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운동 영욕의 사반세기 전성기 돌아올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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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경실련 창립으로 한국시민운동 태동… ‘시민운동 정치 참여’ 평가 엇갈려

“우리 사회에는 두 개의 계급만이 존재하게 되었다. 하나는 주택 소유계급이고 다른 하나는 무주택계급이다. 우리는 이러한 경제적 부정의와 망국적 불로소득의 척결 없이는 한 발짝도 민주주의와 통일을 향해 나갈 수 없다고….” 1989년 7월 8일.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 발기인대회에서 낭독된 발기취지문 중 일부다. 어떻게 보면 선동적이다. 하지만 전통적인 계급인식과는 다르다. “국민적 합의에 기초한 운동, 비폭력 평화 방식의 실사구시 운동.” 발기취지문에서 경실련이 내놓았던 운동방식과 전략이다.

시민단체 활동은 여전, 영향력은 위축
한국에서 시민운동은 1989년 창립한 경실련을 그 기원(起源)으로 보는 경우가 많다. 시민운동정보센터가 지난 7월 초 펴낸 <한국시민사회운동 25년사 1989~2014>의 서술구조도 경실련의 출범을 한국 시민운동의 출발점으로 보고 있다. 정확히는 올해로 만 26년이다. 1994년 창립한 참여연대의 설립과정에서 주체들이 “우리가 지향하는 것은 좌실련, 즉 보다 왼쪽에 있는 경실련”이라고 설명했던 것처럼 경실련의 주창 내용과 운동방식은 기존 한국 사회운동의 방식을 바꿨다. 경실련의 발기취지문 등은 앞서 <시민사회운동 25년사>에 부록으로 실린 경실련 25년 평가와 전망 문서에 실려 있다.

7월 9일 오전 대학로 경실련 강당. 메르스 유족들이 정부, 지자체, 병원을 상대로 낸 피해손해배상 청구 공익소송과 관련한 기자회견을 열었다. 신현호 변호사, 김진현 경실련 보건위원장, 고계현 사무총장 등이 배석한 이날 기자회견에서 유족들과 경실련 측은 “국가나 지자체가 감염병 예방 감시의무를 소홀히 했다”고 주장했다. 경실련은 6월부터 국가배상 집단소송 원고단을 공개모집했고, 이번 메르스 사태 유족 세 가족이 연락을 취해와 기자회견이 이뤄진 것이다. 경실련은 2013년 12월 철도파업 당시에도 코레일 측과 정부, 그리고 노조 측의 중재자 역할을 자임해 대화를 이끌어내기도 했다. 나름대로 공익적 역할을 계속해온 것이다.

7월 9일, 경실련이 서울 동숭동 경실련 강당에서 메르스 사태 피해자들의 손해배상청구 관련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시민운동의 영향력이 감소했다는 평가에도 불구하고 시민단체의 공익적 활동은 계속되고 있다./ 강윤중 기자

7월 9일, 경실련이 서울 동숭동 경실련 강당에서 메르스 사태 피해자들의 손해배상청구 관련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시민운동의 영향력이 감소했다는 평가에도 불구하고 시민단체의 공익적 활동은 계속되고 있다./ 강윤중 기자

그럼에도 시민단체의 영향력은 이전에 못 미친다는 평가를 받는다. 시민운동의 위기. 이것은 기자가 기자생활을 처음 시작한 1990년대 말부터 계속 들어왔던 말이다. 그렇다면 ‘위기가 아니었던 때가 있을까’ 질문을 해볼 필요가 있다. 거꾸로 말해, 시민운동의 전성기는 언제였을까. “1993년 무렵 당시 시사잡지 <시사저널>이 매년 ‘누가 한국을 움직이는가’라는 전문가 대상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당시 재야나 학생세력, 군부를 제치고 시민운동이 등장한 것을 두고 ‘경실련, 군보다 세다’라고 기사의 제목을 뽑았는데, 그때가 절정이었다고 본다.” 경실련 정책실장을 지낸 하승창 아이쿱 생협 사외이사의 말이다.

최근 <나의 시민운동 이야기>라는 시민운동사 책을 펴내기도 했다. 경실련에 들어가기 전에는 노동운동을 했다. 노동운동 조직사건(삼민동맹사건)으로 복역하고 출소한 뒤 주변의 권유로 경실련에 상근활동가로 들어갔다. “개인적인 관심에 따라 움직인 것이었다. 들어온 사람들도 대부분 제각각의 고민이 있었던 것으로 안다. 기존의 운동방식이나 이념으로 세상을 바꾼다고 하기에는 한계가 뚜렷했고, 경실련과 같은 대중적 활동의 성과가 돋보이는 때였으니….”

