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가한 임금피크제 타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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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피크제로 한창 시끄럽다. 이런 낮은 수준의 개별 안건에 집착하고 싸우느라 더 큰 문제를 방치하는 버릇은 또 반복되고 있다. 더 큰 문제? 바로 한국 고용시장의 뿌리 깊은 신분제다. 임금피크는 서민 신분에게는 이미 벌어진 일이다. 변변치 못한 회사에서 일찍 퇴직했지만 빈곤 탓에 노동시장에서 떠날 수 없는 노년층은 언감생심 은퇴는커녕 저임금 허드렛일을 전전한다. 셀프 임금피크 포물선이다.

대부분의 직장인은 정년 훨씬 이전에 여러 수단을 통해 사실상 용퇴를 종용받는다. 물론 법을 방패삼아 버틸 수도 있겠지만 점점 낮아지는 임원 평균 연령은 장유유서의 유교적 분위기를 역이용해 좌불안석하게 한다. 한국의 대부분 기업이 사실상 의존하는 호봉제는 제국주의 일본의 ‘생활급’ 사상에서 유래한다. 노동수급과 능력에 의해 정해지는 임금 대신 가족 부양을 위한 생계비 사정이 반영된 생활급이 전시체제하에서 강제된 것이다.

여기에는 일정연수를 넘으면 숙련공으로서의 격차는 없다는 대전제, 그리고 젊은이에게 지나친 여유는 낭비가 될 뿐이나, 일가의 가장이 생활 유지를 못하게 되면 사상 오염이 일어날 것이라는 판단이 있었다. 그 결과 국민의 생활 유지는 기업이 맡고 대신 정부는 그 기업집단을 배려하는 유착이 태동한다.

지난 8월 4일 노동조합 관계자들이 임금피크제에 반대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지난 8월 4일 노동조합 관계자들이 임금피크제에 반대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가족을 지닌 남성, 즉 근대화의 최소 단위 책임자의 신분을 보호하고 그 이외의 노동자는 차별하는 노동문화가 시작된다. 이 혜택 받은 사나이들은 ‘멤버십’의 일원으로 멸사봉공하느라 저녁을 잃어버린다. 한국형 정규직이라는 양반제의 탄생이다.

하지만 지금은 여성 사회 진출, 비혼 풍토 등 당시와는 다른 21세기다. 당시의 전제와 판단이 먹힐 리 없고 멤버십의 고용흡수율마저 떨어진다. 상황이 이런데 정년을 법으로 고정하고 대신 호봉제 내에서 임금피크를 강제 설정한다. 생활급 사상의 잔재를 의심하지 않은 결과다.

이는 ‘동일노동 동일임금‘이라는 국제노동기구(ILO) 국제 표준의 노동 철학과도 위배된다. 더불어 호봉 승급에서 기간제라고 제외하는 차별이란 헌법 11조 위반이지만 비정규직과 여성이 배제된 비표준적 노동 문화는 오늘도 가동 중이다.

모두 함께 공채돼 연공서열로 종신고용되는 꿈. 가능한 일일까? 21세기의 플랫폼들은 재화와 서비스를 낱개 구매하고 별점을 남기게 한다. 상품뿐만 아니라 인적자본도 노동시장에서 개별 판매한다. 누구나 차별 없이 시장 가격을 기대하고, 되는 만큼 일을 한다. 중국, 미국, 북유럽 등 혁신은 이런 토양에서 생겨났다. 차이가 있다면 일하지 못하는 이에 대한 사회의 보호다.

일제의 생활급 사상 이전으로 돌아가자 해도 그 이전은 또 다른 신분사회의 역사가 기다리고 있다. 겪어 보지 않은 평등을 쟁취하기는 힘든 일이다. 모두가 양반 신분이 될 수 있다는 헛된 환상 대신 모두가 시민이 돼 기여한 만큼의 임금을 가져가는 것. 아직도 우리에게는 이 글로벌한 상식이 낯선가 보다.

<김국현 에디토이 대표·IT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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