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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트맨도 못한 ‘감청시티’를 세우려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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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신서비스에 감청장비 의무화는 세계에 유례가 없는 국민통제

영화 <다크 나이트>에는 조커가 인질들의 몸에 폭탄을 설치하는 긴박한 장면이 나온다. 배트맨은 시민들의 휴대폰에 몰래 설치한 고주파 발생기를 활용한다. 고담시티 전체의 음성을 시각화해 조커를 잡으려 한 것이다. 영화는 배트맨의 조력자 루시어스의 목소리를 통해 배트맨이 전 시민들을 대상으로 도청장치 사용을 해도 되는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다. 결국에는 그 위험성이 너무 크기에 단 한 번 사용 후 그 장비를 파괴하는 것으로 타협점을 찾는다.

영화 속 배트맨만 휴대폰에 도청장비를 설치한 것은 아니다. 해외 언론에 따르면 미국 국가안보국은 삼성·시스코 등의 컴퓨터와 통신장비에 개인정보유출 프로그램을 설치해 도청에 활용했다. 또 중국의 레노버는 노트북에 정보유출과 감시를 위한 악성 프로그램을 몰래 탑재했다가 미국에서 집단소송에 직면했다.

도·감청 통제 엄격해진 미국
미국에서는 지난 6월 1일 법원의 허가 없이 일반 시민에 대한 도·감청을 허용했던 애국법이 만료됐다. 미국 상원은 그 대신 정보기관이 법원의 영장을 발부받아야만 개별 통신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미국자유법을 통과시켰다. 9·11 테러 이후 도·감청을 강화했던 미국도 에드워드 스노든의 폭로 등으로 국가기관의 무차별 도·감청이 얼마나 심각한지 밝혀지자 통제를 엄격하게 하기로 한 것이다.

그에 반해 우리나라에선 휴대폰을 넘어 SNS까지 감청장비 설치를 의무화하려 하고 있다. 6월 1일 이동통신, 인터넷, SNS 사업자에게 감청협조 설비 구비를 의무화하는 내용을 담은 통신비밀보호법 개정안이 새누리당 일부 의원에 의해 발의됐다. 사업자가 감청장비를 설비하지 않으면 거액의 이행강제금까지 물리게 하는 내용도 있다. 모든 통신서비스에 감청장비를 강제화하는,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는 국민통제이다.

송호창 새정치민주연합 의원 / 김기남 기자

송호창 새정치민주연합 의원 / 김기남 기자

첨단 IT기술은 국민을 지켜줄 수도 있고, 감시하거나 속일 수도 있다. 현실은 최고 정보기관인 국정원과 군 사이버사령부가 대선에 개입해 민주주의를 뿌리째 흔들었고, 수사기관이 간첩조작에 앞장섰다. 반면 정부는 세월호 사건에 처참히 무력했고, 메르스 확산에도 괴담 처벌만 외칠 뿐이다. 감청장비가 없어 세월호 구조에 실패한 것도, 메르스가 확산된 것도 아니다.

정부는 범죄를 명분으로 감청장비를 확보하려는 노력 이전에 불신부터 해소해야 한다. 이미 정부는 국가정보원을 제외하고도 367대의 감청시설을 보유하고 있다. 이 중에는 레이저를 통해 ‘유리창의 진동’을 측정해 감청하는 첨단장비도 있다. 국가정보원의 감청설비 현황은 공개조차 되지 않고 있으며 다른 정부기관도 실태 점검을 제대로 받은 적이 없다.

우리 국민은 대규모 개인정보 유출에 익숙하다. 2008년 옥션 1800만건, 2011년 네이트 3500만건, 2012년 KT 870만건의 개인정보 유출이 있었고, KT는 2014년 또다시 1200만건의 개인정보를 해킹당하기도 했다. 심지어 지난해 카드 3사에서 유출된 1억여건의 개인정보 중 8000만건이 대출업자에게 팔려 온 국민이 신용불안에 떨어야 했다.

기업 차원에서 영리 목적으로 판매한 사례도 있다. 홈플러스는 불법 수집한 개인정보 등 총 2400만건을 보험사에 판매해 232억원의 판매 수익을 올린 혐의로 정부 합동조사단의 조사를 받고 있다. 이런 현실이지만 시민들이 내 개인정보가 유출됐는지 확인하려 해도 기업은 답조차 없다.

새로운 서비스 개발에도 장벽으로 작용
감청장비는 기업들에게도 족쇄나 마찬가지다. 감청장비 설비 의무화는 폭탄 조끼를 입히는 것과 같은 조치다. 내부 직원의 일탈이든, 정부의 압력이든 대화 내용이 유출된다면 그 사업자에 대한 신뢰는 무너질 것이다. 지난해 카카오톡 검열 사태로 빚어진 대규모 사이버 망명 사태는 감청의 기업 리스크가 얼마나 큰 것인지 보여준다. 지난해 사업자가 영장도 없이 정부의 요구로 제공한 이름, 아이디 등 통신자료는 1300만여건에 달한다. 전년도보다 35%나 급증했으며, 경제인구 절반 정도의 분량이다. 기업은 정부 압박과 소비자 불신에 끼여 곤혹스럽기만 하다.

게다가 감청장비 설비 의무화는 새로운 통신서비스 개발에도 높은 장벽이다. 업계 관계자들은 5G, 스마트시티, 사물인터넷 등 혁신기술 선점의 중요성을 한 목소리로 강조한다. 글로벌 경쟁에서 우리 기업만 감청의 틀에 맞춰 뛰게 한다면 결과는 뻔하다.

‘범죄 수사와 안보를 위해 감청은 필요하다’는 예외는 인정될 수 있다. 그러나 원칙은 ‘누군가의 대화를 몰래 듣지 말라’는 것이다. ‘통신비밀보호법’은 이 원칙을 지키라고 만든 법이다.

원칙이 신뢰받을 때 예외도 폭이 넓어질 수 있다. 그렇다면 법 개정의 방향도 명확하다. 통화 내용뿐만 아니라 가입자 정보, 위치 정보도 영장에 따라 엄격하고 개별적으로 제공되어야 한다. 감청기록은 전 과정과 그 내역을 자세히 기록해 사후 검증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유엔도 최근 각국 정부에 “통신 감시, 도청, 개인정보 수집에 관련된 자국절차, 관행, 법률을 재검토할 것”을 권고했다.

<다크 나이트>의 프리어스는 도청장비가 “비윤리적이고 위험하다”며 “3000만 시민을 감시하는 것은 자기의 일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영화보다 ‘더 비윤리적이고 위험한 장비’를 모든 통신사업자들에게 강제화하는 것, 이것이 국회의 일이라고 믿고 싶지 않다.

<송호창 새정치민주연합 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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