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L의 돈잔치 ‘싹쓸이 스카우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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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L로 선수가 몰리면서 유럽 축구계도 고민에 빠졌다. 성적에 따라 수익이 늘어나면서 다시 성적이 올라서는 선순환이 아니라 일방적인 자금력의 차이로 쏠림 현상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영국의 올여름은 어느 때보다 뜨겁다. 날씨가 아닌 축구 얘기다.

세계적인 회계법인 ‘딜로이트’는 9월 2일 마감된 유럽 축구 이적시장을 집계한 결과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EPL) 20개팀이 이적료로만 총 8억7000만 파운드(약 1조5797억원)를 기록했다고 발표했다. 전년도(8억3500만 파운드)보다 4% 늘어나 역대 최고치를 경신했다. 지난 1월 겨울 이적시장에서 EPL이 집행한 1억7000만 파운드(3092억원)를 합치면 10억 파운드(1조8889억원) 시대가 열린 셈이다.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의 맨체스터 시티로 이적하며 올해 여름 유럽 이적시장에서 최고액의 이적료를 기록한 케빈 데 브루잉이 전 소속팀인 독일 분데스리가 볼프스부르크 소속 시절 유로파리그 경기에 출전해 공을 다루고 있다. / AP연합뉴스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의 맨체스터 시티로 이적하며 올해 여름 유럽 이적시장에서 최고액의 이적료를 기록한 케빈 데 브루잉이 전 소속팀인 독일 분데스리가 볼프스부르크 소속 시절 유로파리그 경기에 출전해 공을 다루고 있다. / AP연합뉴스

스페인·이탈리아보다 2배나 많이 써
EPL과 유럽 정상을 다투는 이탈리아 세리에A(4억500만 파운드·7354억원)나 스페인 프리메라리가(4억 파운드·7263억원)와 비교해도 두 배가 넘는다. 요즘 몇 년 사이 유럽 축구를 주름잡았던 독일 분데스리가(2억9000만 파운드·5266억원)의 이적료 총액 규모는 EPL의 3분의 1에 불과할 정도니 놀랍기만 하다.

EPL은 유럽 전역에서 그야말로 선수들을 빨아들였다. EPL 20개 구단이 총 366명을 영입하면서 평균 4300만 파운드(781억원)를 썼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멤피스 데파이의 영입을 위해 PSV아인트호번(네덜란드)에 3100만 파운드(562억원)를 지불한 것은 전주곡에 불과했다. 지역 라이벌 맨체스터 시티가 이적시장에서 가장 뜨거운 선수로 눈길을 끈 케빈 데 브루잉을 데려오기 위해 소속팀 볼프스부르크(독일)에 현금만 5500만 파운드(998억원)를 지불하면서 판을 키운 것이다. 맨체스터 시티는 라힘 스털링과 니콜라스 오타멘티를 데려오는 데 총 8100만 파운드(1470억원)를 내놓으며 세상을 깜짝 놀래켰다.

여기에 자극받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아직 10대에 불과한 신예 엔소니 마샬을 프랑스 AS모나코에서 데려오는 데 3600만 파운드(653억원)를 쓰고, 첼시 역시 바르셀로나(스페인)에서 주전 경쟁에 밀린 페드로를 2140만 파운드(388억원)에 사오면서 돈잔치는 그야말로 절정에 달했다.

막대한 중계권 수입으로 자금 풍족
EPL 돈잔치에 한 가지 특징이 있다면 일부 빅클럽이 아닌 20개 구단 전체가 선수 영입을 주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작은 구단으로 잘 알려진 스토크시티가 세르단 샤키리를 1200만 파운드(217억원)에 데려왔고, 크리스탈 팰리스는 요한 카바예를 1000만 파운드(181억원)에 영입했다. 선수를 키워내 파는 전형적인 셀링클럽 웨스트햄은 아예 프랑스 리그1 도움왕인 드리트리 파예를 마르세유에서 1100만 파운드(198억원)에 사왔으니 그 흐름을 짐작할 만하다. 빅클럽과 경쟁을 선언한 토트넘 핫스퍼가 손흥민을 아시아 선수로는 역사상 최고액인 2200만 파운드(약 400억원)에 영입한 것이 현지에선 작은 소식으로 묻힐 정도다.

이 같은 현상은 EPL의 압도적인 중계권 수익과 수익분배 구조 덕분이다. EPL은 세계 각국에서 시청자 9억3000만명을 확보해 막대한 수익을 얻고 있다. 특히 아시아와 오세아니아에서 인기를 자랑한다. 시청자가 4억6900만명으로, 유럽(6700만명)보다 7배나 많다.

