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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개혁보다 재벌개혁이 먼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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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피크제가 아니라 이윤피크제 등 도입 ‘전 국민의 파이’를 골고루 나누자

“정부가 말하는 노동개혁이란 비율로 따지면 얼마 남지도 않은 정규직 임금 깎아서 일자리 나누겠다는 말이다. 그럼 정규직보다 수천 수만 배 많은 액수의 이윤을 내는 재벌들 이윤 깎아서 일자리 만들고 임금도 늘리는 사회적 대타협은 안 되는 거냐?”

박근혜 대통령은 8월 6일 대국민 담화에서 집권 하반기 국정기조의 최우선 순위로 ‘노동개혁’을 강조했다. 하지만 총수 일가 내부의 경영권 분쟁으로 연일 떠들썩한 롯데그룹 사태와 같이 재벌문제를 개혁하겠다는 내용은 없었다. 졸지에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이 재벌보다 더 급한 개혁의 대상이 돼버린 셈이다. 오민규 전국비정규노조연대회의 정책위원이 밝힌 제안은 정부의 주장과는 색다르다. 오 정책위원은 ‘임금피크제’ 대신 ‘이윤피크제’를 강조했다. 임금수준이 낮은 노동자 임금을 늘리려면 더 많이 받는 노동자 임금을 줄이는 것보다는 아예 돈을 쌓아두고 있는 재벌·대기업의 이윤을 줄이는 게 더 타당하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총수 일가의 경영권 분쟁이 벌어지고 있는 롯데그룹의 서울 잠실 롯데월드 교육관에서 직원들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 김영민 기자

총수 일가의 경영권 분쟁이 벌어지고 있는 롯데그룹의 서울 잠실 롯데월드 교육관에서 직원들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 김영민 기자

기업집단의 왜곡된 지배구조
대통령 대국민 담화의 주제어는 ‘개혁’이었다. 오 정책위원과 박근혜 대통령에게 ‘개혁’의 대상은 정반대였다. 박 대통령에게 성장잠재력을 저하시키는 주범은 “경직된 노동시장”이었다. 박 대통령은 담화에서 “정년 연장을 하되 임금은 조금씩 양보하는 임금피크제를 도입해서 청년 일자리를 더 많이 만들 수 있도록 해야 한다”며 “고임금 정규직들이 조금씩 양보와 타협의 정신을 발휘해 줄 것을 간곡히 당부드린다”고 호소했다. 기업은 임금피크제 도입으로 인건비 부담이 늘어나 고통받는 처지에 있으니 정규직과 기성세대의 양보만이 필요했을 뿐이었다.

정부와 청와대가 임금피크제와 해고 유연성 강화로 대표되는 노동개혁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는 상황이지만 문제의 본질은 재벌개혁이라고 지적하는 목소리가 곳곳에서 나오고 있다. 롯데그룹의 가족 간 경영권 분쟁 사태는 재벌이 어떻게 총수 일가에게 경영권을 과도하게 집중시키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 사례였다. 그동안 그룹을 좌지우지해 왔던 신격호 총괄회장의 지분은 0.05%에 불과했다. 계열사 사이에 서로 물고 물리는 순환출자 구조로 연결된 기업집단의 왜곡된 지배구조는 위기가 닥치면 그대로 취약점을 드러낼 수밖에 없는 구조로 남아 있었던 셈이다.

경제민주화의 출발점은 재벌개혁
재벌이 지배하는 기업집단이 그 자체로 한국의 경제적 잠재력을 갉아먹는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하나라는 시각은 흔히 진보로 분류되는 학자나 연구자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엄격한 시장 질서를 내세우는 보수적 입장의 학자들도 ‘친기업’ 또는 ‘친재벌’과 ‘친시장’의 차이는 분명히 구분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신광식 연세대 경제대학원 겸임교수는 “‘친기업’은 이미 시장에서 자리 잡은 기성 기업들의 기득권과 이익을 중시하고 지켜주는 것인 반면, ‘친시장’은 잘 작동하는 시장을 조성해 누구에게나 균등한 기회와 최상의 사업환경을 제공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시장이 제대로 굴러가려면 강자인 재벌·대기업의 횡포를 저지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신 교수는 “정치적 과정과 경제관계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해 자신의 이익을 지키고 특혜를 얻어낼 수 있기 때문에 재벌 총수 등 엘리트들은 오히려 법치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며 “총수 일가가 사익을 편취하는 것을 근절하고, 경제적 약자들의 법적 권리를 강화하는 한편 경제범죄에 대해서는 엄정한 법 집행을 하는 것 모두가 친시장 정책”이라고 말했다. 재벌은 언제든 시장에서의 기득권을 바탕으로 시장경제와 민주주의의 원칙을 벗어날 수 있으므로 롯데의 경영권 분쟁 사태에서 드러난 것과 같은 국부 파괴 및 반시장적 행위는 규율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편 것이다.