학생운동이나 노동운동 그룹이 참여의 한 축이었다면 지식인 그룹도 한 축이었다. 흔히 학현사단이라고 불리는 변형윤 서울대 명예교수 인맥이 주축이었다. 강철규 전 부패방지위원회 위원장, 박세일 서울대 명예교수, 이근식 서울시립대 명예교수, 이각범 한국미래연구원 원장 등이 주도했다. 여기에 기독교 쪽의 손봉호 고신대 석좌교수와 불교계의 송월주 스님 등 종교계 인사가 결합했다. 활동가 축의 중심은 서경석 나눔과 기쁨 상임대표였다.

1990년대부터 본격화된 시민운동의 전성기는 2000년 총선시민연대 활동으로 정점을 찍었다. 당시 참여연대 사무처장이었던 박원순 변호사는 총선시민연대의 공동대표로 전국적으로 이름을 알렸다. 2002년 대선에서 당선된 노무현 대통령은 ‘참여정부’를 표방하며 시민사회와의 거버넌스를 주요 정책지표로 제시했다. 그리고 오랜 침체기. ‘시민운동의 위기’라는 말로 표상된 시민운동을 둘러싼 상황의 변화는 “온라인을 매개로 등장한 다른 흐름, ‘노사모’가 태동한 2002년부터였다”고 하 이사는 말한다. 2004년과 2008년 촛불시위를 거치면서 새로운 아래로부터의 자발적인 흐름들이 확연하게 드러났지만, ‘위기’는 종전 단체들이 그 흐름을 캐치하지 못하고 변하지 못해 가속화됐다고 설명했다.

“시민운동이든 학생운동이든 운동진영의 한계를 돌파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가 아니었나 싶다. 정치가 아니었다면 (종전의 시민사회 출신들이)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데가 있었는지 회의도 든다.” 박신용철 서울시의회 전문위원의 말이다. 그 역시 경실련 상근간사 출신이다. 국회 보좌관으로 갔다가, 현재의 길을 걷고 있다. 박 위원은 덧붙였다. “엄밀히 말해 시민운동이 잘해서 시민정치 영역이 확장됐다기보다 우연히 시대적인 흐름이 맞아떨어진 것 같다.” 민중운동이 한계를 보여 시민운동으로 사회운동의 방식이 바뀌었고, 다시 시민운동의 한계로 대두된 것이 이른바 ‘시민정치’, 시민사회운동 출신들의 정치 진출이라는 말이다.

7월 9일, 경실련이 서울 동숭동 경실련 강당에서 메르스 사태 피해자들의 손해배상청구 관련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시민운동의 영향력이 감소했다는 평가에도 불구하고 시민단체의 공익적 활동은 계속되고 있다. / 경향자료 사진

7월 9일, 경실련이 서울 동숭동 경실련 강당에서 메르스 사태 피해자들의 손해배상청구 관련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시민운동의 영향력이 감소했다는 평가에도 불구하고 시민단체의 공익적 활동은 계속되고 있다. / 경향자료 사진

박원순 서울시장 대선에 출마한다면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다. 시민사회 출신 박원순 서울시장은 “서울시 시정에 집중하겠다”고 말하고 있지만, 정치권과 시민사회 내외에서는 그를 유력 차기 대권주자로 꼽는다. 서울시장 재·보궐선거에서 극적으로 출마를 결심하는 과정에서 그의 주변에 모인 시민사회 출신 인사들이 보여준 결집력 등으로 미뤄 본다면, 만약 이후 박 시장이 집권하게 되면 다시 시민단체의 제2 전성기가 열릴 수도 있을까. 익명을 요청한 한 시민운동단체 출신 인사는 이렇게 말했다. “김대중·노무현 정부 10년과 이명박·박근혜 정부 8년, 그리고 다시 박원순 서울시장의 경험에서 어찌됐던 간에 진보정권이 들어서야 시민사회도 살 길이 있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게 됐다.” 시민사회 활성화를 위해서라도 시민사회에 친화적인 정권이 들어서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지난 보수정권의 집권을 통해 깨닫게 됐다는 것이다.

