겼다면? 걸왕·주왕·유왕이 자신의 이야기를 역사로 남겼다면? 그것은 오늘날 우리가 보고 아는 그들의 역사와는 완전히 다르지 않겠는가.

역사의 다양한 해석은 결코 불순한 게 아니다. 우리 삶이 다양한 만큼이나 역사의 해석 역시 다양한 게 마땅하다. 인간의 삶도 역사도 무지개처럼 다채롭다. 무지개의 색깔을 모두 섞으면 검은색이 된다. 검은색은 무지개의 그 어느 한 색깔도 진실하게 반영하지 못한다. 또한 무지갯빛 가운데 어느 한 가지 색깔의 역사만 선택한다면 나머지 색깔의 역사는 배제되고 만다. 우리가 역사를 온당하게 바라보는 데 필요한 것은 검은색 혹은 한 가지 색만 만들어내는 획일적인 프레임이 아니다. 무지개의 여러 색깔을 볼 수 있는 다양한 프레임이야말로 공존과 배려를 가능하게 한다. 다양함은 결코 무질서가 아니다. 다양함은 조화로운 질서다.

앞서 말한 주나라 무왕이 상나라 주왕을 치던, 무왕벌주(武王伐紂) 이야기로 되돌아가 보자. 상나라가 조종을 울리던 그날은 대략 몇 연도였을까? 이에 대해서는 과거 문헌 기록을 비롯해 현대 학자들의 연구에 이르기까지 의견이 분분하다. 그 가운데 기원전 1130년이 가장 이른 시기이고, 기원전 1018년이 가장 늦은 시기다. 무려 한 세기가 넘는 시간차다. 그런데 ‘하상주단대공정(夏商周斷代工程)’ 즉 하·상·주 삼대의 연대를 확정짓기 위한 역사 프로젝트를 통해, 무왕벌주의 시기는 기원전 1046년 1월 20일로 정해졌다. 여기에는 유적지에 대한 방사성 탄소동위원소(14C) 분석, 갑골문을 비롯한 기록과의 비교, 천문학적 추산 등이 활용되었다.

이 프로젝트의 시작과 더불어 집중적으로 조사한 지역이 바로 시안 풍하 서쪽 기슭의 마왕촌(馬王村) 일대다. 이 일대에서는 일찍이 1957년에 서주 초기 성왕(成王)과 강왕(康王) 시대의 거마 순장갱이 발굴되기도 했다. ‘풍호유지(豊鎬遺址) 거마갱 진열관’에 가면 당시 발굴된 것들을 볼 수 있다. 이 근처에 있는 ‘97SCMT1’으로 명명된 지층 단면은 상나라와 주나라의 분기점이 되는 표지이기도 하다. 하상주단대공정이 시행되면서 1997년에 중국사회과학원 고고연구소가 바로 여기서 다양한 시대의 문화 퇴적층을 발견했고, 이를 토대로 상나라와 주나라의 분기에 대한 연구를 심화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하상주단대공정에 대해 조금 더 언급하기로 한다. 이 프로젝트는 1996년부터 2000년까지 진행된 구오 계획, 즉 9차 5개년 계획의 일환이었다. 하·상·주 삼대의 정확한 역사 연대를 고증하고자 역사학·고고학·문헌학·천문학·물리학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를 총동원한 국가급 역사 프로젝트였다. 중국 역사에서 정확한 연대가 기록으로 전해지는 것은 주나라 공화 원년인 기원전 841년부터다. 하왕조가 성립한 때부터 기원전 841년 이전까지의 애매한 역사 시기에 정확한 연대를 부여하기 위한 프로젝트가 바로 하상주단대공정이다. 그 결과 중국 내에서 통용되는 모든 역사서에서는, 전설적인 하왕조의 성립 연대까지도 기원전 2070년이라고 확정적으로 기술하게 되었다.

이 프로젝트의 과정과 결과의 타당성에 대한 논의는 차치하더라도 그 궁극적 지향점은 눈여겨봐야 한다. 위대한 중화문명의 유구한 역사를 입증하는 것, 이를 통해 민족 응집력과 자부심을 확보하는 것이 바로 이 프로젝트를 구동시킨 동력이다. 이는 오늘날 중국이라는 국가가 학자들에게 요구하는 역사 프레임이기도 하다. 하·상·주 삼대의 정확한 역사 연대가 도출되리라는 것은 프로젝트가 구동되면서부터 이미 예정된 결론이었으리라. 중국의 역사 끌어올리기 결과, 현재 중국에 존재했던 고대의 다양한 민족들의 역사가 죄다 중화민족의 역사로 해석되고 있음은 물론이다. 단일한 역사 프레임의 작동, 그것도 국가가 기획한 프레임의 작동은 경계하지 않을 수 없다. 정의로움과 정당함을 자처하는 거대한 권력은 자기도취에 빠진 채 희생양을 만들어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연세대 인문학연구원 연구원>

이유진의 중국 도읍지 기행바로가기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