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12 군사반란 현장… 국가권력 찬탈을 노린 정치군인들의 하극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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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용산에 있는 전쟁기념관 정문 안쪽에 ‘전쟁기념관’이라는 표석이 있다. 그런데 이 휘호를 쓴 사람이 ‘1993년 12월 25일 대통령 노태우’로 돼 있다. 1993년 12월이면 김영삼 대통령 시절인데 어찌 이런 오류가 발생했을까. 이 전쟁기념관을 계획하고 추진했던 노 대통령이 표석 휘호를 미리 써놓았기 때문일 것이다. 1988년 노 대통령은 대통령이 되자마자 이곳에 있던 육군본부를 이전하고 전쟁기념관을 짓겠다고 발표했다. 공사도 그의 임기 중인 1992년 10월 말로 끝내기로 했다. 하지만 공사가 늦어지고 전시물 준비로 개관은 1993년 12월에야 이뤄졌다.

육군본부 자리에 전쟁기념관 들어서
사실 이 전쟁기념관의 ‘오류 표석’은 전·현직 대통령의 보이지 않은 힘 겨루기의 산물이다. 노태우 후임 김영삼 대통령은 전쟁기념관 대신 광화문에 있는 국립박물관을 이전하거나 민족기념관으로 바꾸려고 했다. 세계적으로 ‘전쟁을 기념하는 기념관을 세운’ 나라는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원래 설계가 박물관에 맞지 않아 그대로 전쟁기념관이 만들어졌다.

원래 이곳은 육군본부가 있던 자리였다. 하지만 지금 육군본부의 흔적은 찾기 어렵다. 홈페이지에 조그맣게 설명만 있을 뿐이다. 왜 노 대통령은 이곳 육군본부를 없애고 전쟁기념관을 지었을까. 군인 출신으로 전쟁을 기념하는 기념관도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혹시 자신이 과거에 자행했던 ‘하극상’의 현장을 감추고 싶어서는 아니었을까. 이곳은 1979년 12·12 군사반란의 뼈아픈 역사가 서려 있는 곳이다. 노 대통령도 그 ‘주범’중 한 사람이다.

1979년 12·12 군사반란의 현장에는 전쟁기념관과 호국군상, 청동검과 생명나무가 세워져 있다. 청동검은 유구한 역사와 상무정신, 생명나무는 한민족의 화평과 번영을 상징한다.

1979년 12·12 군사반란의 현장에는 전쟁기념관과 호국군상, 청동검과 생명나무가 세워져 있다. 청동검은 유구한 역사와 상무정신, 생명나무는 한민족의 화평과 번영을 상징한다.

1979년 10월 26일 중앙정보부장이 쏜 총알 두 발로 영원하리라 여겼던 유신체계가 무너졌다. 유신체제를 지탱하던 삼각축은 바로 청와대와 중앙정보부, 그리고 군부였다. 물론 겉으로는 공화당과 유정회 등이 있었지만 그것은 ‘얼굴’에 지나지 않았다. 유신의 실제적 ‘컨트롤타워’는 중정이었다. 그리고 유신체제, 더 본질적인 박정희 체제 18년의 하부구조는 역시 군부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청와대는 단지 대통령의 참모 기능을 할 뿐 법적·행정적으로 아무런 권한이 없는 조직이다. 그런데 권력의 컨트롤타워가 권력의 핵을 제거하자, 청와대(비서실·경호실)는 그야말로 종잇장에 불과했다.

유신체제의 마지막 보루였던 군부가 움직였다. 특히 유신체제에서 승승장구하던 정치군인들은 보안사령부, 수도경비사령부, 수경사 경비단을 비롯해 수도권 주변 주요 부대를 장악하고 있었다. 4년제 정규육사 출신이라는 ‘자만심’과 정치적 야망이 가득찬 육사 11기 몇몇 장교들은 하나회라는 사조직을 만들었다. 그 핵심은 전두환 소장이었다. 이들은 박정희 대통령의 비호 아래 승진과 주요 보직을 나눠 가지며 군부에서 무시못할 세력으로 커졌다.
 
“회원의 보직 관리를 위해 전씨는 직접 몸으로 부딪쳤다. 그는 당돌하게 고위장성들을 대면해 인사청탁을 하곤 했다. 명분은 언제나 정규교육을 받은 유망한 젊은 장교들을 키워야 한다고 내세웠다.”(김재홍, 군, 동아일보사) 이들은 공식 지휘계통보다 개인적 연대를 우선했다. 결국 이 하나회 출신들은 12·12 하극상에서 단 한 명의 이탈자도 없이 가담했다.

