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의 솔직한 자기반성, 백성을 감동시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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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기조’란 천재지변이나 정권이 위기에 직면했을 때 제왕이 자신을 꾸짖는 내용을 담아 공개적으로 알리는 것이다. 현종의 경우처럼 말의 형식일 수도 있고, 덕종의 경우처럼 글의 형식일 수도 있다. 죄기조의 기원은 성군(聖君)으로 칭송받는 은(殷)나라 탕왕(湯王)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군주가 어떻게 하면 명군(明君)이 되고 어떻게 하면 혼군(昏君)이 되오?”

“두루 들으면 현명한 군주가 되고, 한쪽 말만 믿으면 어리석은 군주가 되옵니다. 여러 의견을 두루 듣고 받아들이면 권신이 감히 기만할 수 없으며, 아랫사람의 의견이 윗사람에게 전해질 수 있사옵니다.”

대명궁의 당시 모습을 복원한 중국 다큐멘터리의 한 장면.

대명궁의 당시 모습을 복원한 중국 다큐멘터리의 한 장면.

장안성 태극궁 북문 ‘현무문의 변’
‘정관(貞觀)의 치(治)’라는 태평성세를 이끈 당 태종과 재상 위징(魏徵)이 나눈 말이다. 황제와 신하의 허심탄회한 대화와 소통, 거슬리는 말일지라도 기꺼이 듣고자 하는 황제의 의지, 이것이 바로 정관의 치를 가능하게 한 동력이다. 태종과 신하들의 문답이 담긴 <정관정요(貞觀政要)>를 보면, 간언을 흔쾌히 받아들이는 ‘납간(納諫)’의 능력이야말로 태종이 당나라뿐 아니라 중국 역사상 가장 뛰어난 ‘명군’으로 평가받는 원동력이었음을 알 수 있다.

당 태종 이세민(李世民)은 확실히 명군의 자질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뛰어난 자질과 능력이 있다 한들, 장자계승제 아래서는 맏아들의 ‘자격’이 없으면 결코 황제가 될 수 없는 법. 이세민은 고조 이연(李淵)의 둘째 아들이다. 맏아들이자 황태자인 이건성(李建成)이 있는 한, 이세민은 황제가 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자신을 견제하는 형의 손에 죽게 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동생 이원길(李元吉) 역시 이건성과 합세해서 이세민을 음해하고 모함했다. 아버지 고조마저 외적을 토벌하는 데 공이 많은 이세민을 시기하고 의심하던 터였다. 이세민이 위기에 처해 있던 무덕(武德) 9년(626년), 태백 금성이 대낮에 잇달아(6월 29일, 7월 1일) 남쪽 하늘 꼭대기에 나타났다. 혁명의 전조였다.

“진왕(秦王, 이세민)이 천하를 갖게 될 징조입니다.”

천문에 정통한 학자 부혁(傅奕)의 이 말을 듣고 고조는 이세민을 불렀다. 이세민이 자신의 결백함을 주장하며 이건성과 이원길이 자신을 모해한다고 아뢰자, 고조는 “짐이 내일 심문해보겠다”라고 한다. 드디어 7월 2일, 날이 밝았다. 고조의 부름을 받은 이건성과 이원길이 현무문(玄武門)에 들어섰다. 현무문을 지키던 심복이 이미 이세민의 편이 되었음을 전혀 알지 못한 채 말이다. 이상한 낌새를 느낀 이건성이 되돌아가려는 순간 이세민이 그를 불렀다. 이어서 이세민이 쏜 화살이 그의 목을 관통했다. 황급히 도망가려던 이원길은 이세민의 부하가 쏜 화살을 맞고 죽었다. 사흘 뒤 고조는 이세민을 황태자로 명한다. 9월 3일에 양위 조서가 발표되고, 이튿날 이세민은 마침내 황위에 오른다.

장안성 태극궁(太極宮)의 북문인 현무문에서 벌어진 이세민의 유혈 쿠데타를 ‘현무문의 변(變)’이라고 한다. 태극궁이 있던 자리에는 오늘날 현대식 건물들이 들어서 있고, 동쪽으로는 대명궁(大明宮) 국가유적지공원이 있다. 복원 공사를 거쳐 2010년에 개방한 대명궁 국가유적지공원은 ‘실크로드의 동방 성전(聖殿)’이라 칭해지는 대명궁이 있던 곳이다. 대명궁 유적지는 2014년 6월에 실크로드 문화유산으로서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기도 했다. 둘레 7628m에 면적은 3.2㎢로, 베이징 자금성(紫禁城)의 4.5배 규모인 대명궁은 대당성세(大唐盛世)의 상징이다.

