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그리스의 ‘오히’

이대론 못살겠다는 ‘국민의 저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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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축경제에 지친 서민층이 신자유주의에 대해 반발한 ‘민주주의의 진전’

“스스로를 규제하는 시장이라는 아이디어는 한마디로 완전히 유토피아다. …인간은 그야말로 신체적으로 파괴당할 것이며 삶의 환경은 황무지가 될 것이다. 따라서 사회는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오스트리아 출신의 경제학자 칼 폴라니의 <거대한 전환>은 서두에서부터 국제경제를 장악한 시장주의의 위험성을 경고한다. 1944년의 이 경고는 70년 뒤 유럽에서 다시 한 번 재현된다. ‘하나의 화폐’를 바탕으로 ‘하나의 시장’을 형성한다는 유로화 경제권에 대한 기대는 그야말로 유토피아적 희망이 될지도 모르는 위기에 처했다. 황무지가 된 삶의 환경에 지친 그리스 국민들이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오히(OXI·반대)’를 선택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에 반대 움직임 곳곳에서 꿈틀
그리스 국민들은 지난 5일 긴축정책을 더 연장하는 데 대해 ‘오히’로 응답했다. ‘트로이카 채권단’이라 불리는 유럽연합(EU)과 유럽중앙은행(ECB), 국제통화기금(IMF)의 협상안 내용에 대해 찬반을 묻는 국민투표에서 박빙을 보일 것이라는 예상을 깼다. 반대가 찬성을 20%포인트 이상 앞섰다. 국민투표를 제안한 알렉시스 치프라스 총리와 시리자 정권은 국내의 정치적 지지를 뒤에 업고 향후 협상에 나설 수 있게 됐다.

“시장이나 국가, 양쪽에서의 압력에 맞서 사회라는 공간을 지키려는 움직임에 주목한 것이 칼 폴라니의 시각인데, 이번 그리스 국민투표의 ‘오히’도 국민들이 스스로의 삶을 지키기 위해 나선 결과였다.” 정태인 칼폴라니사회경제연구소 소장은 ‘오히’라는 결과가 사회적 차원에서는 주목할 만한 사건이라고 보았다. 정 소장은 “스페인의 급진정당 포데모스도 부채 탕감을 내걸고 높은 지지율을 얻고 있는 등 유럽 곳곳에서 지금까지의 자본주의에 반대하는 움직임이 다시 꿈틀거리고 있다”며 과거 미국의 월가를 넘어서 전 세계로 파급된 ‘점령’ 시위와 같은 흐름을 발견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리스의 알렉시스 치프라스 총리가 국민투표를 이틀 앞둔 7월 3일 아테네에서 채권단 협상안 반대 지지자들이 운집한 가운데 연설을 하고 있다. / AP연합뉴스

그리스의 알렉시스 치프라스 총리가 국민투표를 이틀 앞둔 7월 3일 아테네에서 채권단 협상안 반대 지지자들이 운집한 가운데 연설을 하고 있다. / AP연합뉴스

그리스를 넘어서 유럽의 좌파·진보진영은 ‘오히’의 결과를 ‘반긴축정책’을 넘어 ‘민주주의’의 진전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스페인 포데모스를 이끌고 있는 파블로 이글레시아스는 가디언에 “그리스 국민들은 다른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정부를 지지하겠다고 외친 것”이라며 “그리스는 변화를 선택했다”고 말했다. 미국의 진보 언론 커먼드림스는 “베를린 장벽 붕괴 이후 가장 중요한 정치적 사건”이라는 반긴축정책 운동가 폴 머피의 평가와 함께 “유럽 대륙 전체에 걸쳐 연쇄적 파급효과가 시작될 것”이라는 유럽 내 좌파진영의 목소리를 전했다. 독일 좌파당 의장 베른트 릭싱거 역시 “그리스 국민들이 언제나 상황을 악화시키기만 해온 긴축이라는 잘못된 처방에 ‘아니다’라고 외친 것”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디폴트 사태로까지 이어진 그리스의 경제위기를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구조적 문제로 해석하는 연구자들의 시각도 있다. 중심부를 이루는 선진자본주의 국가들이 경기 흐름에 따라 되돌아오게 마련인 불황과 경제위기를 주변부 국가들로 넘겨버린다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그리스 국민투표의 ‘오히’는 주변부 국가, 그리고 그 중에서도 가장 즉각적인 타격을 입는 서민층의 저항적 태도가 투표로 표출된 결과라 할 수 있다. “그리스 국민들이 그동안 긴축정책 때문에 겪은 고통을 일차적으로는 유로존의 중심부인 독일 탓으로 돌려왔다고 한다. 하지만 기존의 자본주의와는 다른 흐름을 내내 주장해온 시리자에 정권을 맡기고 이번 국민투표에서도 지지를 보낸 것을 보면 위기를 만성화시키는 자본주의 체제 전반에 대한 불만을 일관되게 표현한 걸로도 볼 수 있다.” 지주형 경남대 교수(사회학)는 투표 결과를 끊임없이 일어나는 경제위기의 피해를 전가시키는 신자유주의의 ‘위기의 원격화’에 대한 저항으로 해석했다.

