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안…당나라 시절이 ‘견우·직녀 설화’의 전성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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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당시(全唐詩)>에 ‘칠석’을 제목으로 한 시가 82수나 될 정도로 칠석과 견우·직녀는 당나라 문화의 중요한 부분이었다. 그런데 당나라가 쇠락하면서 견우·직녀 신앙의 중심지였던 곤명지도 점차 말라가게 된다.

“멀고 먼 견우성, 밝은 직녀성… 맑은 은하수 사이에 두고서 애틋하게 바라만 보며 아무 말도 하지 못하네.”(한나라 말의 고시 19수) 은하수를 사이에 둔 채 만나지 못하는 견우와 직녀의 이야기, 칠월칠석이 되면 까마귀와 까치가 오작교(烏鵲橋)를 놓아 둘을 만나게 해준다는 이야기, 우리나라뿐 아니라 동아시아 전역에 두루 전해져 내려온 친숙한 설화다.

이 설화의 주인공 견우와 직녀는 앞의 시에서처럼 하늘의 별, 즉 견우성(독수리자리의 알타이르)과 직녀성(거문고자리의 베가)에서 유래했다. 칠월칠석 즈음 밤하늘에 은하수가 남북으로 흐를 때 밝은 직녀성(0등성)은 밤하늘 천정에 높이 걸리게 되는데, 때마침 은하수를 사이에 놓고 견우성과 마주하게 된다. 까마득한 옛날, 사람들은 그런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견우와 직녀의 슬픈 사랑 이야기를 연상했던 것이다.

현종과 양귀비가 칠석날 사랑을 맹세한 화청지의 장생전.

현종과 양귀비가 칠석날 사랑을 맹세한 화청지의 장생전.

견우·직녀 설화가 언제 생겨났는지는 알 수 없지만, 소를 모는 남자 견우(牽牛)와 베를 짜는 여자 직녀(織女)라는 이름은 이 이야기가 농경문화권에서 발생했음을 말해준다. 주(周)나라 때의 <시경(詩經)>에 이 이야기에 관한 가장 이른 기록이 담겨 있다. 하늘에 은하수 빛나는데 직녀성은 베의 무늬를 짜내지 못하고 견우성은 수레를 끌지 못한다는 내용이 나오긴 하지만 견우·직녀의 슬픈 사랑 이야기는 확인할 수 없다. 이후 늦어도 한나라 때가 되어서는 견우성과 직녀성이 한 쌍의 남녀로 엮이게 되었음이 분명하다. 한 무제 원수(元狩) 3년(기원전 120년)에 장안 서남쪽에 곤명지(昆明池)라는 인공호수를 만들고 호수의 동서 양쪽에 각각 견우와 직녀의 석상을 세웠다고 한다.

직녀 사당인 시안의 석파묘

직녀 사당인 시안의 석파묘

곤명지 동서 양쪽에 있는 견우와 직녀
곤명지는 황가 원림 상림원(上林苑) 안에 있던 여러 호수 가운데 하나다. 상림원은 황제의 근위병이 주둔하던 곳이기도 한데, 특히 곤명지는 무제가 수군을 훈련시킬 목적으로 만든 곳이다. 오늘날 중국의 서남쪽에 있는 윈난(雲南)성 쿤밍(昆明)에 전지가 있는데, 이 호수를 곤명지·곤명호라고도 한다. 무제가 장안에 만든 인공호수 곤명지는 바로 이 전지를 본뜬 것이었다. 당시 무제가 신독국(身毒國, 인도)으로 사자를 보내려는데, 곤명(쿤밍)의 이민족이 이를 저지하자 그들을 정벌하기 위해 곤명지를 만들고 수전을 준비했던 것이다. 무제가 만든 곤명지는 둘레가 40리에 달했다고 한다. 이 곤명지의 동서 양쪽에 견우와 직녀의 석상을 서로 마주보게 세운 것은 하늘의 은하수와 견우성과 직녀성을 땅에다 구현한 것이다.

