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맛을 맘껏 즐기며 볼 수 있는 TV 드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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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을 따스하게 해 주는 그 드라마의 이름은 ‘how i met your mother’. 이 드라마를 내가 좋아하는 이유는, 전편을 통틀어 한 줌의 악의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병맛의 참을 수 없이 사랑스러운 점이다.

이제는 ‘무한도전’이 뭔지 알아보려는 노력조차 포기했다. 텔레비전을 지니고 살지 않은 지도 오래 되었지만, 어쩌다 친척집을 방문했을 때도 텔레비전이 큰 소리를 내며 켜져 있을 때 흠칫 하고 놀라서 도망치는 자신을 발견하고 만 것이다. 드디어 고백할 수밖에 없다, 나는 텔레비전이 무섭다고. 사실 요즘은 인터넷도 무섭다. 하루에도 몇 번씩 ‘헉!’ ‘충격!’ ‘알고보니…’라는 식으로 외마디 소리를 지르거나 사람을 낚는 뉴스 헤드라인이 무섭다. 사람들이 올리는 게시물과 댓글도 좀 무섭다. 그저 우리는 보이지 않는 통신망으로 연결되어 있을 뿐인데 거기서 오가는 사랑과 저주, 나는 이런 것을 견뎌내기엔 너무 겁쟁이다. 사람들이 뿜어내는 사념이랄까 정념이랄까, 뭐 그런 것.

한국 드라마, 보는 것만으로도 무서워
이런 두려움은, 나의 이런 병신성은 세월이 지날수록 점점 짙어진다. 열렬하게 TV를 보고 SNS로 ‘인맥’을 관리하는 사람들을 멍하니 보고 있자면 그들의 이글거리는 욕망이 두렵다. 내게도 그런 게 있다면 함께 춤을 출 텐데, 그 춤에 끼고 싶지도 않고 낄 수도 없는 나 같은 인간의 그림자는 그들이 빛날수록 더욱 짙어진다. 혹시 나 찌질이 아니야? 루저 아니야? 하고 가끔 그들이 어두운 얼굴을 비칠 때 뚝뚝 떨어지는 감출 수 없는 슬픔, 그런 것은 병신력이 센 나 같은 사람에게는 유독 잘 보여 마음이 슬퍼진다.

TV 토크쇼 같은 것도 얼어붙을 만큼 매정할수록, 가차없이 남을 웃음거리로 만들수록 사람들의 열광을 사는 이런 세계는 나처럼 병맛으로 이루어진 사람의 심장으로는 견디기 힘들다. 잡아먹을 듯한 눈빛으로 브라운관을 뚫고 나올 듯이 섹시 댄스를 추는 아이돌들도 부담스럽고, 토크 프로그램에서도 내가 빵 터뜨리고야 말겠다는 의욕으로 가득 찬 패널들도 마찬가지다. 서로를 떨어뜨리는 서바이벌 프로그램의 어느 장면 같은 건 지나가다 듣는 것만으로도 아니 저렇게 서로 심하게 말해도 되나, 저렇게까지 이야기를 해야 하나, 하면서 깜짝깜짝 놀라고 내가 풀이 죽어 버리는 걸 보면 나라는 인간은 도무지 요즘 세상에 살아갈 자격이 없는 종자인지도 모르겠다. 신이시여, 병신들은 다 죽어야 됩니까???

드라마 「how i met your mother」의 포스터 .

드라마 「how i met your mother」의 포스터 .

그렇지 않다! 라고 신이 말씀하시듯 내가 병맛을 마음껏 즐기며 볼 수 있는 텔레비전 드라마가 하나 있어서 나처럼 마음이 연약한 병맛 동지들에게 소개해 드리고자 한다. 한국 드라마냐고? 그럴 리가. 한국 드라마는 보는 것만으로도 부들부들 무섭다. 일단 남녀를 불문하고 이렇게 해야 살아남는다!!!! 라는 느낌으로 시술인지 수술인지를 연발해서 사정없이 비슷하게 아름다워진 얼굴들은 보기만 해도 그 결기가 무섭다. 그런 점에서 외국 드라마는 약간 거리감을 가질 수 있어서 좋지만, ‘섹스 앤 더 시티’ 같은 류는 좀 섬칫하다. 한 번 여자로 태어났으면 저 정도로 커리어도 화려하게 쌓고, 날고 기는 남자들을 내 앞에서 턱짓으로 부려도 보고, 끝장나는 몸매에 폼나는 명품을 걸치고 특히 마놀로 블라닉 50켤레로 가득 찬 옷장도 안 가져 보고 죽는 건 실패한 인생이라는 생각밖에 안 들게 해서 무섭다.

