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희관 ‘느린 공의 비밀’은 효과 구속
  • 인쇄
  • |
  • 목록
  • |
  • 복사하기
  • 페이스북
  • 트위터
  • 밴드

사람의 눈은 상황에 따라 다르게 인식한다. 투수의 공도 마찬가지다. 느린 공은 더 느린 공 다음에 날아올 때 실제보다 빠르게 느껴진다. 멀어 보이는 바깥쪽 공은 실제보다 느리게 보이고, 그 다음에 몸쪽으로 바짝 붙는 덜 느린 공은 실제보다 훨씬 빠르게 느껴진다.

근대가 성립된 이후 세상을 지배한 최대의 가치는 속도였다. 볼프강 쉬벨부쉬는 <철도여행의 역사>에서 ‘19세기 초에는 철도의 영향을 공간과 시간의 소멸로 서술하였다. 이런 생각의 근거는 새로운 교통수단이 이뤄낸 속도다’라고 설명했다. ‘보다 빠르게’는 근대 이후 사회를 관통하는 캐치 프레이즈가 됐다. ‘능률’을 강조하는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스피드’는 필수 요소다. ‘빨리빨리’는 한국의 압축성장을 채찍질하는 선언적 단어였다.

스포츠도 같은 캐치 프레이즈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스포츠의 발전은 속도의 발전과 궤를 같이했다. 더 빠른 리그가 그렇지 않은 리그보다 비교우위에 섰다. 유럽 축구에서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가 과거의 분데스리가, 세리에A 등이 누리던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은 프리미어리그 특유의 스피드 덕분이라는 분석이 많다. 프리미어리그는 다른 리그보다 경기 스타일이 빠르다.

모터 스포츠의 확산도 ‘스피드’를 강조하는 사회 분위기와 맥이 닿는다. 굉음을 내며 달리는 자동차는 그 스피드와 힘만으로 ‘능력’을 상징했다. 압도적인 스피드는 쾌감을 관객에게 전달한다. 스포츠의 중계 기술도 스피드를 더 느낄 수 있는 방식으로 발전해 왔다. 스피드는 스포츠의 절대 원리, 계명으로 자리 잡았다.

야구도 그 선언적 명제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모든 투수는 빠른 공을 원한다. 더 빠르고 더 강한 공을 던지기 위해 어깨를 단련하고, 팔꿈치를 강화하는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투수에게 빠르고 강한 공은 영혼과도 바꿀 수 있을 만큼 절실한 바람이다. 세상은 모든 것에서 더 빠르고 더 강한 것을 요구하고 있고, 빠르고 강한 것만이 살아남는 세상이다.

6월 21일 잠실야구장에서 열린 프로야구 롯데자이언츠 대 두산베어스 경기에서 두산 유희관이 투구하고 있다.  / 김기남 기자

6월 21일 잠실야구장에서 열린 프로야구 롯데자이언츠 대 두산베어스 경기에서 두산 유희관이 투구하고 있다. / 김기남 기자

투수에겐 영혼과도 바꿀 수 없는 구속
그런데, 한국 프로야구에 묘한 투수가 승승장구를 이어가고 있다. 강속구의 기준을 148㎞로 삼는다면 한참 모자라는 직구로 타자와 승부한다. 최고 구속이 132㎞ 언저리, 가장 느린 공은 74㎞까지 속도가 떨어진다. 그럼에도 리그 최고 수준의 성적을 내고 있다.

두산의 왼손 투수 유희관은 7월 2일 현재 11승2패로 다승 선두권에 올라 있다. 3.01의 평균자책은 리그 2위다. ‘스피드의 시대’가 강요하는 압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130㎞ 초반의 공으로 타자들을 농락한다.

2015시즌 KBO리그 타자들 상당수가 몸을 키우는 데 노력했다. 넥센 히어로즈를 중심으로 한 ‘벌크업’ 열풍은 여러 구단으로 번졌다. 많은 타자들이 몸과 함께 힘을 키웠고, 이를 통해 타구의 스피드를 높이려 노력했다. 보다 빠르고, 보다 힘있는 공에 대처하기 위한 노력이다.

유희관은 타자들의 이런 변화에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여전히 씩씩하게 ‘느린 공’을 자신있게 던지는 중이다.

물론, 단지 느리기만 한 것은 아니다. 느린 공으로 타자를 잡아내는 비결은 느린 공을 빠르게 보이도록 하는 데 있다. 이른바 ‘효과 구속(Effective velocity)’이라고 불리는 장치다.

사람의 눈은 적응의 장치이고, 상황에 따라 다르게 인식한다. 다양한 ‘시각 퍼즐’을 통해 시각의 왜곡은 쉽게 경험할 수 있다. 투수의 공도 마찬가지다. 느린 공은 더 느린 공 다음에 날아올 때 실제보다 빠르게 느껴진다. 멀어 보이는 바깥쪽 공은 실제보다 느리게 보이고, 그 다음에 몸쪽으로 바짝 붙는 덜 느린 공은 실제보다 훨씬 빠르게 느껴진다.

타자의 타격 메커니즘은 보고, 예측하고, 수없는 반복훈련을 통해 익숙해진 방식으로 몸을 움직여 때려내는 방식이다. 투수가 던지는 140㎞ 이상의 공이 포수 미트에 꽂히는 때까지 걸리는 시간은 겨우 0.4초. <야구의 물리학>에 따르면 타자가 공을 인식하고 뇌를 통해 근육에 신호를 전달해 실제 스윙이 나올 때까지의 물리적 시간을 고려하면 타자는 0.2초 안에 공을 칠지 말지를 결정해야 한다. 그 찰나의 타이밍의 미묘한 변화가 ‘정타’를 만들어내기도 하고 ‘빗맞은 타구’를 만들어내거나 아니면 헛스윙을 이끌어낸다.