끝없는 은하수와 같은 곤명지 왼쪽에 견우가 있고 오른쪽에 직녀가 있었다고 한다.(한나라 때의 <서도부(西都賦)>) 그런데 수전을 위해 만든 곤명지 양쪽의 견우와 직녀 석상이 단순히 사랑하는 남녀로 간주되었던 것은 아닐 터이다. “7월 7일이면 하고(河鼓·견우성)와 직녀 두 성신(星神)이 만난다”(한나라 때의 <사민월령(四民月令)>)고 했는데, 견우와 직녀는 바로 별의 신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오작교에 관한 내용도 한나라 때 등장하는데, 칠석날 직녀가 은하수를 건널 때 까치를 다리 삼기 때문에 이 때가 되면 까치 머리가 벗겨진다고 한다.(<풍속통의(風俗通義)>)

석파묘의 직녀 석상

석파묘의 직녀 석상

이후 견우·직녀 이야기에는 다양한 내용이 첨가된다. 은하수 동쪽에 천제(天帝)의 딸인 직녀가 베를 짜며 지내고 있었다, 혼자 지내는 직녀를 가엾게 여긴 천제가 은하수 서쪽의 견우에게 그녀를 시집보낸다, 그런데 시집 간 직녀가 베짜기를 등한시한다, 화가 난 천제가 직녀를 은하수 동쪽으로 돌아가게 하고 일년에 한 번만 견우와 만날 수 있게 했다.(위진남북조시대의 <소설(小說)>) 여기서는 직녀가 베짜기라는 직분을 다하지 않은 것이 이별의 원인으로 말해지고 있지만 같은 시대에 나온 <형초세시기(荊楚歲時記)>에서는 견우 때문에 이별하게 되었다고 한다. 견우가 직녀를 아내로 맞으면서 천제에게 돈을 빌려 예물을 마련했는데, 오래 지나도 갚지 않자 천제가 견우를 쫓아냈다는 것이다. <소설>과 <형초세시기>의 내용이 다르긴 하지만 노동과 자본을 통제·장악하는 천제라는 존재가 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이는 분명 당시의 시대상이 이야기에 반영된 것일 터이다.

이처럼 세월이 흐르면서 내용이 덧붙여지고 변형되면서 견우·직녀 설화는 매우 다양한 형태로 퍼져나갔다. 애초에 수군을 훈련시키기 위해 만들었던 곤명지 역시 많은 이들이 여가를 즐기는 장소로 바뀌었다. 당나라 때는 어느 시대보다 곤명지 준설에 힘쓴 덕에 많은 이들이 곤명지의 드넓고 맑은 풍경을 감상할 수 있었다. 또한 당 덕종 정원(貞元) 14년(798)에는 곤명지 곁에 견우와 직녀의 사당을 세웠는데, 각각 석부묘(石父廟)와 석파신묘(石婆神廟)라고 했다.(<장안지(長安志)>) 견우와 직녀를 석부와 석파로 지칭한 것은 한나라 때 곤명지 양쪽에 세웠던 견우와 직녀의 석상에서 유래했음이 분명하다. 당나라는 견우·직녀 신앙의 전성기였다고 할 수 있다. 특히 당 현종은 칠석을 중시해서 백 척에 달하는 아주 높고 큰 걸교루(乞巧樓)를 궁중에 세워놓고 칠석이면 이곳에서 즐기며 밤을 새웠다고 한다.

덕흥리 고구려 고분벽화 속 견우와 직녀

덕흥리 고구려 고분벽화 속 견우와 직녀

칠석날 사랑을 맹세한 현종과 양귀비
칠석날을 위한 누각이 걸교루다. 궁중뿐 아니라 민간에서도 뜰에다 누각을 세우고 등과 꽃과 채색 끈으로 장식해 걸교루로 삼았다. ‘걸교’란 교묘한 재주를 달라고 빈다는 의미인데, 칠석날 밤이면 여인들이 직녀성에게 바느질과 길쌈을 잘하게 해달라고 빌었다. 이 풍속의 유래 역시 오래되었는데, 일찍이 한나라 궁녀들은 칠월칠석이면 개금루(開襟樓)에서 칠공침(七孔針, 바늘귀가 일곱인 바늘)에 실을 꿰었고, 다들 이것을 풍습으로 삼았다. 칠석날 밤에는 칠공침에 실을 꿰는 것 외에도 과과(瓜果, 박과에 속한 열매)를 차려놓고 바느질을 잘하게 해달라고 빌었는데, 거미가 그 열매에 거미줄을 치면 소원을 들어주는 것이라고 여겼다. 칠석날의 주인공은 물론 직녀와 여성이지만, 남자들도 칠석날이면 붓·벼루·종이·먹을 차려놓고 견우에게 총명함을 빌었다.

