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안-흉노를 제압한 한나라 곽거병, 그를 기리는 ‘마답흉노’ 석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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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답흉노 석상에 나타난 말과 흉노의 기묘한 모습은 한나라의 승리를 상징하는 것이다. 타자의 분신을 자기화하는 것만큼 완벽한 승리는 없을 터, 이 석상은 곽거병의 공적과 한나라의 권위에 대한 최고의 찬가다.

열여덟에 부대장, 스물에 장군, 스물둘에 장관, 스물넷에 사망. 다름 아닌 한나라 때의 곽거병(B.C. 140~117) 이야기다. 그는 열여덟(B.C. 123)에 표요교위(驃姚校尉)로 임명돼 몽골고원 대사막 남쪽에서 흉노를 격파했다. 스물에는 표기(驃騎)장군이 돼 간쑤·닝샤·산시(陝西) 일대의 흉노 세력을 잇달아 공격하여 눈부신 전공을 세웠다. 스물둘에는 고비사막을 건너 흉노의 본진을 공격해 큰 전공을 세움으로써 대장군 위청(衛靑)과 더불어 대사마(大司馬·국방부장관 격)가 됐다.

그리고 스물넷, 젊은 영웅 곽거병은 돌연 사망하고 만다. 전장에서 죽은 것도 아니다. 죽음의 원인에 대한 믿을 만한 기록조차 없다. <사기(史記)>에서는 다만 이렇게 말하고 있다. “표기장군은 원수(元狩) 4년에 출정하고서 3년째 접어든 원수 6년에 세상을 떴다. 천자가 그의 죽음을 애도하며 속국의 현갑군(玄甲軍)을 동원해 장안에서 무릉(茂陵)까지 늘어서도록 했으며, 기련산(祈連山)을 본떠 분묘를 만들도록 했다. 그에게 시호를 내리길, 용맹함으로 영토를 넓혔다는 의미에서 경환후(景桓侯)라고 했다.”

곽거병 무덤 앞의 ‘마답흉노’ 석상

곽거병 무덤 앞의 ‘마답흉노’ 석상

한나라의 숙적이었던 흉노
장안에서 무릉까지 40여㎞나 되는 거리에 철갑 무장병이 죽 늘어서는 장관을 연출할 정도로 곽거병의 공적이 컸고 그에 대한 무제의 정이 깊었다. 무제는 자신이 묻힐 능 옆에 곽거병의 무덤을 두도록 했다. 기원전 139년부터 기원전 87년까지 무려 반세기가 넘게 조성된 무릉의 사방에는 비빈과 공신과 궁녀의 배장묘가 분포해 있다. 그 가운데 가장 돋보이는 건 곽거병의 무덤이다. 누군가는 평생을 바쳐도 이룰 수 없는 공적을 너무도 젊은 나이에 성취한 곽거병, 그는 죽어서도 남다르다. 16개의 거대한 석상이 그의 무덤을 지키고 있기 때문이다. 호랑이·곰·코끼리·멧돼지·소·말·두꺼비·개구리·물고기 등 다양한 석상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마답흉노(馬踏匈奴)’ 석상이다.

말과 흉노, 그야말로 잘 어울리는 조합이다. 유목기마민족인 흉노에게 말은 분신과 같은 존재 아닌가. 그런데 마답흉노 석상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떠올리는 양자의 이미지에서 아주 많이 어긋나 있다. 달리는 말 위에서 활을 쏘고 있어야 할 흉노가, 말 아래 깔린 채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쓰는 모습이다. 왼손에는 활을 오른손에는 화살을 쥐고 있는 덥수룩한 수염의 이 남자, 이를 악물고 눈알은 튀어나올 듯하다. 죽기 살기로 발버둥치지만 결코 벗어날 수 없다. 정말 어처구니없는 형상이다. 말 위의 기마민족이 이렇게 말 아래 깔려 있다니!

높이 1.68m 길이 1.9m의 이 화강암 석상은 흉노와 한나라의 관계 전환을 극명히 반영하고 있다. 그 과정을 간단히 살펴보자. 일찍이 진시황은 장성을 쌓는 등 강성한 흉노를 늘 경계했다. 기원전 210년 진시황의 죽음으로 중국은 혼란에 빠진 반면, 이듬해 흉노에서는 묵특이 선우(單于)가 돼 북방 초원지대를 통일해나갔다. 이어서 중국에서도 유방(劉邦)이 항우(項羽)와 4년 동안 벌인 초한지쟁(楚漢之爭)에서 승리를 거두고 기원전 202년에 황제로 즉위한다. 그리고 기원전 200년, 한 고조 유방과 흉노의 묵특선우가 평성(平城)에서 맞붙게 된다. 이때 고조는 흉노에게 포위된 채 백등산(白登山)에서 일주일 동안 꼼짝없이 갇혀 있다가, 묵특선우의 아내에게 몰래 뇌물을 써서 겨우 목숨만 건져 장안으로 도망쳤다. 이 사건이 있은 이후로 한나라는 황실의 여인을 선우에게 바치고 해마다 비단·쌀·솜 등을 흉노에게 바쳐야 했다. 덕분에 흉노와의 큰 전쟁을 피할 수 있었던 한나라는 무제가 즉위할 즈음엔 곳간이 가득 차고 재물이 남아돌았다.