반란군에 연행돼 군법회의에 출두하는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 경향신문 자료사진

반란군에 연행돼 군법회의에 출두하는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 경향신문 자료사진

1979년 12월 12일 오후 7시5분. 어둠이 깔린 한남동 고가도로를 타고 보안사 인사처장 허삼수 대령과 육본 범죄수사단장 우경윤 대령, 그리고 보안사 수사요원 8명이 육군참모총장 공관촌 입구에 도착했다. 이곳 경비를 맡은 해병 헌병이 차를 세웠다. 해병 헌병은 총장 공관으로 연락을 하고 차량을 통과시켰다. 7시15분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이 응접실로 내려와 이들을 맞았다.

육군 참모총장에게 총구 겨눈 상사
“절차상 필요하니 보안사령부로 가시죠” “이놈들, 가긴 어딜가, 내가 육군참모총장이야”라는 고성이 오가고 권총이 발사됐다. 우 대령이 쓰러졌다. 이 총소리와 함께 부관실에 있던 수사관들이 총을 난사하면서 총격전이 벌어졌다. 박 상사가 총장 가슴에 M16 소총 총구를 겨누며 “빨리 나갈 것이지 무얼 우물쭈물해”라고 소리쳤다. 육군참모총장을 연행한 승용차는 7시22분 총장 공관을 빠져나와 보안사 서빙고 분실로 내달렸다.

12·12 군사반란의 첫 총격전이 벌어진 육군참모총장 공관은 여전히 서울 한남동에 있다. 하지만 워낙 은밀해 공관의 모습이 공개된 적은 없다. 표시도 ‘외교부 장관 공관 입구’라는 안내판만 있을 뿐이다. 인근에서 48년간 부동산을 한다는 한 노인은 “12·12 당시 총소리를 분명하게 들었다”면서 “아무도 총장 공관을 본 적이 없다. 산 위로 올라가면 총장 공관으로 들어가는 길만 보인다”고 말했다. 지금도 총장 공관 입구에는 여전히 육군 헌병이 소총을 들고 삼엄한 경계를 펴고 있다. 경계 중인 한 헌병은 “이곳이 12·12사태 현장이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총격이 벌어진 현장은 말씀드릴 수 없다”고 말했다.

12·12사태 당시 서울 도심에 진주한 반란군. / 경향신문 자료사진

12·12사태 당시 서울 도심에 진주한 반란군. / 경향신문 자료사진

12월 12일 오후 7시15분, 일개 상사가 별 넷 육군참모총장의 가슴에 총구를 겨눈 ‘군사반란’은 이렇게 시작됐다. 하지만 군사반란은 유신의 절대권력이 사라진 10·26부터 시작됐다. 절대권력의 비호로 성장한 하나회에 대한 견제는 군을 정상화시키는 지극히 당연한 조치였다. 정상적인 군인들은 하나회의 책임자이자 정치군인으로 지탄을 받는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좌천시킬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전 보안사령관을 비롯한 하나회 정치군인들은 새로운 탈출구가 필요했다. 그들은 10·26사건이 발생한 후 한 달 만인 11월쯤부터 하극상을 꾸미기 시작했다. 그리고 12월 12일 경복궁 옆 30경비단(단장 장세동)에 전두환을 비롯한 노태우 등 하나회 출신들이 모여 거사를 실행했다. 요직을 장악한 이들은 보안사 감청반이 군부대 움직임을 속속 파악했다. 오후 6시 전 보안사령관은 최규하 대통령에게 육군참모총장 체포에 대한 재가를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정승화 참모총장 연행 사실은 곧 윤성민 참모차장에게 전달됐다. 오후 8시 윤 차장은 육군본부 지하벙커에서 진돗개 하나(간첩 침투 시 발령하는 비상사태 중 가장 단계가 높은 것)를 발령했다. 그리고 1·2·3군 사령부와 육본 직할부대, 전군에 직접 전화해 “군사반란이 일어났다, 앞으로 내 육성 지시에 의해서만 행동하라”고 지시했다.

12·12 군사반란의 첫 총성이 울린 참모총장 공관 입구.

12·12 군사반란의 첫 총성이 울린 참모총장 공관 입구.

봄이 왔으나 ‘피의 봄’이 될 줄이야…
하지만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의 연행으로 상황은 역전됐다. 9시30분쯤, 참모총장을 연행한 전두환, 황영시 등은 다시 최규하 대통령에게 총장의 연행·조사를 재가해 달라고 재차 요구했으나 다시 거절당했다. 육본에서는 군사반란을 진압하기 위한 움직임이 시작됐다. 하지만 신군부는 이에 대한 대비 역시 해놓고 있었다.