칠석날은 이처럼 바느질 솜씨와 총명함을 비는 날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연인들이 사랑을 맹세하는 날이다. “칠월 칠일 장생전(長生殿)에서, 인적 없는 깊은 밤 은밀히 속삭였지. 하늘에서는 비익조(比翼鳥)가 되길 원하고, 땅에서는 연리지(連理枝)가 되길 원한다고.” 현종과 양귀비의 슬픈 사랑을 읊은 <장한가(長恨歌)>, 여기서 두 사람이 사랑을 맹세한 날이 바로 칠월칠석이다. 날개가 하나씩밖에 없어서 암수가 하나가 되어야만 날 수 있는 비익조, 두 나무의 가지가 맞닿아서 결이 통하여 마침내 하나의 나무가 된 연리지. 비익조와 연리지가 되자고 맹세한 두 사람은 결국 안녹산의 난으로 인해 이승과 저승으로 갈라지게 된다.

<장한가>에서 양귀비를 잊지 못한 현종은 방사(方士)에게 양귀비의 혼을 찾게 하고, 방사는 신선이 사는 산에서 양귀비를 찾아낸다. 그때 양귀비는 현종과 칠석날 단 둘이 맹세했던 내용을 방사에게 말해준다. 바로 비익조와 연리지가 되길 바란다는 맹세다. 현종과 양귀비의 이야기를 시로 읊은 게 백거이의 <장한가>이고 이를 산문으로 풀어쓴 게 진홍(陳鴻)의 <장한가전>이다. <장한가전>에서는 양귀비를 찾아온 방사가 그녀를 만났다는 증거를 현종에게 제시하기 위해 둘만 알고 있는 이야기를 해달라고 하자 양귀비가 이렇게 말한다.

“천보(天寶) 10년(751), 저는 황상을 모시고 더위를 피해 여산의 궁전에서 머물렀지요. 그날은 칠월 칠일, 견우와 직녀가 만나는 밤이었답니다. 진나라 사람들의 풍속에서는 그날 밤 수놓은 비단을 걸어놓고 음식과 과과를 차려놓고 뜰에서 향을 피웠는데, 이를 걸교라 하고 궁중에서 아주 중시했지요. 그날 한밤중이 되자 시위들도 쉬러 가고 저 혼자서 황상을 모셨답니다. 황상께서는 제 어깨에 기대서신 채 하늘을 올려다보시면서 견우와 직녀의 만남에 감탄하셨지요. 우리 둘이 은밀히 맹세하길, 영원히 부부가 되길 바란다고 했답니다. 그리고 손을 잡고서 목메어 울었지요. 이 일은 오직 황상만이 알고 계십니다.”

어디 현종과 양귀비에게만 칠석이 특별한 날이었으랴. <전당시(全唐詩)>에 ‘칠석’을 제목으로 한 시가 82수나 될 정도로 칠석과 견우·직녀는 당나라 문화의 중요한 부분이었다. 그런데 당나라가 쇠락하면서 견우·직녀 신앙의 중심지였던 곤명지도 점차 말라가게 된다. 호수를 준설할 여력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 무제 때부터 무려 950여년 동안 장안의 중요한 경관이었던 곤명지가 결국 농지가 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만 것이다.

석야묘의 우랑(견우) 석상

석야묘의 우랑(견우) 석상

시안의 석파묘와 석야묘
한 무제가 장안 서남쪽에 곤명지를 만들고 그 양쪽에 견우와 직녀의 석상을 세운 게 기원전 120년, 2100여년이 지난 지금 시안 창안(長安)구 더우먼진에 견우와 직녀의 석상이 모셔져 있다. 견우 석상이 있는 사당은 석야묘(石爺廟), 직녀 석상이 있는 사당은 석파묘(石婆廟)다. 두 사당은 2㎞ 정도 떨어져 있다. 석파묘 대전 중앙에 놓인 2m 남짓의 직녀 석상은 그야말로 소박하기 그지없다. 그 소박함이 오히려 이 석상의 오래됨을 말해준다.

