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은 누구의 것도 아닌 ‘우리 모두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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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올해 말 문체부에서 전국 산의 70%가량을 호텔, 리조트, 콘도를 지을 수 있는 땅으로 화끈하게 풀어주는 법안을 국회에 제출할 것’이라는 소식을 들었다. 머지않아 한국에서는 아스팔트길과 건물이 들어서지 않은 ‘순수’ 산을 만나기란 백 년 묵은 산삼 열 뿌리 캐기 만큼이나 어려워질 것이라는 이 충격적 소식도 소식이려니와….

장 그르니에의 에세이집 <섬>에 실린 ‘행운의 섬들’이라는 글을 보면 “가장 달콤한 즐거움과 가장 생생한 기쁨을 맛보았던 시기라고 해서 가장 추억에 남거나 가장 감동적인 것은 아니다”라는 문구가 있다. 요컨대 너무 강렬한 경험은 지나치게 짧고도 굵은 관계로 오히려 오랜 추억의 반열에 들기 어렵다는 것이다. 반면 그런 게 있었는지도 모르고 지나쳤던 평범하고도 밋밋한 일상적 순간이 오히려 더 기억에 강하고도 오래 남는 일이 흔하다는 것이 그의 요점이었는데, 이 대목을 읽으면서, 흠, 과연 하고 무릎을 쳤다.

생각해보면 그렇다. 인생뿐 아니라 여행을 다닐 때도, 음악을 들을 때도, 책을 읽을 때도, 영화를 볼 때도 잔뜩 힘을 주거나 엄청나게 공을 들인 클라이맥스보다는 오히려 있는지도 없는지도 모를 보조출연자급 시간이나 장면들이 손톱 밑에 낀 페인트처럼 오래오래 가는 경우가 많다.

공사로 깎여나간 산맥 / 경향신문 자료사진

공사로 깎여나간 산맥 / 경향신문 자료사진

충격적 뉴스에 대한 평온한 반응
개인적으로 이런 현상을 ‘기억의 손톱 때’ 현상이라고 부르고 있는데(그닥 위생적인 표현이 아니어서 죄송), 류승완 감독의 신작 <베테랑>도 그런 기억의 손톱 때를 남기는 영화였다. 뭐냐면, 극중 악의 축인 재벌 3세(유아인 분)가 주인공 형사(황정민 분)에게 자신의 ‘놀이 친구들’을 소개하다가 그 중 한 명을 “이분은 강원도에서 콘도 몇 개 운영하시는 자연파괴자 OOO씨”라고 소개하는 대사가 바로 그것이다.

물론 이 ‘자연파괴자 OOO씨’는 그 장면 이후로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았고, 영화 자체의 테마도 자연파괴자 응징 같은 것과는 전혀 관계가 없었다만, 이 대사가 자꾸만 기억의 수면 위로 떠오르는 것은 아마도 얼마 전 ‘올해 말 문체부에서 전국 산의 70%가량을 호텔, 리조트, 콘도를 지을 수 있는 땅으로 화끈하게 풀어주는 법안을 국회에 제출할 것’이라는 소식을 들었던 덕분이 아닌가 생각된다.

아시다시피 전국 산의 70%라면 국립공원과 군사지역 빼고는 거의 전부에 해당될 것인데, 가뜩이나 산자락 비슷한 곳이라면 서울 지방 가릴 것 없이 어디든 고층아파트가 솟구치고, 산 중턱 비슷한 곳이라면 어디든 치즈케이크 자르듯 옆구리를 싹둑싹둑 베어내서 길을 만들고 있는 현 추세로 볼 때, 머지않아 한국에서는 아스팔트길과 건물이 들어서지 않은 ‘순수’ 산을 만나기란 백 년 묵은 산삼 열 뿌리 캐기만큼이나 어려워질 것이라는 이 충격적 소식도 소식이려니와, 그보다 더 놀라웠던 대목은 이 무시무시한 뉴스에 대한 반응이 너무나도 평온하고도 고요하다는 점이었다.

뭐, 물론 메르스다 그리스 사태다 우리의 정신세계를 교란하는 뉴스가 많긴 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래서야 어디.

이런 무반응의 원인에는, 실제로 이런 자연도륙이 실현되었을 때 우리의 눈앞에 펼쳐질 실제 풍경을 상상하지 못하는(또는 않는) 것도 일정 정도 있을 것이라고 나홀로 추정해보는 가운데(이 뉴스의 배경화면은 아니나 다를까 ‘멀쩡한’ 산들의 항공촬영 모습이었다), 그런 이유로 다음과 같은 동영상의 제작 및 배포를 각종 뜻 있는 개인 및 단체들께 제안 드리는 바다.

