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업인 월급제’ 실험 성공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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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상 ‘이자 없는 영농자금 대출’… 2012년 화성 이어 순천, 나주, 임실, 진안 등 추진

이인목씨(29)는 올해부터 농사를 짓는다. 전문대를 나와 대기업 반도체 공장, 커피 전문점, 게임 개발업체 등 다양한 직장을 전전했지만 계약직의 굴레는 벗을 수가 없었다. 업체와의 계약이 만료된 뒤 살고 있던 원룸 계약기간도 끝나자 이씨는 올해 초 짐을 싸 경기도 화성의 본가로 돌아왔다. 빈둥거리던 이씨를 ‘하우스’로 불러낸 이는 아버지였다. ‘월급’을 줄 테니 아버지가 하던 농사일을 거들라는 제안을 들은 것이다.

“속으로 ‘에이, 뭘 월급을 주시겠어. 또 주신다고 내가 받을 수나 있나?’ 생각했는데 한 달 뒤에 진짜 월급이라고 100만원을 주시더라고요. 받긴 했어도 매달 월급이 100만원뿐이면 적다는 생각도 했고요.” 이씨는 아버지의 설명을 듣고서야 월급의 내역을 알게 됐다. 이씨가 받은 돈 100만원은 아버지가 화성시의 ‘농업인 월급제’로 지급받은 돈이었다. 월급제라고는 하지만 엄밀한 의미의 월급이라기보다는 ‘이자 없는 영농자금 대출’에 가깝다. 달마다 월급처럼 정해진 액수를 지자체에서 받은 뒤 수확이 끝나면 거둬들인 농산물 대금으로 그동안 당겨쓴 돈을 되갚는 방식이다. 이자와 금융비용은 지자체에서 지원한다.

전남 순천시 해룡면 들녘에서 농민들이 농기계를 이용해 모내기를 하고 있다. / 연합뉴스

전남 순천시 해룡면 들녘에서 농민들이 농기계를 이용해 모내기를 하고 있다. / 연합뉴스

최소 20만원에서 최대 100만원 안팎
이씨의 집은 벼농사와 함께 비닐하우스를 이용한 시설원예도 같이한다. 시설원예야 출하가 끝나면 그때그때 대금을 받을 수 있지만, 11월이 돼야 수확한 쌀이 돈이 돼 돌아오는 벼농사는 한창 농사철에는 자금 융통이 쉽지가 않다. 이 점에 주목해 화성시는 벼농사 농민들부터 먼저 농업인 월급제를 시행했다. 지난해부터는 농업생산 전 품목으로 정책 범위를 확대했다. 이씨의 아버지도 농업인 월급을 신청해 다달이 지원금을 받았고, 본격적으로 농사를 시작한 아들에게 품삯처럼 준 셈이다. 이씨는 “도시에서 버는 돈이 액수는 좀 더 많아도 어차피 나가는 지출도 크고 안정적이지 않기 때문에 농촌에서 사는 게 싸게 먹히긴 한다”며 “아버지 이름 말고 내 이름으로 지원을 신청할 자격이 될 때까지 일단은 농사를 지어볼 생각”이라고 말했다.

월 단위 지급형 농가대출, 쉽게 표현해 ‘농업인 월급제’로 불리는 농가 지원정책을 도입하는 지자체가 올해 들어 늘어나고 있다. 2012년 최초로 도입한 화성시에 이어 전남 순천시가 그 뒤를 이었고, 올해부터는 전남 나주시, 전북 임실군, 전북 진안군 등도 이 제도를 시행하거나 도입을 준비 중이다. 농민의 농업규모에 따라 매월 지급되는 액수는 달라지는데, 최소 20만원에서 최대 100만원 안팎까지 지원금을 받을 수 있다. 이에 따라 수확기에 소득이 몰리는 탓에 영농자금이 필요할 때마다 대출을 받으면서 일상적인 생활자금마저 쪼들리던 악순환을 다소나마 멈출 수 있게 되었다.