석파묘에는 재밌는 전설이 담긴 넓고 평평한 돌이 있는데, 이 돌에는 길게 파인 홈이 있다. 돌은 견우와 직녀의 침상이고, 돌의 홈은 견우가 오줌을 눈 흔적이라고 한다. 견우가 침상에 오줌을 누자 직녀가 홧김에 견우를 발로 찼는데, 너무 세게 차는 바람에 지금의 견우 석상이 있는 석야묘까지 가버렸고, 그 뒤로 둘은 떨어져 지내게 되었다고 한다. 이 재미난 민간전설에 절로 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다. 아니나 다를까, 석야묘에 있는 견우 석상이 직녀보다 더 부드럽게 생겼다. 그런데 사실은 두 석상이 바뀐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하늘에서 직녀가 은하수 동쪽에 있고 견우가 서쪽에 있는 형태가 땅에서는 반대로 표현되는데, 현지 주민들이 땅에서도 동쪽이 직녀의 자리라고 착각한 탓에 견우 석상을 직녀 석상으로 모시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애초에 어떤 게 정말 직녀 석상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아무튼 중요한 것은 현지 주민들이 석파묘의 석상을 직녀 석상이라 굳게 믿는다는 사실이다.

석파묘에서는 정월 17일(견우와 직녀가 혼인한 날)과 7월 7일에 대규모 기념 활동이 펼쳐진다. 그때가 되면 수만명이 이곳을 찾고 설날에 비할 정도로 융성한 분위기라고 한다. 석파묘를 찾아온 이들은 각자의 소망을 빈다. 자식을 낳게 해달라고, 짝을 찾게 해달라고, 부자가 되게 해달라고, 오래 살게 해달라고, 병을 낫게 해달라고…. 그들에게 직녀는 견우의 연인이라기보다는 그들의 소원을 들어주는 여신이다. 설사 애초의 견우 석상을 직녀 석상이라 믿고 그 석상에게 소원을 빌더라도 뭐가 대수이랴. 그 석상 앞에서 자신의 진실한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다면야.

그런데 무엇이 옳다고(正) 정(定)하고자 하는 게 인간의 속성이기도 하다. 정확히 말하자면 권력과 이익의 속성이리라. 애초에 하늘에서 기원한 견우·직녀 전설을 놓고도 그 발원지를 둘러싼 논쟁이 치열했다. 논쟁의 발단은 국가지정 무형문화유산이었다. 제1차 국가급비물질문화유산에서 중국의 4대 전설(맹강녀, 양산백·축영대, 백사전, 우랑(견우)·직녀) 가운데 우랑·직녀 전설만 제외되어 있었다. 이후 제2차 국가급비물질문화유산 등재를 앞두고 여러 지역이 우랑·직녀 전설의 발원지임을 주장하며 각축을 벌였다. 결국 2008년에 산시(山西)의 허순(和順)과 산둥의 이위안(沂源)이 등재에 성공했다. 이때 시안은 마지막 단계에서 탈락했다. 이후 2010년에 시안의 우랑·직녀 전설 역시 제3차 국가급비물질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국가지정 무형문화유산이 가지고 있는 권위와 경제적 이익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토록 유명한 견우와 직녀 이야기의 발원지임을 국가가 공식으로 지정해준다니, 조금이라도 관련 있는 지역이라면 어찌 욕심내지 않겠는가.

평안남도 덕흥리 고구려 고분 벽화(408년)에 그려진 견우와 직녀가 생각난다. 고구려 때 그 지역 사람들도 은하수를 사이에 둔 견우와 직녀 이야기를 믿었기에 무덤에 그 하늘의 모습을 그렸던 것이다. 전설 속에 담긴 인간 삶의 원형에 많은 이들이 공감하기에 이야기가 확산되고 여러 지역의 많은 이들이 그 이야기를 공유하는 것이리라. 정통을 주장하며 그것을 독점하려는 게 과연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문화는 다양한 방식으로 공유할 수 있는 것이다. ‘경쟁하는 것이 우랑·직녀인가, 아니면 재물신인가?’(스다이상바오(時代商報), 2010.8.17)라는 글에서 지적하듯이 “눈앞의 이익에 급급한 마음과 GDP 숭배를 버려야만” 문화의 다양한 공유가 가능해질 것이다. 어떤 것이 옳다고(正) 정(定)하려는 아집 뒤에 감춰진 이기와 욕망은 언제 어디서나 경계해야 한다. 그렇게 정(定)한 것이 반드시 옳은(正) 것은 결코 아닐지니.

<연세대 인문학연구원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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