진보진영에서 재벌개혁 논의에 앞장서고 있는 김상조 한성대 교수(무역학)는 재벌개혁이 경제민주화의 출발점으로서 우선돼야 할 과제라는 점은 분명하다고 지적하면서도 한국 경제 내·외부의 현실이 점차 복잡해지고 있는 측면을 감안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저성장이 만성화되는 세계 경제의 흐름에 따라 한국의 재벌 기업집단들이 성장을 지속할 수 있을지는 불투명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진보진영 일각에서 지적하는 것처럼 재벌과 대기업에 대한 금지 위주의 행정규제만 늘린다 해서 재벌을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라는 것이 김 교수의 분석이다. 자칫하다간 집중해야 할 최상위 재벌은 법망을 빠져나가는 한편, 상대적으로 부실한 재벌들의 연쇄 붕괴나 여타 기업들의 경쟁력 약화를 불러올 수도 있다는 것이다.

김 교수는 그동안 헛발질을 계속해온 재벌개혁이 보다 효과적으로 실현되려면 “다양한 법·제도와 관행이 상호보완적으로 작용할 수 있게 사전적 규제에만 집중할 것이 아니라 사후적 감독을 강화하고 모범규준을 제시하는 등 체계적으로 정책수단들을 활용해야 한다”면서 “비유를 들자면 치어까지 잡아들이는 하나의 정치망보다는 성긴 코의 그물을 여러 개 던지는 것이 보다 효과적일 수 있다”고 설명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8월 6일 청와대 춘추관에서 노동개혁 등의 내용을 담은 대국민 담화를 발표하고 있다. / 청와대사진기자단

박근혜 대통령이 8월 6일 청와대 춘추관에서 노동개혁 등의 내용을 담은 대국민 담화를 발표하고 있다. / 청와대사진기자단

재벌개혁이 필요하다는 주장은 2012년 18대 대선에서의 경제민주화 공약과 얽혀 정치권을 달궜던 이슈였다. 2013년에는 신규 순환출자를 금지하는 등 일부분의 재벌 지배구조 개혁조치가 도입되긴 했지만 재벌개혁의 효과가 나타나기에는 아직도 갈 길이 멀다는 인식이 지배적이다. 이병천 강원대 교수(경제학)는 이에 대해 결국 정치적 해법으로 풀 수밖에 없다는 의견을 보였다. 개별 재벌·기업집단 수준의 지배구조뿐만 아니라 재벌이 정치·사회적 지배력을 확장하는 문제에까지 손을 쓰려면 정치권과 시민사회 모두가 참여하는 대안 수립과정이 필수적이라는 판단 때문이다. 이 교수는 “재벌에 의한 정치권력 매수와 유착을 단지 공정경쟁의 의제로 제기하는 것이 아니라, 민주적 발언을 봉쇄하고 분배 정의를 침해하는 것으로 보면 참여민주주의적 의제가 된다”며 “총수 일가의 사익추구 행위 역시 소액주주권을 보장하는 관점을 넘어 노동자, 하청 중소기업, 소비자, 지역사회 등 다수 이해당사자의 권익의 문제로 파악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비록 단기간에 성과를 거두는 것이 어렵더라도 재벌개혁 의제가 선거기간에 한정된 전시성 공약에 머물지 않으려면 정치권을 넘어 시민사회 전체의 의제로 다뤄져야 한다는 것이 이 교수의 주장이다.

재벌개혁을 주장하는 목소리와 함께 정부가 내세우고 있는 노동개혁의 대표 정책인 임금피크제의 효과에 관해 의문을 제기하는 목소리도 적지않게 나오고 있다. 이미 2000년대 중·후반 개별적으로 임금피크제를 도입한 바 있는 일부 공기업에서 신규 고용을 늘리는 효과가 나타나지 않았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 임금피크제를 선택하는 대신 정년을 보장받는 방식으로 회사에 남았지만 결국 구조조정 과정에서 조기퇴직하고 마는 사례도 적지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포커스]노동개혁보다 재벌개혁이 먼저