그래서 이번 해에 9시즌으로 종영했으니 나 말고 다른 사람들도 병맛에 많이 공감했구나, 하고 내 마음을 따스하게 해주는 그 드라마의 이름은 ‘how i met your mother’. 우리나라에도 30·40대라면 아실 80년대 외화 ‘천재소년 두기’의 아역배우로 유명했던 닐 패트릭 해리스가 출연한다. 출연진이 엄청 호화판이라고 말하기는 좀 그렇지만 최근 출연진 중 한 명인 ‘로빈’ 역을 맡은 코비 스멀더스가 블록버스터 영화 ‘어벤저스’에 마리아 힐 역으로 출연했을 때는 동네 친구가 출세한 것처럼 흐뭇했다. 대단한 주제 없이 제목 그대로 주인공인 테드가 미래의 아이들에게 “내가 너희 엄마를 어떻게 만났냐 하면 말이다…” 하고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한도 끝도 없이 끌어가는 이 드라마를 내가 좋아하는 이유는, 전편을 통틀어 한 줌의 악의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병맛의 참을 수 없이 사랑스러운 점이다. 병신 같지만 애가 나쁜 애들은 아니야, 하는 그 악의 없음. 이를테면 ‘섹스 앤 더 시티’에서 캐리를 마다하고 젊고 명민한 명문가 출신의 여성 나타샤와 결혼해 버린 미스터 빅이 캐리에게 다시 접근해 왔을 때, 캐리는 그것을 거부하지 못한다. 누가 자신들을 알아볼까봐 두려워서 구질구질한 동네의 찜통처럼 구질구질한 모텔에서 구질구질한 정사를 시도하고, 끝내는 나타샤가 부재 중일 때 그들의 신혼집까지 정사 범위를 확대한다. 마침내 나타샤가 캐리를 발견하고 그러다 앞니가 분질러지고 캐리는 이후 나타샤에게 공개적으로 경멸을 받지만 그렇게 경멸을 받는다는 이유로 또 마음이 상하는데… 하고 나는 여기까지 대략의 줄거리를 타이핑하는 것만으로도 벌써 마음이 움츠러든다. 대도시에서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구질구질한 비극, 사소한 악의, 돌이킬 수 없는 관계, 이런 걸 보는 것만으로도 우울증을 지극히 경계하며 살아가는 나로서는 벌써 마음이 침울해지는 것이다.

병맛 친구 없으면 이 세상 어떻게 살까
‘how i met your mother’는 그런 점에서 한없이 안심하고 마음을 푹 놓은 채 볼 수 있다. 내가 좋아하는 에피소드는 수없이 많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좋아하는 이야기는 이것이다. 친구들이 우연히 서로의 첫경험 이야기를 하게 되는데, 모두들 스무 살이 안 되었을 때 경험을 했지만 한 친구가 화제를 슬슬 피한다. 그것도 통상 200명의 여성과 관계를 가졌다고 자축 파티를 열 정도로 어마어마한 바람둥이인 바니가 이야기를 하지 않으려 하자 다른 친구들은 모두 궁금해 죽으려 한다. 바니는 계속 말을 더듬는다.

“우리 가족은 여름이 되면 아버지 친구인 캘러맨씨 산장에 가서 휴가를 보내곤 했어….” “그런데? 그래서 어떻게 됐냐구?” “거기서 어떤 소녀를 만났는데, 이름이 프랜시스 하우스먼이었지만 친구들은 다들 그 애를 베이비라고 불렀지….” “야!! 그건 영화 ‘더티 댄싱’이잖아!!!” 계속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주워섬기다가 결국 바니는 울적한 과거를 털어놓는다. 지금은 악덕 기업에서 신자유주의의 총아로 살아가는 바니는 사실 과거에 히피처럼 머리를 길게 기르고 자연보호에 관심이 많은 숫총각이었는데, 순정을 준 여자친구를 지금 자신처럼 신자유주의의 총아 노릇을 하는 남자에게 빼앗긴 것이다.

그리고 친구들의 다그침에 못 이겨 좋아 이제 속 시원하냐! 하며 털어놓은 바니의 첫 경험이라는 것도 우울하기 짝이 없다. 한때 ‘맨메이커’라고 불리던 동네의 섹시한 아주머니에게 바니의 잘생긴 남동생이 자신이 한 번 섹스를 제공할 테니 형의 총각 딱지를 떼어 달라고 거래를 한 거였다. 화려한 척 생활하면서 이런 과거를 가슴에 묻고 있던 바니가 죄다 털어놓은 후 구겨진 얼굴을 하고 있자, 친구들이 조심스레 묻는다. “저기, 하우스먼씨는 베이비와 너 사이를 못마땅하게 여기지 않았어?” 구겨진 얼굴을 하고 있던 바니의 얼굴에서 슬슬 미소가 돌아온다. “그럼, 하우스먼씨는 나를 아주 싫어했지.” “그럼 베이비와 너 사이에 풍파가 많았겠네?” “우리 사이는 곤란한 일이 많았고말고! 하지만 우리는 진심으로 사랑했어….” “그래서 어떻게 됐어? 이야기를 더 해줘.” “그래서 베이비와 내가 어떻게 되었느냐 하면….”

내가 비슷한 구도의 ‘프렌즈’보다 이 드라마를 더 좋아하는 것은 솔직히 이 모든 대화가 술집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인 것도 있는 듯하다. 그럼, 병맛은 술과 뗄 수 없고말고다. 맥주병을 하나씩 들고 친구들은 바니가 늘어놓는 ‘베이비’와의 엉터리 러브스토리를 계속해서 들어준다. 유리멘탈도 아니고 달걀껍질로 만들어진 멘탈을 지닌 나는 텔레비전과 인터넷을 극소량만 취하고 뉴스 같은 것도 가려 보며 세상에서 나를 보호하려고 애쓰는데도 혈압이 올라 살 수가 없어, 이런 병맛 지닌 드라마를 보고 또 보는 것으로 현실과 내 병맛을 애써 조정하고 있다. 물론 현실을 무엇도 피하지 말고 부딪혀 이겨내라고 야단치는 강신주 선생 같은 분의 책을 보기는 하지만 다른 한 눈으로는 「how i met your mother」처럼, “그래서 베이비는 어떻게 됐어?”라고 물어주는 병맛 친구들이 없으면 이 세상을 어떻게 견딜까. 가진 거라곤 병맛밖에 없는 내가 누군가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다만 누군가 괴로운 이야기를 할 때 잠자코 들어준 후, 이렇게 말하는 것뿐이다. 그래서, 베이비의 아버지는 베이비와 당신 사이를 못마땅하게 여기지 않았나요? 어떻게 됐는지 더 들려줘 봐요, 켈러맨씨 산장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김현진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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