위기의 원격화는 위기를 다른 경제권이나 다른 나라로만 파급시키는 것은 아니다. 한 나라 안에서도 현재의 위기를 다음 세대로 미뤄버리는 일이 반복된다. 그리스도 마찬가지였다. 구제금융 이전 17년 동안 재정적자가 이어진 그리스 경제는 이미 미래세대가 짊어질 부담을 미리 가불하는 식으로 유지돼 왔다. “유럽 안의 가장 약한 고리인 그리스, 그 중에서도 약한 서민층, 그리고 과거에는 미처 태어나지도 않았던 청년층이 가장 극심한 피해를 입기 때문에 그만큼 강하게 저항하는 것”이라고 지 교수는 지적했다.

이 긴축안이 본격적으로 그리스 국민들의 생활에 다가오기 시작한 때는 201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트로이카 채권단이 만성적인 재정적자에 시달리던 그리스에 1460억 유로의 구제금융을 제공하면서 빚을 진 그리스 정부와 국민들은 트로이카의 긴축정책을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5년 가까이 진행된 긴축은 혹독했다. 국내총생산(GDP)의 4분의 1가량이 줄었고, 지난해 말 실업률은 28%를 넘어섰다. 25세 이하 청년 실업률은 세 명 가운데 두 명은 일자리를 구하지 못할 정도로 혹독했다.

그리스의 채권단 협상안 수용에 대한 '반대'를 뜻하는 문구를 모자에 붙인 시위대가 7월 4일 호주 멜버른 의사당 앞에서 열린 집회에 참석하고 있다. / AFP연합뉴스

그리스의 채권단 협상안 수용에 대한 '반대'를 뜻하는 문구를 모자에 붙인 시위대가 7월 4일 호주 멜버른 의사당 앞에서 열린 집회에 참석하고 있다. / AFP연합뉴스

자본주의 체제 전반에 대한 불만 표현
자영업 중심의 관광국가인 그리스의 산업구조 탓에 문제는 더욱 심각해졌다. 상대적으로 대규모의 자본이 투입되는 제조업 사업장에 비해 자영업자와 소수의 고용 노동인력으로 구성된 소규모 사업장들은 긴축에 따른 경기침체에 더 큰 타격을 받았다. 더 이상 임금을 지급할 여력이 없는 소규모 사업장에서 직원들이 일자리를 잃으면 그들의 구매력에 기대고 있는 영세 자영업자들의 소득도 줄어든다. 결국 일자리 감소와 소득 저하의 악순환이 반복되며 실업률과 함께 영세 자영업자들이 퇴출되는 비율 역시 높아졌다.

정부의 재정지출에도 제한이 걸렸다. 연금과 의료급여가 줄어드는 것은 물론 임금삭감과 해고의 바람이 몰아쳤다. ECB가 유로화 통화정책을 주도하고 있어 그리스 국민은 낮아진 임금이 환율에 반영되기를 기대할 수도 없었다. 삶의 환경이 황무지가 돼가는 과정에서 서민들이 첫 번째로 택한 반응은 자살이었다. 그리스 테살라시아대학의 게오르게 라키오티스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긴축정책 시행 이후 2년 동안 자살률은 35%나 올랐다.

긴축이 현실의 삶을 극한까지 몰고간 것은 사실이지만 긴축의 효과가 나타난다고 볼 여지도 차츰 늘어나고 있었다. 임금이 떨어진 데다 공공부문에서의 인원 감축도 이어져 정부의 재정부담은 점차 줄어드는 양상을 보였다. 2010년 대비 2014년의 유로존 평균 단위 노동비용은 약 5% 올랐지만 그리스에서는 약 12% 떨어졌다. 그만큼 생산과 서비스에서의 가격경쟁력도 생긴 셈이다. 지난해에는 GDP가 0.8% 성장으로 돌아서며 경기회복 조짐도 보이기 시작했다.

