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 태종도 현종도 자신의 욕망에 무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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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징이 태종에게 올린 상소에 이런 말이 나온다. “영원히 나라의 안정을 누리고자 하되 마음의 욕망을 이기지 못하면, 뿌리를 베고서 나무가 무성하길 바라고 원천을 막고서 물이 멀리까지 흐르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옛날 우왕(禹王)이 산을 깎고 치수했을 때 백성들이 비방하지 않았던 이유는 그 이익을 다른 이들과 함께 누리고자 했기 때문이다. 진시황(秦始皇)이 궁전을 만들 때 백성들이 원망하며 반대한 이유는 자신만을 위하고 남에게 해를 끼쳤기 때문이다. 아름답고 진기한 것은 물론 사람이 욕망하는 바이다. 하지만 그 욕망을 끊임없이 추구한다면 멸망의 위기가 곧 닥치게 된다. 짐은 궁전을 짓고 싶고 필요한 자재도 이미 갖추어져 있지만, 진나라를 교훈으로 삼아 자제할 것이다. 왕공 이하 대신들은 마땅히 짐의 뜻을 이해하라.”

태종의 궁전 건축을 반대한 장현소
정관(貞觀) 원년(627년), 당 태종은 자신만을 위한 토목공사에 국고를 낭비하지 않겠노라고 이렇게 대신들 앞에서 공포했다. 그런데 불과 3년 뒤, 그는 낙양의 건원전(乾元殿)을 대대적으로 수축하고자 한다. 이때 급사중(給事中) 장현소(張玄素)가 반대하는 상소를 올린다. 아방궁(阿房宮)을 짓고서 진나라가 넘어졌고 건원전을 짓고서 수(隋)나라가 무너졌다, 힘든 백성들에게 부역을 시키는 것은 수나라의 폐단을 답습하는 일이며 그 화는 양제(煬帝)보다 더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그야말로 발칙하고 대담한 상소였다. 태종은 장현소를 불러들였다. “내가 수양제보다 못하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하(夏)나라 걸왕(桀王)이나 상(商)나라 주왕(紂王)과 비교하면 어떠냐?” 최악의 폭군인 걸왕과 주왕을 자신과 비교하라는 태종의 위협 앞에서도 장현소는 절대 물러서지 않는다. 정말로 건원전을 수축한다면 걸왕이나 주왕과 마찬가지라고 직간한다. 결국 태종은 건원전 수축을 포기한다. 그리고 장현소에게는 비단을 하사한다. 태종과 장현소의 이 일화는 태종이 신하들의 간언을 얼마나 잘 받아들였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로 회자된다. 나는 “절대권력은 절대 부패한다”는 관점에서 이 일화의 선후를 추적해보고자 한다.

[이유진의 중국 도읍지 기행]당 태종도 현종도 자신의 욕망에 무너졌다

당고조 무덕(武德) 4년(621년), 이세민(李世民, 후의 당태종)은 낙양을 공격한다. 그 당시 낙양에서는 수양제의 손자를 살해한 왕세충(王世充)이 황제를 자처하고 있었다. 낙양을 성공적으로 접수한 이세민은 일찍이 양제가 지은 궁전을 휙 둘러보았다. “이토록 사치와 욕심을 다 부렸으니 나라가 망하지 않을 수 없지!”라는 탄식이 절로 나왔다. 그는 이 궁전을 부수도록 명했다. 6년 뒤 황제가 된 첫해에 그가 여러 신하들 앞에서 호화로운 궁전을 짓지 않겠노라 다짐한 데는 이런 배경이 있었다. 이렇게 다짐했던 태종이 건원전을 다시 짓고자 했으니, 인간의 다짐이란 나약하기 짝이 없고 욕망의 위력은 불가항력적이지 않은가.

태종은 장원소의 반대로 건원전 수축을 포기한 이듬해(630년)에 기주(岐州, 지금의 바오지(寶鷄)시 경내)에 있는 인수궁(仁壽宮)을 확장 수축한다. 인수궁은 수문제(文帝)가 피서용 행궁으로 지었던 것이다. 태종은 인수궁을 구성궁(九成宮)이라 개칭하고 역시 피서용 행궁으로 사용했다. 또 정관 8년(634년)에는 장안의 대명궁(大明宮) 공사에 착수하고, 정관 11년(637년)에는 낙양에 비산궁(飛山宮)을 짓는다. 비산궁이 완공되자 태종은 득의만만했다. 이를 보고 위기를 감지한 위징(魏徵)은 상소(태종께 열 가지 생각을 간하는 상소(諫太宗十思疏))를 올린다. 나무가 크게 자라기를 바라면 뿌리를 견고히 해야 하고 물이 멀리 흐르기를 바라면 원천을 깊게 해야 하고 나라를 평안히 하려면 반드시 덕을 쌓아야 한다, 원천이 깊지 않은데 멀리 흐르길 바라고 뿌리가 견고하지 않은데 크게 자라길 바라고 덕이 두텁지 않은데 나라가 평안하길 바라는 것은 불가하다는 말로 시작한 위징의 상소는, 편안할 때 위태로움을 생각하면서 사치를 경계하고 덕을 쌓고 욕망을 억누를 것을 태종에게 주문했다.

