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리빨리’ 시대, 때론 ‘천천히’도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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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콘텐츠를 대량으로 속독하는 것처럼, 긴 콘텐츠를 소량으로 천천히 음미할 수도 있다. 그리하여 속도와 양으로 얻을 수 없는 또 다른 종류의 밀도를 얻어낼 수도 있다.

여러분께서는 책을 읽는 속도가 빠르신지, 아니면 그 반대이신지? 딱히 자랑은 아니다만, 나는 단연 저속 독자 쪽에 속한다. 하여 속독자를 볼 때마다 그저 감탄할 따름이다. 그리고 생각한다. 그런 남자(또는 여자)와 결혼한 배우자는 참 편하겠다, 라고.

그렇다. 속독 능력을 보유하지 못한 것이 가장 불편할 때는 단연, 오래 기다리던 연재만화 신간을 샀을 때다. 아내와의 가위 바위 보에서 내가 이기는 경우, 그리하여 내가 먼저 책을 읽을 권리를 득하게 될 경우, 어김없이 책을 반쯤 읽은 시점쯤에 불평이 쏟아진다. 혹시 일부러 늦게 읽는 거 아니냐, 어차피 만환데 그냥 그림만 보면 안 되겠냐 등등등. 이럴 때마다 정말이지 나도 속독자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뭐, 그렇다고 해서 순서를 양보하거나 하는 건 아니지만.

어린 아동들의 묘기 같은 속독법
그러고 보니 어렸을 때, 그러니까 초등학생 5, 6학년 때쯤 ‘속독학원’이 한창 유행했던 적이 있었다. 나는 속독학원을 다녀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그 구체적인 교습법까지는 모른다만, 당시 학원을 다닌 친구들의 이야기를 종합해보면 그 속독법이란 대략 ‘가로로 한 번, 대각선으로 한 번, 위 아래로 한 번씩 쓱쓱 책을 훑고는, 그 기억조각들을 마치 조립가구를 조립하듯 끼워 맞춰 한 페이지의 내용을 완전히 파악하는 기술’이었던 것 같다.

지난 5월, 서울지하철 3호선 독서 테마열차에 탑승한 학생들이 책을 읽고 있다. / 서성일 기자

지난 5월, 서울지하철 3호선 독서 테마열차에 탑승한 학생들이 책을 읽고 있다. / 서성일 기자

그런데 이 기기묘묘한 기술이 초현실적으로 느껴졌던 것이 나뿐만은 아니었던지, 당시 각종 묘기를 보여주는 TV 쇼에서도 속독을 단골소재로 등장시키기까지 했었다. 그러니까, 이 프로그램은 속독술에 통달했다는 ‘속독천재’ 아동을 스튜디오로 데리고 와서는 ‘난생 처음 보는’ 글자가 촘촘하고도 두툼한 책을 속독천재 아동 앞에 갖다놓는다. 그러면 그 아동은 적어도 수백 페이지는 돼 보이는 그 책의 페이지를 엄청난 속도로 넘긴다. 그래도 그 많은 페이지를 모두 넘기는 데는 적잖은 시간이 걸리는 만큼, 그동안에 초대가수가 쇼의 전속 악단의 연주를 배경으로 노래를 한다. 노래가 끝나면 ‘속독천재’가 책의 내용을 줄줄 읊고, 방청객의 박수를 배경으로 사회자는 출연아동에게 다정한 격려의 말과 함께… 이하 생략.

아직도 눈앞에 생생하다. 거의 은행 창구직원 돈 세는 속도로 책장을 넘기던 그 놀라운 손놀림.

사실 나는 속독보다도 그 손기술이 더 놀랍던데, 그러거나 말거나 다음날 학교 곳곳에서는 어김없이 그 TV쇼를 흉내 낸 속독 배틀이 벌어지곤 했었다. 마치 유리 겔라(이스라엘 출신의 자칭 초능력자. 숟가락 구부리기 ‘초능력’으로 유명세를 떨쳤다가, 후에 사기 또는 마술이었음이 밝혀짐)가 TV에 출연한 다음 날 전국 모든 초등학생들이 도시락 숟가락을 구부리겠다며 숟가락을 노려보던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그 많은 숟가락들이 수모를 당했던 것처럼, 교과서부터 참고서까지 갖가지 책들이 구겨짐과 찢어짐의 환란을 겪어야만 했다.(본론하고는 전혀 상관없는 얘기다만, 생각해보니 유리 겔라는 사기꾼 같은 게 아니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그는 어쩌면 침체에 빠진 주방용품 제조업을 구해내고자 전 세계의 숟가락 사용자들을 상대로 초능력적 판촉능력을 보여준, 시대를 앞서간 진정 천재적인 쇼호스트였을지도 모른다. 뭐, 아니면 관두고.)

