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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안보와 정보인권의 충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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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각국 감청 논란 시민사회와 갈등… 법 테두리 안에서 집행 목소리 높아

“미국, 영국, 일본, 독일뿐 아니라 문명국가라면 휴대전화 감청 안 하는 나라가 없다.”

통신사업자에게 감청장비 설치를 의무화하는 내용이 담긴 통신비밀보호법 개정안을 대표발의하면서 새누리당 박민식 의원이 던진 말이다. 박 의원의 말이 틀리지는 않았다. 세계 각국의 정보·수사기관이 감청을 통해 자국민을 포함해 국가 안팎을 오가는 각종 정보의 내용을 탐지하고 있다. 가장 큰 명분은 한국에서와 마찬가지로 ‘국가안보’와 ‘범죄수사’다. 하지만 ‘정보보호’를 내세우며 그에 맞서는 시민사회와의 갈등도 여러 방면으로 벌어지고 있다.

한국과 같은 시기에 ‘감청’ 논란이 벌어지고 있는 곳은 독일이다. 독일 연방정보국(BND)이 미국 국가안보국(NSA)을 도와 프랑스 등 인근 유럽국가 및 유럽의회를 대상으로 지속적인 감청활동을 벌였다는 사실이 폭로됐기 때문이다. 독일 일간지 쥐트도이체 차이퉁을 비롯한 현지 언론의 보도를 종합하면 독일 BND는 미 NSA가 제공한 감청설비를 적극 활용해 유럽 각국의 정부 수뇌부를 비롯, 군수업체, 유럽연합 집행위원회 등을 감청해 왔다. 2002년부터 시작된 양국 정보기관의 협력에 따라 수집된 정보는 최소 2008년까지 활발하게 공유돼 온 것으로 알려졌다.

독일 아이블링에 있는 독일 연방정보국(BND)의 통신 감청 레이다 시설의 전경. | EPA연합뉴스

독일 아이블링에 있는 독일 연방정보국(BND)의 통신 감청 레이다 시설의 전경. | EPA연합뉴스

독일 정보국 미국 도와 지속적 감청활동
국제범죄와 테러에 맞서 각국 정보기관 간의 협력을 강조했던 앙겔라 메르켈 총리는 위기에 몰렸다. 집권 기독민주당과 연정을 형성하고 있는 사회민주당까지 나서 BND가 NSA의 요청으로 수집한 정보의 목록 및 도·감청내역을 공개하라며 압박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 중앙정보국(CIA) 전직 직원이었던 에드워드 스노든의 폭로로 미국이 메르켈 총리 등 각국 정상을 대상으로 도·감청을 벌였다는 사실이 알려진 후 독일 정보당국 역시 미국 정부 주요 인사들에게 동일한 도·감청행위를 저질렀다는 보도가 나오며 감청에 대한 부정적 여론이 촉발된 지 9개월 만의 일이다.

감청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특히 이번에 밝혀진 미·독 양국 정보기관의 공조가 9·11 테러 직후부터 장기간 지속됐다는 점에서 더욱 확산되고 있다. 독일에서는 2001년 인터넷망에 대한 감청이 포함된 법률이 통과된 뒤 2004년에는 독일 내 최대 통신회사에 대한 감청이 허용되는 등 전 세계적 테러 대응 분위기와 맞물려 감청을 확대하는 기조가 이어졌다. 그러나 범죄수사와 국가안보 두 측면 모두에서 감청이 허용되는 경우를 ‘사실관계 확인이 다른 방법으로는 불가능하거나 매우 곤란할 경우’로 못박아 둠으로써 미국·영국 등에 비해 상대적으로 엄격한 통제를 시행하고 있다.