그런데 이렇게 태종을 견제하는 균형추 역할을 했던 위징이 643년에 죽고 만다. 태종은 “구리를 거울로 삼으면 의관을 바로잡을 수 있고, 역사를 거울로 삼으면 천하의 흥망을 알 수가 있고, 사람을 거울로 삼으면 득실을 밝힐 수 있다”고 하면서 위징의 죽음을 몹시 슬퍼했다. 위징의 간언을 거울삼아 모든 것의 득실을 살폈던 만큼, 그 거울의 부재는 태종이 건강한 견제력을 상실했음을 의미한다. 645년 태종은 고구려 침공에 참혹하게 실패한 뒤, 만약 위징이 살아 있었다면 자신을 말렸을 거라며 후회하고 한탄했다. 그런데 불과 2년 뒤(647년) 고구려 침공을 또 다시 강행한다. 바로 이 해에 그는 장안 북쪽에 옥화궁(玉華宮)을 짓는다. 위징이 사치를 경계하고 욕망을 억누르라는 상소를 올린 지 10년째 되는 해였다. 이후 태종의 건강은 급속히 악화되었고 장생술에 빠져 온갖 단약을 복용한 결과 52세이던 정관 23년(649년)에 세상을 뜨고 만다. 그가 숨을 거둔 장소는 장안 남쪽에 있는 취미궁(翠微宮)으로, 647년에 완공한 피서용 행궁이다. 절대권력 하에서 토목공사와 전쟁과 혼미함과 죽음의 기운은 이렇게 지척지간에 있었다.

홍경궁 공원 내에 복원(1958)한 침향정

홍경궁 공원 내에 복원(1958)한 침향정

대규모 토목공사 위험성 지적한 위징
당나라 장안성에는 3개의 궁전 건축군이 있었다. 태극궁(太極宮)·대명궁·흥경궁(興慶宮)이 바로 그것이다. 장안성의 중축선 북쪽에 자리한 태극궁을 기준으로, 대명궁은 그 동북쪽에 자리하고 흥경궁은 동남쪽에 자리했다. 이 3대 궁전을 지어진 순서에 따라 살펴보기로 하자. 수문제 때 세워진 태극궁의 본래 명칭은 ‘대흥궁(大興宮)’이었다. 이연(李淵)이 당을 건국한 뒤 대흥궁의 주인이 되었고, 예종(睿宗) 경운(慶雲) 원년(710년)에 이르러 ‘태극궁’으로 그 명칭이 바뀐다.

그런데 대당 제국을 상징하는 궁전은 태극궁이 아닌 대명궁이다. “구중궁궐 궁문이 열리고 만국의 사신이 황제에게 절을 올린다”라고 왕유(王維, 701~761)가 노래했던, 실크로드의 동방 성전 대명궁은 고종 이후 당나라가 멸망하기까지 200여년 동안 정치의 중심지였다. 이 대명궁을 처음 지은 이가 바로 태종이다. 태종이 대명궁을 짓게 된 건 그가 피서용 행궁으로 사용하던 구성궁을 이연이 혐오했기 때문이다. 구성궁은 수문제가 아들 양제에게 살해당한 곳이다. ‘현무문(玄武門)의 변’으로 인한 트라우마가 남아 있는 이연에게 구성궁은 매우 꺼림칙한 곳이었다. 태종이 아무리 오길 청해도 이연은 그곳에 가지 않았다. 때마침 태상황(이연)을 위한 피서용 궁전을 지음으로써 황제의 효성을 만천하에 알리자는 상소가 올라온다. 태종은 태극궁 동북쪽의 용수원에 아버지를 위한 피서용 궁전을 짓기 시작했다. 영원히 평안하라는 의미에서 ‘영안궁(永安宮)’이라고 이름했다. 그런데 영안궁을 짓기 시작한 이듬해(635년)에 이연이 사망하면서 공사는 중지된다. 대명궁으로 개칭한 것도 이때다. 이후 대명궁은 고종의 손에서 완성된다. 류머티즘을 앓던 그는 습기 있는 곳을 피하고자 태극궁에서 대명궁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후 마지막 황제 소종(昭宗)에 이르기까지 대명궁은 당나라 역사를 통틀어 가장 중요한 정치 중심지였다.