농가에 지원되는 금액이 그닥 커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지난해 기준 전국 농가의 평균 농업소득이 1030만원에 불과하다는 점을 감안하면 농민들이 피부로 느끼기에는 적지않은 액수인 셈이다. 농업소득이 전체 농가소득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9.5%에 불과했다. 지난해 농가당 평균 농업 외 소득이 1479만원일 정도로 농촌에서조차 농업으로 버는 돈보다 그밖의 방법으로 더 많은 돈을 벌어들이는 게 현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농업인 월급제가 자금경색이 점차 심해지는 농촌과 농민을 지원하는 대안으로 지목되고 있는 것이다.

광역지자체 가운데에서는 강원도가 최초로 월급 형태의 귀농 정착지원금 제도를 올해부터 시행했다. 화성·순천시 등의 농업인 월급제가 일종의 선대출 방식이었던 데 비해 강원도의 정착지원금 제도는 월급의 원래 의미와 더 가깝다. 20~45세의 비교적 젊고 농업 기반이 없는 농업인에게 생활에 필요한 최소한의 경제적 지원이 있어야 한다는 판단에서 나온 정책이다. 첫해에는 달마다 80만원, 이듬해에는 50만원씩을 지원받게 된다.

“청년층 기본소득제 도입도 검토해야”
귀농·귀촌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서 각 지자체들이 귀농·귀촌 정착지원금 제도를 경쟁적으로 내걸었지만 정책의 사각지대가 적지 않다는 지적도 잇따랐다. 대부분의 정책이 농촌에서 농사를 짓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경제적 기반조차 갖추기 어려운 청년층에게는 그림의 떡이라는 허점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농사 지을 땅은 물론 시설·설비와 농업용 기계, 초기 영농자금 등을 갖추고 농사를 시작해야만 지원금이 나오는 방식 때문에 소규모 영농으로 시작하려던 소자본 귀농인들의 현실과는 동떨어진 부분이 많았다. 강원도청 관계자는 “귀농 연령대에 따라 농업규모가 차이 나는 것을 보고 상대적으로 영농규모가 영세할 수밖에 없는 45세 이하 연령대에 중점을 맞춘 지원이 필요하겠다고 판단해 월급형 지원금 제도를 도입했다”고 밝혔다.

청년층의 실업·고용문제와 소득 저하로 공동화되고 있는 농촌문제 양쪽 모두에서 효과가 나타난다는 점 때문에 농민·지역단체는 농업인 월급제를 보다 적극적으로 도입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가까운 일본에서는 청년층의 귀농을 장려하려 도입한 직불금 형태의 지원정책이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2012년부터 한 해에 150만 엔(한화 약 1414만원)씩 최대 7년 동안 1050만 엔을 지급해 농촌·농업 공동화를 막겠다는 정책이 시행됐다. 농사를 짓는 45세 미만자라면 신청이 가능하기 때문에 청·장년 농업인에게 초점을 맞춘 기본소득 정책의 일환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때문에 장기적으로는 농업인을 위한 기본소득을 보장하는 방향으로 정책이 확장될 필요가 있다는 연구 결과까지 나온다. 농어촌지역의 고령인구 비중이 더 높아지면서 2020년이 되면 부양인구 대비 피부양인구 비율은 38.9%까지 치솟을 것으로 추정된다. 충남연구원 박경철 책임연구원은 “한국의 농정예산 대비 직불금 비중은 10.2% 수준으로, 일본의 34.2%, 유럽연합(EU)의 76%보다 턱없이 낮은 수치”라며 “기본소득제 도입은 지역별로는 낙후된 농어촌지역 주민부터 도입하는 것을 검토할 수 있다”고 밝혔다.

정부의 귀농 유도정책 역시 농업인 월급제를 거쳐 단계적으로 농어촌 기본소득까지 도입되면 보다 탄력을 받을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일자리 문제로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는 청년층을 중심으로 농어촌 기본소득이 제공되면 기존 노동시장에 주는 충격 없이 귀농이 촉진될 수 있다는 것이다. 정기석 마을연구소 소장은 “청년층에게 농업인 월급, 나아가 기본소득까지 지원하면 그 돈으로 모든 지출을 감당하지는 못하더라도 훨씬 안정적으로 영농을 포함한 다양한 경제활동을 시도할 수 있게 된다”며 “무엇보다 정부로부터 외면받기만 하던 청년층이 정부와 지역사회를 신뢰할 수 있는 계기가 만들어진다”고 말했다.

<김태훈 기자 anarq@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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