전 지구적 감청 및 신호수집체계로 유명한 에셜론을 주도하는 미국 NSA는 자국민을 대상으로 한 대규모 감청이 일시적으로 중단되는 위기를 겪고 있다. 6월 2일부터 시행된 미국 자유법 이전까지는 효력이 만료된 애국법에 따라 통신사업자가 보유한 통신기록을 집단적으로 수집하는 것이 가능했던 것이다. 자유법 이후 미국의 정보·수사기관은 개별 통신기록에 대해서만 법원의 영장을 발부받아 접근할 수 있게 됐다. 자국 내에서만 연간 3000건 안팎의 감청이 이뤄졌던 기록을 감안하면 미국에서 감청건수는 큰 폭으로 하락할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일본 감청 허용기간 30일 이내로 한정
다만 자국보다 외국에서 더 큰 반발을 불러일으키는 국가안보 차원의 외국 정보 감청에 대해서는 미국 정부가 아직까지 별다른 조치를 취하고 있지 않고 있다. ‘대외정보감시법’에 따라 이뤄지고 있는 안보 목적의 전 세계적 감청은 ‘대외 첩보 획득을 위해 필요한 경우’로 매우 포괄적인 범위를 두고 있다. 이 경우도 외국 정보감시법원의 영장에 따라 감청이 이뤄지는 것이 원칙이다. 하지만 미국의 대외 감청 기록은 공식적으로 보고된 건수만도 연간 1800~2000건 수준인 데다 실제로는 이 수치를 훨씬 넘어서는 감청활동이 벌어지고 있을 것으로 추정돼 국제사회의 비판을 받고 있다. 거의 전 세계에 회원을 두고 있는 기업인 페이스북, 애플, 구글 등에 대해서도 자국 기준의 네트워크 정보 감시를 실시해 사실상 전 세계의 인적 정보를 수집하고 있다는 점 역시 NSA가 비판받는 이유다.

가까운 일본의 경우 영장주의를 기본으로 감청을 제한하는 법률의 구조가 한국과 비슷한 양상을 보인다. 다만 4개월까지 감청이 허용되는 한국에 비해 일본은 최대 허용기간을 30일 이내로 한정하고, 긴급한 경우 사후 허가가 가능한 한국에 비해 법원의 영장 발부요건이 엄격하다는 특징 등을 감안하면 보다 엄격하게 감청이 제한되는 면을 보인다. 법제연구원의 손헌 연구위원은 “일본의 통신감청법 역시 헌법상 통신의 비밀 조항, 적법절차 조항 등과 상충된다는 문제로 위헌 논란이 제기되는 법 중 하나”라고 설명했다.

미국은 물론이고 세계 각국의 네트워크가 이미 국경을 넘어서 정보를 주고받는다는 점에서 각국 정보기관의 감청 및 정보수집에 대응하려면 국제적인 프라이버시 공조가 필요하다는 주장도 나온다. 세계 전역의 정보인권단체 269곳이 제정하고 있는 ‘국제인권법상 통신감시 13개 원칙’에서도 각국 법률의 규정을 활용해 정보인권을 지키기 위한 가이드라인을 제정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한국 역시 ‘감시를 목적으로 특정 정보를 수집·보관해서는 안 된다’는 원칙과 ‘감청 등 통신제한조치를 이용자에게 알려야 한다’는 원칙에서 법률적 미비점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전문가들은 휴대전화를 포함해 다양한 의사소통 매체가 발달함에 따라 감청의 범위에 관한 논란이 벌어지는 것이 세계적 추세라면서도 국가기관의 감청활동을 법의 테두리 안에 묶어두려는 시민들의 요구도 점차 커지고 있다고 말했다. 박경신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한국의 감청 집행 실태에 대해 “기지국 교신에 기반을 둔 위치추적은 불특정 다수에 대한 수사라는 점에서 여러 논란이 있는데도 법적으로 해결되지 않고 있다”며 “수사가 끝날 때까지 통지를 안 하고 피고가 돼 재판정에 앉아 있다 감청을 당한 사실을 알게 되는 이용자 통지 문제도 시급히 해결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김태훈 기자 anarq@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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