박희도 준장의 제1공수특전여단과 장기오 준장의 제5공수특전여단이 서울로 출동했다. 또한 전방을 지키던 9사단 노태우 소장, 대테러 임무를 맡던 박준병의 20사단은 총부리를 돌려 서울로 향했다. 이들은 총격전 끝에 육군본부과 국방부, 중앙청을 차례로 점령했다. 최세창 준장의 제3공수특전여단은 특전사령관 정병주 소장을 체포하고 특전사를 장악했다. 이 과정에서 사령관 비서실장 김오랑 소령이 숨졌다. 11개 한강다리가 통제되고 총격전이 오간 끝에 13일 새벽 3시, 숨어 있던 노재현 국방부 장관이 반란군에 끌려가면서 상황은 마무리됐다.

결국 최규하 대통령은 두 번의 거부 끝에 참모총장 연행을 재가했다. 그때가 새벽 5시, 사후재가였던 셈이다. 13일 오후 정승화 참모총장이 구속되고, 신임 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에 이희성 대장이 임명됨으로써 군부 권력은 신군부로 넘어갔다. 불과 하루 만에 벌어진 일이다. 하극상의 분노를 참지 못한 정병주 특전사령관은 자살했다.

군의 최고 책임자인 국방부 장관이 숨어 있다가 반란군에 연행되는 치욕을 간직한 국방부 청사.

군의 최고 책임자인 국방부 장관이 숨어 있다가 반란군에 연행되는 치욕을 간직한 국방부 청사.

하지만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하나회를 중심으로 뭉쳐진 신군부 세력은 아예 권력의 전면에 등장할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2월부터 군에서는 시위 진압작전인 충정작전이 시작됐다. 4월 14일 전두환은 중앙정보부장 서리까지 차지했다. 전두환의 중정부장 겸직은 부총리급으로 국무회의에 참석할 수 있고, 국방부 장관을 제치고 군부를 장악할 수 있는 이점을 제공했다.(강준만, 한국현대사)

1980년 2월 29일 김대중을 비롯한 재야인사 678명에 대한 사면복권 조치가 발표됐다. 바야흐로 정치의 계절, 서울의 봄이 오고 있었다. 하지만 민주세력을 대표했던 두 김씨(김영삼·김대중)는 분열했다. “물정에 어두운 두 김씨는 ‘김칫국부터’ 마시는 경쟁이 썩 뜨거웠다. 80년 4월 4일 신민당과 재야의 통합협상을 벌이더니 사흘 뒤엔 아주 ‘헤어지기’로 했다고 발표했다.”(김충식, 남산의 부장들)

학원가에도 봄이 오고 있었다. 학도호국단이라는 이름으로 총학생회장을 임명하던 것에서 회장을 학생이 직접 선출하는 총학생회가 부활했다. 학원자율화추진위는 학원민주화추진위로 한 발 더 들어갔다. 개학이 되자 전국의 대학생들이 ‘비상계엄해제’ ‘유신잔당 퇴진’을 요구했다. 5월 학생들은 청와대로 향했다. 서울 전역은 최루탄과 돌, 화염병으로 넘쳐났다. 서울의 봄을 만끽하는 사회 분위기에서 쿠데타를 감행해본 경험이 있는 김종필은 이렇게 말했다.

“한국에는 지금 봄이 오고 있다. 그러나 아직은 꽃이 피어날 봄인지, 겨울 속으로 돌아갈 봄인지 알 수가 없다. 춘래불사춘의 정국이다. …안개정국이라고나 할까.”(빼앗긴 서울의 봄, 한국일보사 발행)

불행하게도 그의 예상은 적중했다. 그것도 무서운 ‘피의 봄’이 기다리고 있었다.

추신 : 문민정부가 들어서자 김영삼 대통령은 12·12사건을 ‘하극상에 의한 쿠데타적 사건’이라고 규정했다. 그러나 1994년 12월 검찰은 12·12사건은 군사반란이 맞지만 혼란을 우려해 기소유예 처분했다. 1995년 7월 검찰은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며 기소하지 않았다. 하지만 국회가 5·18 특별법을 제정해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을 12·12사건 반란혐의로 구속 기소됐다.

재판은 1심에서 전두환에게 사형을 선고했지만 2심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됐다. 전 전 대통령은 재판에서 줄곧 “12·12사건은 우발적인 사건이었을 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노 전 대통령 역시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연행하려다가 일어난 돌발사고였다”면서 “쿠데타가 성립될 수 있는 구성요건이 전혀 없었다”고 주장했다.(노태우 회고록)


<글/원희복 선임기자·사진/이상훈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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