그런데 이런 얘기를 지인에게 했더니 놀랍게도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속독학원이 유행했다고 한다. 예전과 다른 점은, 예전엔 ‘두뇌 개발’ 또는 ‘호기심 충족’ 또는 ‘배틀 필승’이라는 차원에서 그저 막연하게 속독을 배웠던 것과는 달리, 요즘엔 수능의 지문이 정상적인 읽기 속도로 감당해내기에는 너무 길어서 속독을 배운다는 것이다. 당연히도 한국어 속독뿐 아니라 영어 속독도 성업했다. 과연 이 나라의 정신문화를 지배하는 최강의 대학입시임을 다시 한 번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속독이니 아니니 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해지는 시대로 넘어가고 있는 것 같다. 얼마 전 읽은 기사에 따르면 ‘20대 모바일 콘텐츠 소비자’들이 평균적으로 견딜 수 있는 ①텍스트는 30줄 정도 ②동영상 길이는 43초 ③그림 컷 수는 17컷 등등이라고 한다. 이것이 사실이라면(물론 사실이겠지) 이 글은 여기까지 읽히기 훨씬 전에 이미 우측상단의 X 버튼과 함께 망각의 뒤안길로 사라져 있을 것이다.

10분짜리 웹 드라마가 등장
뭐, 그럼에도 불구하고 꿋꿋이 계속하자면, 아닌 게 아니라 최근의 콘텐츠들은 이러한 추세에 발맞추어 점점 짧게 더 짧게 사이즈를 줄이는 방향으로 가고 있는 듯하다. 예컨대 ‘웹 드라마’가 그런 사례 중 가장 대표적인 것 같다. 기껏해야 1회의 길이가 10분 남짓으로, 인터넷 전용으로 방영되는 드라마가 요즘 부쩍 많이 제작되고 있다고 하는데, 아닌 게 아니라 최근 만난 한 드라마 제작 관계자의 말에 따르면 실제로 공중파나 케이블에서 현역으로 작품을 만들고 있는 연출자들이나 작가들이 웹 드라마의 제작에도 손을 대는 일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고 한다. 하긴, 공중파나 케이블 방송에서도 어차피 시청률을 분 단위로 쪼개 측정하면서 그 그래프의 기울기에 따라 일희일비하고 있는 현실이니, 이렇게 대놓고 10분으로 쪼개서 방송 콘텐츠를 만드는 것이 차라리 속 시원한 처사라고 본다.

아무튼 최근의 추세는 긴 콘텐츠를 빨리 읽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길이 자체를 아예 줄여서 누구나 고속으로 콘텐츠를 소화할 수 있게 만드는 것 같다.

그런데 시간을 잘게 쪼갠다고 그 시간의 밀도가 올라가는 걸까? 물론 그것은 아닐 것이다. 나의 경험으로 볼 때 오히려 그 반대의 결과가 나올 확률이 훨씬 높다.

뭐, 세상 모든 콘텐츠가 신문의 네 컷짜리 만화 같아지는 그런 경향이 옳은 것인지 아닌지 나는 모르겠다. 사실 그런 일에 옳고 그름 같은 것은 없을 것이다. 그저 그런 일이 벌어지고 누구도 그것을 막을 수 없을 뿐.

다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취사선택은 가능하다. 짧은 콘텐츠를 대량으로 속독하는 것처럼, 긴 콘텐츠를 소량으로 천천히 음미할 수도 있다. 그리하여 속도와 양으로 얻을 수 없는 또 다른 종류의 밀도를 얻어낼 수도 있다.

문화는 바로 그곳, 취사선택을 하는 개인으로부터 시작된다. 난 그렇게 믿는다.

[덧붙여서] 그건 그렇고, 책을 느리게 읽는 일에 또 다른 장점은 없는 걸까? 가끔씩 일이 몰릴 때면, 책 한 권을 한 달 정도 붙들고 있을 때까지 있다. 그러노라면 종종 옆에서 지켜보던 사람이 “대체 그 책 몇 번째 읽는 거야? 그렇게도 재밌어?”라고 물으며 책을 펼쳐보기도 하고, 그러다가 내가 채 끝내지도 못한 책을 빼앗아가 읽기도 한다. 물론 나는 한 달이 되도록 아직 다 못 읽었다는 말은 차마 못하므로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다. 그런 책은 대개 다른 사람들에게 권해주고 싶은 책일 때가 많으니 느리게 읽는 것도 꼭 나쁜 것만은 아니지. 암.

<한동원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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