술 취해 누워 있는 이백의 석상, 홍경궁 공원

술 취해 누워 있는 이백의 석상, 홍경궁 공원

아름다운 여인에게 무슨 죄가 있을까
고종 이후의 황제 가운데 단 한 명, 대명궁이 아닌 ‘흥경궁’에서 지낸 이가 있으니 바로 현종(玄宗)이다. 융경방(隆慶坊)에 거주하던 이융기(李隆基)가 황제가 된 뒤 그의 형제들은 축하의 의미로 융경방에 있는 자신들의 저택을 헌납하고 인근으로 이사했다. 바로 이곳 융경방에 흥경궁이 들어서게 된다. 개원(開元) 16년(728년)부터 안사(安史)의 난으로 현종이 장안에서 도망치기 전(756년)까지가 흥경궁의 전성기였다. 이후 흥경궁은 정치 중심지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고 퇴위한 황제가 머무는 곳이 되었다. 당나라의 멸망과 더불어 자취가 사라졌던 흥경궁은 1958년에 복원 공사를 통해 시안 시민을 위한 흥경궁 공원으로 거듭났다.

현종이 양귀비(楊貴妃)에 빠져 지냈던 곳인 만큼 이곳 흥경궁 공원은 그들에 관한 기억을 떠올리기에 안성맞춤인 장소다. 그 옛날 두 사람이 모란을 감상하던 화려한 봄날 속으로 들어가 보자.

붉은빛, 자줏빛, 분홍빛, 새하얀 빛의 모란이 만발한 침향정(沈香亭) 가에 음악소리가 울려 퍼진다. 양귀비와 술을 마시며 모란을 감상하던 현종이 갑자기 한림학사(翰林學士) 이백(李白)을 불러오라 명한다. 공교롭게도 이백은 잔뜩 취해 있다. 황제 앞에 불려 와서도 여전히 취한 상태다. 현종은 그를 곁으로 올라오게 한다. 이백은 고역사(高力士)에게 자신의 신발을 벗기라고 한다. 황제의 신임을 한 몸에 받고 있던 고역사이건만 무릎을 꿇고 이백의 신발을 벗겨줄 수밖에 없다. 겨우 정신을 차린 이백에게 현종이 어서 시를 지으라고 재촉한다. 붓을 집어든 이백은 일필휘지로 시를 써 내려간다. 바로 청평조사(淸平調詞) 3수이다. 양귀비를 선녀에 비유한 뒤, 마지막에는 아름다운 꽃(모란)과 미인(양귀비) 덕분에 온갖 근심을 날리고 침향정 난간에 기대어 웃음 짓는 군왕(현종)을 노래했다. 현종과 양귀비를 모두 만족시킨 이 시가 뜻밖에도 화근이 될 줄이야! 조비연(趙飛燕)도 양귀비보다 못할 거라는 구절이 문제였다. 한나라 성제(成帝)의 황후였던 조비연은 왕실을 망가뜨린 악녀의 전형이다. 물론 이백은 조비연을 미인의 대표 격으로 인용했지만, 무릎 꿇고 이백의 신발을 벗겨야 했던 고역사가 이 구절을 트집 잡아 양귀비에게 참소한다. 그리고 마침내 현종은 이백에게 궁을 떠날 것을 명한다.

이백은 스스로를 ‘술에 취한 신선’이라고 했다. 그가 살았던 성당(盛唐)은 잔뜩 취한 봄날이었다. 그 봄날은 문득 스러져가고 바로 스산한 찬바람이 불어왔다. 안사의 난 이후 성당의 기운은 더 이상 회복할 수 없었다. 이후 장안의 화려한 궁전들도 당나라와 운명을 함께했다.

이백은 청평조사에서 ‘경국(傾國)’이라는 말로 미인을 표현했다. 경국이란 나라를 기울게 할 정도의 미모, 황제가 미혹되어 나라의 위기조차 감지하지 못할 정도의 아름다운 여인을 일컫는 말이다. 엄밀히 따지자면 미인에겐 죄가 없다. 미혹된 황제가 죄인일 뿐. 현종도 그리고 태종도 자신의 갖가지 욕망 앞에서 무너졌다. 그들의 진짜 죄는 백성을 두려워하지 않은 죄다. 앞서 말한, 위징이 태종에게 올린 상소에 이런 말이 나온다. “두려워할 것은 오로지 백성뿐입니다. 물은 배를 띄우기도 하지만 배를 뒤집을 수도 있습니다.” “영원히 나라의 안정을 누리고자 하되 마음의 욕망을 이기지 못하면, 뿌리를 베고서 나무가 무성하길 바라고 원천을 막고서 물이 멀리까지 흐르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불현듯 헌법 제1조 2항이 떠오른다.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연세대 인문학연구원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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