국제채권단과 월가의 전망도 빗나가
채권단은 경기회복세라는 판단을 바탕으로 긴축 연장의 당위성을 주장했다. 시리자와의 협상 테이블에서 트로이카 채권단은 2018년까지 3.5%의 재정흑자를 달성한다는 안을 제시했다. 여전히 세수가 회복되지 않는 상황에서 정부 재정이 흑자 목표를 이루려면 연금 축소로 대표되는 긴축정책을 이어나가는 한편, 공공부문 민영화를 가속화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정교한 경제 통계자료를 제시하며 긴축을 주도한 채권단의 협상안에도 정치적 함의는 분명히 담겨 있었던 것이다. 조지프 스티글리츠 컬럼비아대 교수는 <프로젝트 신디케이트>에 기고한 글에서 채권단이 “결국은 그리스 정부를 괴롭혀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것과 배치되는 일을 받아들이도록 굴복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고 밝혔다. 트로이카 채권단이 그리스로부터 돈을 받아내기보다는 현 정권의 퇴진을 더 원하고 있다고 비판한 것이다. 스티글리츠 교수는 “유럽 국가 지도자들은 그동안 선진국이 불평등을 키워 온 정책들을 그리스 정부가 반대하는 현상, 그리고 고삐 풀린 금권을 통제하려는 현상을 불편하게 여기고 있다”며 시리자를 지지하는 그리스 국민의 결정을 국가간 불평등 문제에 대한 도전으로 해석했다. 영국의 텔레그래프도 “트로이카 채권단은 그리스와 협상을 하지 않으려는 것이 아니라 단지 시리자 정권과 협상을 하지 않으려는 것”이라며 “유로존에 잔류하면서도 긴축의 강도가 덜한 협상안을 바라는 그리스 정부와 국민의 희망은 이뤄질 가능성이 낮다”고 분석한 바 있다.

그리스 경제와 사회의 현실을 바라보는 시각차는 일반 대중과 채권단의 경제정책을 조정하는 전문가집단 사이에서 가장 극명하게 나타났다. 서민층이 현실에서 겪는 고통과는 달리 트로이카 채권단의 긴축안은 고도로 추상적인 경제이론에 기대고 있는 것이다. 긴축정책 수립의 주축 가운데는 미국 명문대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세계 최고 수준의 두뇌들인 IMF의 경제전문가들이 있었다. 다양한 경제권에 속한 구제금융 국가들을 상대로 정부 재정 긴축의 효과를 지켜봐온 IMF의 경제학자들에겐 그리스 역시 위기를 벗어나려면 긴축 외에 다른 답은 없었다. 이른바 ‘워싱턴 컨센서스’로 불리는 시장 중심, 정부 재정 축소 기조의 경기 대응 모델이 수많은 나라에 적용돼 온 만큼 그리스에서도 효과를 거두리라는 전제가 깔려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경제 엘리트들의 자신감은 그리스와 비슷한 시기에 같은 유로존 안에서 구제금융을 받았던 아일랜드의 예에서 극대화됐다. 아일랜드는 2008년부터 본격화된 금융위기와 그 해결과정에서 그리스와 함께 국가부채와 불평등지수가 급등한 나라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나 경제회복의 결과는 그리스와 달랐다. 2013년 12월 유로존에서는 처음으로 아일랜드가 구제금융을 상환한 반면, 그리스는 긴축과 경기침체의 악순환 속에서 2400억 유로까지 전체 부채의 액수가 더욱 늘었다. 그럼에도 트로이카 채권단은 태도를 바꾸지 않았다. 단지 효과가 나타나기까지 시차가 있었을 뿐이었다. 이 때문에 그리스 국민들 역시 긴축이라는 현재의 틀을 유지할 수밖에 없어 국민투표에서 ‘네(NAI·찬성)’가 이길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했던 것이다. 월가의 시각도 다르지 않았다. 국민투표 결과 ‘네’의 우세로 끝나면 시리자의 정치적 입지는 줄어들면서 지금까지의 긴축정책도 큰 변동 없이 유지될 것이라는 관측이 우세했다. 이 때문에 ECB의 양적완화 정책도 이어져 그리스발 위기가 유럽이나 다른 경제권으로 퍼져나가기는 어려울 것으로 점쳐졌다.

“국민투표 결과에 그리스 국민들과 유럽 좌파진영이 환호하기는 했지만 이들은 겨우 한 나라 안에서 정치적 힘을 결집시킨 수준에 불과하다. 반대로 그들이 상대해야 할 자본주의는 두꺼운 지원세력들로 여전히 더 큰 힘을 갖고 있다.” 정 소장은 부채 탕감을 포함해 협상 성공에 이르기까지 더 많은 난관이 남아 있다고 지적했다. 정 소장은 “그래도 앞으로 유럽의 변화를 이끌어낼 하나의 전기임은 분명하기 때문에 약탈적 자본주의에 대한 ‘오히’는 쉽게 수그러들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김태훈 기자 anarq@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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