중계권 수익도 쑥쑥 올라가고 있다. 올해 EPL 중계권 수익은 30억1800만 파운드(5조4000억원)로 스페인 프리메라리가(7억5500만 유로·9703억원)와 비교가 되지 않는다. 놀라운 것은 내년부터 그 금액이 71% 가까이 늘어난 51억3600만 파운드(약 9조3000억원)로 인상된다는 사실이다.

일부가 아닌 EPL 구단 전체에 중계권 수익을 균등하게 배분해 전체의 경쟁력을 끌어올린 것도 눈길을 끈다. EPL은 자국 중계권료 수익의 50%를 기본수당으로 20개 구단에 동일하게 지급하고, 나머지 50%를 성적과 생중계 횟수에 따라 차등 분배한다. 또 해외 중계권료 수익과 광고 수익 등도 20개 구단에 동일하게 나눠준다.

EPL의 돈잔치 ‘싹쓸이 스카우트’

사정이 이렇다보니 지난해 우승팀 첼시(9900만 파운드·1797억원)와 꼴찌 퀸스파크레인저스(6490만 파운드·1175억원)의 중계권료 수익에는 큰 차이가 없다. 스페인 프리메라리가에서 쌍벽으로 불리는 레알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에 중계권료 대부분이 집중돼 양극화 현상이 일어나는 것과 비교된다.

독일 분데스리가도 EPL처럼 중계권료 수익을 균등하게 나누지만 전체 금액이 너무 큰 차이가 나니 경쟁을 기대하기 어렵다. 실제로 분데스리가 우승팀 바이에른 뮌헨이 챙긴 중계권료는 3690만 파운드(670억원)로, EPL 꼴찌인 퀸스파크레인저스보다 못한 게 현실이다. EPL 20개 구단이 유럽 최고의 선수를 싹쓸이 영입할 수 있는 배경이다.

영국 파운드화의 강세라는 변수도 영향을 미쳤다. 지난해 1파운드당 1.25유로 정도였던 영국 파운드화 환율은 6월 한때 1.44유로까지 치솟으며 EPL 전체를 웃게 만들었다.

영국 외환 전문업체 ‘피닉스 파트너스’는 “올여름 EPL 구단들이 유로화를 쓰는 나라에서 뛰는 선수들을 데려오는 데 투자한 돈이 5억8500만 파운드(1조620억원)를 넘는다”며 “환율 강세 덕분에 이번 이적시장에 절감한 돈이 8500만 파운드(1546억원) 정도에 이른다”고 분석했다. 영국 정부가 파운드화 강세를 주도하는 정책을 취한 것이 결과적으로 EPL에 도움을 줬다는 해석으로 볼 수 있다.

EPL로 선수가 몰리면서 유럽 축구계도 고민에 빠졌다. 성적에 따라 수익이 늘어나면서 다시 성적이 올라서는 선순환이 아니라 일방적인 자금력의 차이로 쏠림 현상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유럽축구연맹(UEFA)이 같은 상황을 막으려 2011년부터 적용한 파이낸셜 페어플레이 룰(FFP)도 유명무실해진 것이 문제다. 각 구단이 4500만 유로(약 668억원) 이상의 적자를 기록하면 유럽챔피언스리그와 유로파리그 등 UEFA 주관 대회에 참가하지 못하게 해 공정한 경쟁을 유도한다는 이 규정은 EPL 홀로 수익이 늘어나면서 전혀 효과를 보지 못하고 있다.

영입 경쟁 가열로 ‘2001년 미친 여름’ 경고도
딜로이트 스포츠비즈니스그룹 수석 매니저인 알렉스 토프는 “프리미어리그 20개 팀이 전 세계 프로축구 구단 매출 40위 이내에 모두 포함된다”며 “다른 리그로선 경쟁 자체가 어려울 수밖에 없다”고 전했다.

일각에선 과거 유럽 축구 전체를 공멸 위기로 몰아넣었던 2001년의 미친 여름이 다시 돌아올 수 있다는 경고도 흘러나온다. 당시 레알 마드리드가 공격적으로 선수를 영입했던 갈락티코 정책으로 미친 여름을 촉발시켰던 것처럼 EPL 독주에 자극받은 각국 최고의 팀들이 이성을 잃을 경우 잘못된 역사를 되풀이하는 신호탄이 될 수도 있다는 뜻이다. 독일 분데스리가 마인츠 크리스티안 하이델 단장은 “EPL이 평범한 선수에게도 천문학적인 이적료와 급료를 지불하며 선수를 싹쓸이하고 있다”면서 “자칫 잘못하면 EPL 문제로 유럽 축구 전체가 2~3년 후에 자멸할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황민국 경향신문 스포츠부 기자 stylelom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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