1914년에 빅토르 세갈렌이 촬영한 곽거병 무덤.

1914년에 빅토르 세갈렌이 촬영한 곽거병 무덤.

기련산을 본떠 만든 곽거병의 무덤
기원전 141년, 열여섯에 즉위한 무제는 흉노와의 굴욕적인 화친관계를 끝장내고자 했다. 넘쳐나는 재원과 젊디젊은 황제의 의지, 한나라와 흉노의 관계는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 수밖에 없었다. 마침 흉노가 월지의 왕을 죽이고 그 두개골을 술잔으로 삼자 월지가 흉노를 원수로 여긴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무제는 월지와 연합해 흉노를 치고자 했다. 이때 월지와의 동맹을 책임지겠다고 나선 이가 장건(張騫)이다. 기원전 139년, 장건은 100여명의 사절단을 이끌고 장안을 출발한다.

장건도 무제도 그 누구도 상상조차 못했을 것이다. 장건이 도중에 흉노에게 붙잡혀 10년 동안 억류되리라는 것을, 겨우 도망쳐 월지에 도착했건만 월지는 더 이상 흉노와 싸울 생각이 없어졌다는 것을, 허망하게 한나라로 돌아가는 길에 또다시 흉노에게 잡히리라는 것을. 마침내 탈출에 성공한 장건이 장안으로 돌아온 건 기원전 126년. 동맹 체결은 실패로 끝났지만 그가 가지고 온 귀한 정보는 서역을 개척하겠다는 무제의 의지를 불태웠다. 서역으로 통하는 하서주랑(河西走廊) 일대를 장악하려면 흉노와의 일전은 불가피했다.

무제는 위청을 대장군에 임명한 기원전 124년부터 막대한 병력을 동원해 흉노 토벌에 나섰다. 이때 혜성처럼 등장해 외삼촌 위청보다 빛나는 전공을 세운 이가 곽거병이다. 특히 그의 스물은 실로 대단했다. 봄·여름·가을에 잇달아 출병한 그는 흉노의 여러 왕을 죽이거나 사로잡거나 투항하게 함으로써 흉노의 기반을 뒤흔들었다. 이 해에 그가 공격한 지역에는 언지산(焉支山)과 기련산(祁連山)이 포함돼 있었는데, 이와 관련해서 흉노에는 슬픈 노래가 전해졌다. “우리의 기련산을 잃어 우리의 가축이 번식할 수 없게 되었네. 우리의 언지산을 잃어 우리 여인들의 얼굴빛이 사라지게 되었네.”(<서하구사(西河舊事)>) 언지산은 연지산이라고도 하는데, 이곳에서 자라는 화초의 붉은 즙이 연지로 사용된 데서 유래한 명칭이다. 기련은 흉노어로 하늘을 의미한다. 기련산은 바로 ‘천산’이라는 뜻이다. 그만큼 흉노에게는 중요한 곳이었다. 삶의 근거지를 잃게 된 흉노의 슬픔이 앞의 노래에 담겨 있는 것이다. 한편 한나라 입장에서는 기련산에서 흉노를 몰아낸 건 하서주랑 일대의 영유권을 확보하게 된 쾌거였다. 곽거병의 무덤이 기련산을 본떠 만들어진 이유는 바로 이것이다.

비림박물관의 ‘대하석마’

비림박물관의 ‘대하석마’

명마를 갈구한 무제와 장안의 대하석마
마답흉노 석상은 기련산 모양의 곽거병 무덤과 어우러져야만 그 의미가 오롯이 살아난다. 오늘날 곽거병 무덤 앞의 석상들은 질서 있게 정돈돼 있지만 원래의 배치는 이와 달랐다. 프랑스 작가 빅토르 세갈렌(Victor Segalen)이 1914년에 촬영한 사진은 석상들의 원래 배치를 짐작케 해준다. 해군의 견습 통역원 신분으로 중국에 들어와 지내던 그는 진나라와 한나라의 무덤 조각예술과 관련된 고고 탐사 임무를 수행하다가 곽거병의 무덤에 있는 석상들을 발견하고 사진으로 남겼다. 사진을 보면 마답흉노 석상은 곽거병의 무덤 바로 앞에 있고, 나머지 석상들은 여기저기 무질서하게 배치돼 있다. 기련산 모양의 무덤과 일련의 석상들은 바로 한나라의 손에 들어온 옛 흉노의 세계를 구현한 것이다. 마답흉노 석상에 나타난 말과 흉노의 기묘한 모습은 한나라의 승리를 상징하는 것이다. 타자의 분신을 자기화하는 것만큼 완벽한 승리는 없을 터, 이 석상은 곽거병의 공적과 한나라의 권위에 대한 최고의 찬가다.