유종의 미 거두지 못한 태종과 현종
성당(盛唐)의 번영을 이끈, ‘개원(開元)의 치’의 주인공 당 현종(玄宗) 이융기(李隆基, 685~762년) 역시 현무문과 깊은 인연이 있는데 그 인연을 간략히 알아보자. 690년, 측천무후(則天武后)는 이융기의 아버지 예종(睿宗)을 폐위시키고 중국 역사상 유일무이한 여황제가 된다. 705년, 재상 장간지(張柬之)가 좌우우림병(左右羽林兵) 500여명을 이끌고 현무문을 장악한 다음 황궁으로 들어가 와병 중이던 측천무후를 퇴위시키고 중종(中宗)을 복위시킨다. 

710년, 중종의 황후인 위후(韋后)가 딸 안락(安樂)공주와 공모해 중종을 독살하고 이중무(李重茂)를 꼭두각시 황제로 앉힌 다음 제2의 측천무후가 되고자 획책하던 중, 이융기가 이를 무산시킨다. 고모인 태평(太平)공주와 연합해 현무문을 점령하고 황궁에 들어가 위후와 그 일당을 제거한 것이다. 예종은 20년 만에 아들 이융기 덕에 황위에 다시 오르게 된다. 태자인 장남 이성기(李成器)는 스스로 태자의 자리를 이융기에게 양보했다. 712년, 이융기는 황제가 된다.

태종은 ‘태극궁’의 현무문의 변으로 황제가 되었고, 현종은 ‘대명궁’에서의 현무문의 변 즉 ‘당융정변(唐隆政變)’을 통해 황제가 될 수 있었다. 현무문은 이처럼 역사의 흐름을 뒤바꿔 놓을 수 있는 장소였다. 황궁의 남쪽인 외조(外朝)는 황제가 공적인 업무를 보는 공간이고, 북쪽인 내정(內廷)은 황실의 사적 공간이다. 황궁의 북문인 현무문은 내정의 울타리였기에, 이곳을 장악하는 것이 결국 정권의 장악으로 이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안녹산의 난을 피해 촉 지역으로 가는 현종 일행을 묘사한 명황행촉도, 타이베이 고궁박물원 소장

안녹산의 난을 피해 촉 지역으로 가는 현종 일행을 묘사한 명황행촉도, 타이베이 고궁박물원 소장

현무문의 변으로 황제가 될 수 있었던 태종과 현종은 각각 ‘정관의 치’와 ‘개원의 치’라는 성세를 이끌었다. 이 증조부와 증손자는 닮은 점이 또 있다. 안타깝게도 두 사람은 ‘유종의 미’를 거두지 못했다. 태종은 마흔에 접어들면서 점차 납간을 꺼렸고 신하들의 만류에도 끝내 고구려 침공을 단행했으며 건강이 악화된 이후로는 미신과 장생술에 빠져들었다. 현종의 상황은 더 나빴으니, 당나라를 내리막으로 치닫게 한 안사(安史)의 난까지 겪게 된다.

천보(天寶) 15년(756년), 안사의 난으로 장안이 반란군에 점령된 와중에 황급히 도망길에 나선 현종 앞에 곽종근(郭從謹)이라는 노인이 나타나 열변을 토한다. “선대의 제왕들은 충성스런 이들의 견해를 두루 듣고자 했다, 지금은 조정 대신이 모두 직언을 꺼리고 그저 황제의 비위를 맞추고자 아부만을 일삼는다, 이들 탓에 황제가 궁문 밖의 일을 전혀 알지 못한다, 오늘 같은 일이 있으리라는 것을 일찌감치 알았기에 알리고자 했으나 아뢸 길이 없었다….” 현종에게는 그야말로 뼈아픈 지적이었다. “이는 짐이 어리석은 탓이다. 이제 후회해도 어쩔 수가 없구나!”라는 자책이 절로 나왔다. 장안 서쪽 마외역(馬嵬驛)에 이르렀을 때, 현종은 수행 병사들의 요구에 따라 그토록 사랑하는 양귀비(楊貴妃)에게 죽음을 명할 수밖에 없었다. 황제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고 일개 병졸마저 불손한 태도를 취했다. 양귀비를 떠나보낸 지 사흘째 되던 날, 사태를 수습할 기회가 찾아왔다. 성도(成都)에서 조정으로 보낸 비단이 마침 현종 일행이 머물고 있던 부풍(扶風)에 도착한 것이다. 현종은 병사들을 불러모아 놓고 자신을 꾸짖으며 그들을 위로했다. “사리에 어두워져 사람을 잘못 쓴 탓에 안녹산(安祿山)이 모반을 일으키는 지경에 이르렀다, 다들 가족과 작별인사도 하지 못한 채 따라오면서 정말로 고생이 많다, 매우 부끄럽다, 촉(蜀) 지역으로 가는 길은 험하고 머니 각자 집으로 돌아가도 좋다, 이 비단을 나눠 갖고 돌아가서 각자의 부모와 장안성의 노인들에게 안부를 전해 달라”는 말을 하며 눈물을 비 오듯 쏟았다. 그러자 다들 따라 울면서, 죽든 살든 폐하를 따르겠다고 맹세했다. 병사들의 불손한 태도는 이로써 사그라졌다.