지난 7월 초, 경실련이 창립한 1989년부터 2014년까지의 시민운동 역사를 정리해 나온 <한국시민사회운동 25년사> / 시민운동정보센터

지난 7월 초, 경실련이 창립한 1989년부터 2014년까지의 시민운동 역사를 정리해 나온 <한국시민사회운동 25년사> / 시민운동정보센터

시민정치를 표방한 박원순 서울시장 이전부터 시민단체 출신 인사들의 정·관계 진출은 있었다. 경실련 태동기인 문민정부 시기부터 경실련 출신 인사들이 정권에 들어갔다. 문민정부에서 핵심 역할을 한 박세일, 이각범 교수가 그렇다. 국민의정부와 참여정부에서도 경실련 출신인사들이 포진했다. 김태동 성균관대 교수, 초대 금융감독위원회 부위원장을 역임한 윤원배 숙명여대 학장, 이진순 숭실대 교수 등도 경실련 출신이다. 참여정부 시기에는 강철규 부패방지위원회 위원장, 김병준 대통령비서실 정책실장 등이 경실련 출신이다. 경실련 출신의 정·관계 참여는 MB정부 시기에도 이어졌다. 사무총장을 역임한 박병옥, 그리고 김혜경, 위정희 국장이 청와대에 들어갔다. MB정부 시기의 박병옥 전 청와대 시민사회비서관 등은 앞서 경실련 출신 인사들과 경우가 다르다. 앞의 인사들이 주로 교수·전문가그룹인 데 비해 이들은 활동가 출신이다. 박 비서관은 시민사회비서관을 역임한 후 지난해 말까지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상임감사를 역임했다. 역시 청와대 행정관을 지낸 위정희 전 경실련 국장은 송파에서 지역활동을 벌이다 지난해부터 나눔국민운동본부에서 교육센터장으로 시민사회에 복귀했다.

“정치권이나 관계로 진출한 시민사회 출신 인사들은 개인적으로 이해하지만 지난 25년을 돌이켜보면 현실정치와 무관하게 자신의 목소리를 내온 섹터가 존재해 왔는데, 그것도 주로 한 쪽(현 야권)으로만 참여하니 그 이미지가 단체활동을 덮어버리는 것이 문제다.” 고계현 경실련 사무총장의 말이다. 그는 “시민단체의 정치적 중립성은 여전히 유효한 테제”라고 말했다.

이미 1990년대부터 경실련 출신 인사들의 정치참여로 후유증을 앓은 경실련은 시민사회 영향력의 정점을 찍은 2000년 총선시민연대 활동에 참여하지 않았다. 선거 감시와 참여 등을 강조한 공명선거실천시민협의회(공선협) 활동에만 주력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실련 운동의 ‘정체기’는 현재진행형이다. 앞의 <한국시민사회운동 25년사>에 실린 경실련 평가와 전망 문서에는 1998년부터 2008년까지를 ‘회복기’로, 다시 2008년 3월부터 현재까지를 ‘정체기’로 평가하고 있다. 고 총장은 “학생운동이나 노동운동 출신 활동가들이 들어왔던 과거에는 ‘준비된’ 활동가인 경우가 많았던 데 비해, SNS와 온라인이 활성화되면서 자발성에 근거한 20대 활동가들은 아무래도 ‘조직적 훈련’이 부족한 것이 사실”이라며 “특히 활동가의 재생산 위기는 지방으로 갈수록 심각하다”고 덧붙였다.

물론 이런 평가에 모두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하승창 이사는 “기존 인물 흐름만 쫓아가면 정치권으로 건너간 경우만 눈에 띄겠지만, 새로운 인물을 보면 새로운 영역이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 보일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역시 정치권에서의 흐름이지만 조성주 같은 인물이 주목을 받는 것은 청년유니온이라는 새로운 흐름이 나오고 있기 때문”이라며 “스스로 주거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온 민달팽이유니온처럼 협동조합운동과 같은 흐름은 아직 참여연대나 경실련과 같은 정치적으로 대표할 만한 단체가 눈에 안 띄어서 그렇지 사회적으로는 이미 꽤 성장한 수준”이라고 덧붙였다.

“시민사회 영역, 오히려 확장됐다”
박상필 한일장신대 NGO대학원 연구교수는 “어느 나라든 시민운동의 발전 궤적을 살펴보면 주축이 어드보커시, 즉 주창형 시민운동 활동에서 서비스 생산활동으로, 서비스 생산활동에서 다시 대안사회운동으로 넘어가는 경향이 있다”며 “미국이나 일본에서도 그런 유형을 보였고, 한국도 박원순 서울시장이 참여연대를 나와 아름다운가게와 재단, 희망제작소를 만든 2005년 무렵에 그 중심이 서비스 생산활동으로 넘어갔다가 현재는 다시 대안사회운동으로 넘어가는 중”이라고 말했다. 박 교수는 “그럼에도 진보·보수 정권의 성격에 따라 시민운동도 영향을 받는 것은 무시할 수 없는 변수”라며 “3년마다 한국 민간단체를 전체적으로 조사해 왔는데, 보수정권의 등장으로 시민사회 영역이 위축된 면은 있지만, 그러나 시민사회 영역 자체가 줄어든 것은 아니고 오히려 늘어났다”고 말했다. 박 교수는 그럼에도 시민사회가 위축된 데에는 보수정권의 집권 이외에도 지식인 집단의 참여가 줄어든 이유도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대학가에서 대학평가가 도입되면서 양적평가 위주의 교수 평가가 제도화되면서 실적에 집착하다 보니 과거와 같은 사회참여 활동에 힘을 돌릴 여력이 사라지게 됐다. 그런 측면에서 한국 시민운동을 특징지었던 전문가와 현장활동가의 결합이라는 모델이 급격하게 위축된 것은 사실”이라고 덧붙였다.

<정용인 기자 inqbu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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