일단 [밑재료 준비] ① 우리에게 자연풍광이 아름다운 것으로 잘 알려진 나라(예를 들면 스위스라든가 아이슬란드라든가) 또는 자연이 잘 보존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나라들(예를 들면 뉴질랜드라든가)을 선정한다. 아니라면, 카슈미르나 알프스 지역처럼 그냥 자연풍광이 아름다운 지역으로 선정해도 무방하겠다. ② 선정된 나라의 도시 이외의 지역을 무작위로 선택해서 촬영한다. 단,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곳만은 피한다. 그리고 [본 재료 준비] ③ 현재 우리나라 산지나 바닷가에 만들어져 있는 콘도, 리조트, 호텔, 골프장(이미 많다)을 촬영한다. 그 다음 [본격 요리] ④ 촬영된 밑재료 국가의 자연풍경 중 70% 분량에 우리나라에서 촬영된 콘도, 리조트, 호텔, 골프장을 합성해 넣는다. 마지막으로 [배포] ⑤ 완성된 동영상을 유튜브, 청와대, 국회, 각종 방송국 게시판 등에 올린다. 제목은 ‘산지 70% 개발 법안을 세계로!’ 정도면 좋을 것이다. 이 법안이라 해 안 될 게 뭔가. 새마을 운동도 전 세계 방방곡곡으로 수출한다는 요즘인데.

만일 예산과 기술력이 허용된다면 현재 우리나라 산지의 콘도, 리조트, 호텔, 골프장 등등을 실제 그대로 컴퓨터그래픽으로 모델링한 뒤 밑재료 국가의 풍경에 합성해 넣으면 훨씬 실감나는 화면을 얻을 수 있겠다. 건물이 들어서는 자리 앞쪽에는 거대 콘크리트 축대, 뒤쪽으로는 산을 깎아내서 생긴 절벽을 그려 넣는 등 디테일도 놓쳐선 안 되겠다. 또한 밑재료 국가의 산간지역의 70%에는 케이블카나 스키장을, 폭포나 해안의 70%에는 번지점프장이나 크루즈선 접안시설을 그려 넣는다면 금상첨화겠다.

무능한 정치인들이 내건 ‘지역개발’
아니, 기왕 내친 김에 좀 더 과감하게 국립공원에도 작업을 해보자. 전 세계 국립공원들의 경계 부분에 각종 펜션들을 그려 넣자. 물론 70% 밀도다. 만약 계곡 같은 것이 있어서 건물이 들어서기 어려운 지형처럼 보이더라도 주저하지 말자. 일단 건물을 그려 넣고, 그 아래에 콘크리트 축대를 추가로 그려 넣으면 된다. 아니, 그러면 계곡이 순식간에 하수시설처럼 변해버리지는 않을까 하는 순박한 근심걱정 따위는 버리자. 하긴 그렇다. 따지고 보면 왕년에 자연 아니었던 곳이 어디 있는가? 지금 우리가 대도시라고 부르는 곳들도 다들 처음에는 자연이 아니었던가. 하늘 아래 영원한 것이 어디에 있더냐. 아아.

그런데 이렇게 쓰고 있노라니, 이 법안을 통과시킨 각종 정치인들 및 관료들이 오히려 이 동영상을 자신의 홍보용으로 적극 살포할 것 같다는 우울한 예감이 든다. “OOO가 또 해냈습니다!” 등의 문구를 붙여서 말이다. 일자리 창출이니 경제 활성화니 레포츠산업이니 하는 단어들의 환청도 그 뒤를 따라 들려온다. 뭐 그리 비관적이냐고. 하지만 슬픈 예감은 정말이지 틀린 적이 없었다.

장 그르니에의 말 그대로 이제껏 내 머릿속에 남아있는 ‘자연’에 대한 기억은 각종 국립공원이나 명승지의 압도적인 풍경 같은 것들이 아니다. 그것은 집 뒤 공터에 빼곡히 자란 잡초들과 텃밭들, 그 틈새 곳곳에 고인 웅덩이들과 그곳에서 꼬물거리고 있던 달팽이와 올챙이들 그리고 크고 작은 개구리들, 그 위를 재빠르게 날아 지나던 제비들, 그 하늘 위에 가득 차 있던 잠자리떼와 풀냄새와 벌레 소리, 그런 것들이다. ‘70%’에조차 편입되지 못했던 그 하찮아 보이는 땅뙈기가 품고 있던 생명들의 기억이다.

과연 그들에게(그리고 우리에게) 어떤 자연은 보존할 가치가 있고 어떤 것은 없다는 것을 그리 쉽게 정할 자격이 있는 걸까. 그들의 것도 아닌, 누구의 것도 아닌, 그리하여 모두의 것인 자연을 제 것인 양 팔아 표를 사들이는 무능한 정치인들이 내걸기 마련인 ‘지역개발’이니 ‘규제완화’니 ‘경제활성화’니 하는 구호에 눌려 사라져버린 생명들을 추억한다. 국립공원은커녕 ‘그 외의 70%’에조차도 속하지 못했던, 하지만 저마다 모두 생생하게 살아 숨 쉬던 그 생명들을 추억한다. 지금 우린 대체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한동원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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