마답흉노 석상은 ‘좋은 말’에 대한 무제의 갈망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월지와 동맹을 맺기 위해 떠났다가 13년 만에 돌아온 장건은 무제에게 서역 여러 나라에 관한 정보를 제공한다. 그 중에서 유난히 무제가 관심을 보인 것은 대완(大宛·페르가나)의 말, 즉 피와 같은 땀을 흘린다는 한혈마(汗血馬)다. 유목민족과 싸워 이기려면 궁극적으로 그들보다 앞선 장비 즉 우수한 말이 필요했다. 한혈마를 손에 넣기 위한 조치가 이뤄진 건 한혈마의 정확한 산지를 알게 되면서다. 장건이 서역에 사신으로 갔던 경력으로 출세하자 그 이후 많은 지원자가 나섰고 무제는 그들을 계속해서 서역으로 파견했다. 이렇게 해서 서역과 더 많은 교류가 이루어졌고, 마침내 한혈마의 정확한 산지까지 알게 된다. 대완의 이사성(貳師城)에서 좋은 말이 난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무제는 사신을 보냈다. 그런데 대완은 말을 주지 않은 것은 물론, 사신을 죽이고 재물까지 약탈했다. 이에 무제는 기원전 104년, 이광리(李廣利)를 이사장군에 임명해 대완을 치게 한다. 이사장군의 명칭에는 이사성에 가서 좋은 말을 빼앗아 오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이광리는 우여곡절 끝에 수십필의 좋은 말과 중등 이하의 3000필을 가지고 장안으로 돌아온다. 이때 무제는 ‘천마(天馬)’가 왔다며 기뻐했다.

한혈마로 추정되는 도금 청동말. 무릉박물관 소장

한혈마로 추정되는 도금 청동말. 무릉박물관 소장

무제가 그토록 갈망했던 한혈마는 대체 어떤 모습일까? 1981년 무릉의 배장묘 가운데 하나인 평양(平陽)공주 무덤 남쪽에서 도금 청동말이 출토됐는데, 이것이 바로 한혈마를 모델로 한 것이라 추정된다. 평양공주는 무제의 누이이자 위청의 아내로, 고고학자들은 이 도금 청동말이 무제의 하사품일 것이라고 추측한다. 곽거병 무덤 앞에 세워진 무릉박물관에 소장돼 있으니, 이곳에 들르면 놓치지 말고 꼭 찾아보길 바란다.

마답흉노 석상을 보는 순간 시안 비림박물관에 있는 ‘대하석마(大夏石馬)’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그만큼 두 말의 모습이 유사하다. 그런데 대하석마는 마답흉노 석상과 전혀 다른 맥락에 있다. 대하석마의 앞다리 사이에 새겨진 문장 중에는 “대하진흥육년(大夏眞興六年)”이라는 구절이 있는데, 바로 424년에 해당한다. 대하의 연호를 쓰고 있으니 분명 대하의 유물이다. 오호십육국의 하나인 대하는 흉노 출신 혁련발발(赫連勃勃)이 407년에 세운 나라다. 418년에 그는 장안을 차지하고 황제라 칭했으며, 맏아들 혁련궤(赫連潰)에게 군대를 주둔시켜 장안을 지키도록 했다. 이후 431년에 대하를 멸망시킨 건, 탁발선비가 세운 북위(北魏)의 속국 토욕혼(吐谷渾)이다.

높이 2m, 길이 2.25m의 대하석마는 한족이 자신의 안방인 장안조차 지킬 수 없었음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다. 500여년 전 마답흉노 석상의 상징은 여기서 또다시 전복되고 있다. 흉노의 분신인 말을 자기화하고자 했던 무제의 꿈은 그야말로 일장춘몽이었다.

바로잡습니다.
1137호에 실린 ‘이유진의 중국 도읍지 기행’에서 사진설명이 잘못 기재돼 바로잡습니다. 왼쪽에서 두 번째 사진이 ‘비림박물관 석각예술실의 소릉육준’, 세 번째 사진이 ‘삽로자, 펜실베이니아 대학 박물관 소장’, 네 번째 사진이 ‘권모왜, 펜실베이니아 대학 박물관 소장’ 입니다.

<연세대 인문학연구원 연구원>

이유진의 중국 도읍지 기행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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