여기에 ‘효과 구속’이 더해지면 타자의 대응은 훨씬 복잡해진다. 초구에 느린 체인지업이 몸쪽으로 들어온 뒤 바깥쪽에 같은 방식의 체인지업이 들어오면 2구째가 느려 보이게 된다. 눈에서 멀어지는 공은 느려 보인다. 3구째 빠른 직구가 몸쪽으로 붙어 들어오면 앞선 2개의 공에 적응한 타자의 몸이 다른 방식으로 몸쪽 직구를 받아들이게 된다. 실제보다 훨씬 빨라 보이게 되고, 이 공에 대한 제대로 된 판단을 왜곡시킨다. 132㎞의 공이 140㎞ 이상의 공으로 둔갑하는 마술이다.

6월 9일 잠실야구장에서 열린 프로야구 두산베어스 대 LG트윈스 경기에서 유희관이 위기를 넘긴 뒤 포수 양의지와 함께 웃으며 덕아웃에 돌아오고  있다.  / 김기남 기자

6월 9일 잠실야구장에서 열린 프로야구 두산베어스 대 LG트윈스 경기에서 유희관이 위기를 넘긴 뒤 포수 양의지와 함께 웃으며 덕아웃에 돌아오고 있다. / 김기남 기자

실제 구속보다 더 빠른 공으로 둔갑
물론, 이 ‘효과 구속’을 실전에서 이용할 수 있는 전제조건은 제구다. 타자의 눈을 왜곡시킬 수 있을 정도로 확실하게 좌우 공간을 이용하는 피칭을 해야 한다. 어중간한 공이면 타자의 눈을 현혹하기는커녕 장타를 허용하기 딱 알맞은 공이 된다.

유희관의 ‘효과 구속’은 확실한 제구를 바탕으로 위력을 발휘한다. <스포츠경향>이 최근 유희관을 상대한 타자들을 인터뷰한 내용에 따르면 타자들은 유희관의 직구가 예상보다 빠르다고 입을 모은다. 133~134㎞의 직구가 실제로는 140㎞ 이상의 느낌을 준다고 평가했고, 타이밍을 맞추기 어렵다고 했다. 이 효과는 스트라이크 존의 좌우 양쪽을 넓게 쓸 수 있는 제구력에 기반한다. 한 타자는 “유희관은 대부분 공이 양 사이드 스트라이크존을 공 한두 개로 넘나든다. 오히려 구속이 좋고, 컨트롤이 그저 보통 수준의 투수라면 타깃을 한복판으로 좁혀놓고 대응하면 되는데, 유희관을 상대로는 그럴 수가 없다”고 털어놓았다. 또 다른 타자 역시 “타자 입장에서 타깃을 넓혀놓을 수밖에 없다. 그러다 보니 살짝 빠지는 공에도 방망이를 내게 된다. 정타 확률은 그만큼 떨어진다”고 말했다.

다양하게 움직이는 변화구 역시 특정 타이밍을 잡기 어렵게 만든다. 공의 구속 차이에다 움직임이 더해지면 타자들이 타석에서 특정 코스, 타이밍을 골라 집중하기가 더 어려워진다. 이런 저런 가능성에 모두 대비해 타격을 한다는 것은 야구에서는 불가능에 가까운 기술이다.

“느리다고 살살 던지는 공은 하나도 없다”
두산 김태형 감독은 유희관에 대해 “직접 공을 받아본 적이 있다. 실전 피칭은 아니었지만 공 끝에 힘이 있다. 커브도 끝까지 회전이 살아있는 상태에서 움직이고 체인지업의 각도 뛰어나다”라고 했다. 김 감독은 “아직도 저 공을 왜 못 치는지 의아하기는 하지만, 실제 타석에 들어서면 굉장히 괴로운 상황이 될 것”이라며 웃었다.

타자의 눈을 왜곡시키는 유희관의 제구와 변화구는 휘두르지 못한 채 스트라이크 선언을 당하는 루킹 스트라이크 비율에서 드러난다. 유희관의 올 시즌 루킹 스트라이크 비율은 22.9%로 규정 이닝을 채운 선발투수 중 가장 높다. 커브의 달인으로 불리는 삼성 윤성환의 루킹 스트라이크 비율은 19.6%다.

물론 공이 느린 것은 어디까지나 장점보다는 단점에 가깝다. 유희관은 그 단점을 자신의 장점으로 만들기 위해 무던히도 노력하는 중이다. 느리니까 운동을 덜해도 되는 것 아니냐는 주변의 시선과 싸우기 위해 달리기 훈련을 게을리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느린 공이라고 해서 대충 던지는 게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 데 열심이다. 유희관은 ‘살살 던진다’는 말을 제일 싫어한다. 인터뷰 할 때마다 항상 빼놓지 않고 하는 말이 있다. “선발로 100개 던지면 100개 모두 전력투구다. 단 하나도 살살 던지거나 대충 던지는 공은 없다”고 말했다. 133㎞의 전력투구. 어쩌면 그게 유희관이 느린 공으로 리그 최고의 투수로 성장한 가장 큰 비밀이다.

<이용균 경향신문 스포츠부 기자 noda@kyunghyang.com>

바로가기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