수도 장안을 버리고 도망길에 나섰던 황제로는 또 덕종(德宗)이 있다. 절도사의 반란으로 쫓기던 와중(783년)에 그는 ‘죄기조(罪己詔)’를 공표한다. 나라 다스리는 일에 어두웠고 위태로움을 잊은 채 편안함에 안주했으며 백성의 어려움도 모른 채 하늘의 질책과 백성의 원망을 알지 못했다는 내용의 죄기조를 발표하자, 모두 감읍하고 민심과 군심이 하나가 되어 난을 평정했다고 한다.

가뭄과 메뚜기 떼의 재난 극복
‘죄기조’란 천재지변이나 정권이 위기에 직면했을 때 제왕이 자신을 꾸짖는 내용을 담아 공개적으로 알리는 것이다. 현종의 경우처럼 말의 형식일 수도 있고, 덕종의 경우처럼 글의 형식일 수도 있다. 죄기조의 기원은 성군(聖君)으로 칭송받는 은(殷)나라 탕왕(湯王)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오래도록 가뭄이 들자 탕왕은 “나 한 사람의 죄에 백성을 연루시키지 마시고 백성의 죄는 나 한 사람에게 책임을 물으십시오”라고 신에게 기도하면서 다음의 여섯 가지로 자신을 반성했다.

“정치가 법도에 맞지 않아서입니까? 백성의 생계를 잃게 만들어서입니까? 궁실을 사치스럽게 지어서입니까? 여인들의 말에 휘둘려서입니까? 뇌물이 성행하도록 해서입니까? 알랑거리는 소인들이 득세하도록 해서입니까?”

탕왕의 기도가 끝나자 수천리에 걸쳐서 큰비가 내렸다.

하늘을 감동시키는 것은 다름 아닌 백성을 감동시키는 것이다. 정관 2년(628년), 장안 일대를 휩쓴 가뭄과 메뚜기 떼의 천재(天災)를 겪으면서도 백성의 원망을 듣지 않았던 당 태종의 일화가 이를 잘 말해준다. 자식까지 팔아야 하는 기근이 발생하자 태종은 “가뭄이 든 것은 군주가 덕을 잃었기 때문이다. 짐의 덕이 부족하여 하늘이 짐을 꾸짖는 것인데 백성이 무슨 죄가 있어 곤궁에 처한단 말인가!”라며, 팔려간 자식들의 몸값을 국고로 치러주고 부모에게 돌려보내도록 했다. 또한 “풍년이 들고 천하가 평안할 수만 있다면 짐이 기꺼이 재앙을 받겠다”라는 내용의 조서를 발표했다. 얼마 뒤 비가 내렸다. 이어서 메뚜기 떼가 장안을 덮치자 태종은 메뚜기를 꽉 쥐고서, “백성에게는 곡식이 생명이거늘 네가 그것을 먹어 치우니 차라리 내 폐와 장을 먹어라!”라며 주문을 걸 듯 빌었다. 좌우의 신하들이 병에 걸린다며 말리자 “짐은 백성을 위해 재난을 받고자 하는 것이니, 어찌 병을 피하겠느냐!”라며 끝내 메뚜기 몇 마리를 삼켰다. 이윽고 메뚜기로 인한 재난이 사그라졌다. 이 정도면 정치를 예술의 수준으로 끌어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민심을 얻기 위한 예술이 바로 정치 아닌가! 가뭄과 메뚜기 떼로 인한 고난은 ‘정관의 치’를 더욱 빛나게 해준다.

지난해 세월호 참사에 이어 올해는 역병이 대한민국을 덮쳤다. 당 태종의 예술적 정치는 차치하더라도, 3700년 전 탕왕의 자기 반성이 부럽기만 하다. 40년 만의 최악의 가뭄까지 더해진 ‘하 수상’한 때가 아닌가.

<연세대 인문학연구원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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