재벌개혁 문제 시민사회 전체 의제로
이선우 한국방송통신대 교수(행정학)는 ‘정부 임금피크제 도입에 관한 연구’ 논문에서 임금피크제를 시행한 9곳의 공기업에서 신규 채용이 늘었는지를 분석했다. 2003년부터 임금피크제를 도입한 신용보증기금의 경우 2004년 57명에 달하던 신규 채용인원이 해마다 떨어져 2005년 41명, 2008년 35명으로 점차 줄어 2006년과 2009년에는 신규 채용을 중단하기까지 할 정도였다. 논문에 따르면 신용보증기금을 포함해 임금피크제를 도입한 9개의 공기업 가운데 다른 이유로 신규 채용이 중단된 두 곳의 공기업을 제외하면 7곳 모두에서 신규 채용 효과는 없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게다가 임금피크제 도입으로 50대 중·후반 연령대의 노동자 임금이 줄어들면 이미 진행 중인 50대의 ‘소득절벽’ 현상이 가속화될 수 있다는 관측까지 나온다. 갑작스레 소득이 크게 줄어드는 소득절벽을 맞이하는 연령대도 낮아지는 경향이 나타나는 것이다. 2007년 50대의 가구소득은 40대의 1.04배로, 전체 세대 중에서 가장 높은 소득수준을 보였지만 이후 점차 줄어들기 시작해 2013년에는 40대 가구소득의 0.94배 수준으로 급락한다. 문제는 소득절벽 현상이 고령층의 소득불평등까지 확대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데 있다. 2007년 0.460이었던 은퇴연령 인구의 시장소득 지니계수는 2012년 0.531로 상승했다. 전체 세대의 지니계수가 0.340에서 0.338로 소폭 줄어든 것과 비교되는 수치다.

결국 정부발 ‘노동개혁’의 부작용을 막기 위해서는 ‘노동자들의 파이’만 나눌 것이 아니라 재벌개혁을 통해 재벌을 포함한 ‘전 국민의 파이’를 골고루 나누는 방안이 필요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오민규 정책위원은 “현재의 청년들은 부모세대가 겪은 정리해고의 고통을 함께 경험했는데, 정부는 이 두 세대를 이간질하려 농간을 벌이고 있다”며 “진정으로 정규직·비정규직, 대기업·중소기업, 청년·장년이 상생하려면 누군가 꼭꼭 숨겨두려 하고 있는 더 큰 파이를 나눠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윤피크제란?

오 정책위원은 정부가 강력히 밀고 있는 ‘임금피크제’를 보며 ‘이윤피크제’를 떠올렸다. “박근혜 정부가 노동 구조개혁이란 말로 노동계의 언어를 가져다 썼듯이, 재벌체제의 구조개혁 문제에 대해서도 정부가 사용한 논리를 그대로 써보면 어떨까 해서 생각했다.” 임금피크제가 가장 임금수준이 높을 때인 정년 직전의 노동자 임금을 깎는다는 방식인 것처럼, 이윤피크제도 이윤율이 높은 기업의 이윤을 깎아서 세금으로 확보한다는 구상을 담고 있다. “일각에서는 ‘사회주의네’라고 하겠지만, 일정 수준 이상의 이윤율을 유지하는 기업한테 더 걷는다는 생각이 일정 호봉 이상의 노동자에게 더 걷는다는 생각과 논리적으로 다를 건 없지 않나?” 오 정책위원은 이윤피크제를 통한 ‘이윤체계 개편’으로 너무 많은 이윤을 내는 기업의 이윤이 영세 중소기업, 특히 그곳의 저임금 노동자에게 돌아갈 수 있다고 말했다.

고통을 분담한다는 명목의 임금피크제가 사실상 세대 간, 정규직·비정규직 간 갈등을 촉발시키는 데 비해 실제로 연대를 촉진하기 위한 방안도 제안에 들어가 있다. 노조가 소속 조합원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비정규직이나 해고자 등 보다 취약한 처지의 노동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단체협약을 변경할 수 있게 하자는 것이 제안의 핵심이다. 오 정책위원은 “정부의 취업규칙 변경 역시 임금피크제만을 노린 것이 아니라, 연공급제와 호봉제를 몰아내려는 수단으로도 이용될 것이 틀림없다”고 말했다.

‘고용 없는 성장’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도 있다. 재벌기업의 투자와 고용을 유도하기 위해 사내유보금을 적극 사용하도록 과세하자는 것이다. 사내유보금을 쌓아두기만 하거나 총수 일가의 이익 보전을 위해 부동산 매입 등에만 활용하는 경우 50% 이상의 중과세를 물리는 게 핵심이다. 문제는 실현 가능성이다. 어떻게 제안을 구체화해갈지를 묻자 오 정책위원이 답했다. “물론 노동계뿐만 아니라 정치권, 시민사회, 그리고 사회 전체의 여론이 뒷받침돼야 가능한 방안이다. 지금 당장 힘이 달리긴 해도 명분도 있고 여론도 나쁘지 않다. 정부가 마련하려는 청년 일자리를 기업이 앞장서서 세금 내고 만들어주면 모양도 좋지 않을까.”


<김태훈 기자 anarq@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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