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0년 전 현장법사의 ‘서천취경’ 21세기 중국·인도 가교가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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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는 삼장법사로 더 익숙한 현장법사. <서유기(西遊記)>에 나오는 삼장법사의 실제 모델인 그는 조정 몰래 인도로 가서 중생을 구제할 수 있는 부처님의 말씀을 가져왔다. 그로부터 오랜 세월이 지난 올해 5월 14일, 중국 국가주석 시진핑은 시안에서 인도 총리 모디를 맞이했다. 둘은 함께 시안 자은사(慈恩寺)를 방문했는데, 이곳은 바로 현장이 인도에서 가져온 불경을 보관하기 위해 만든 대안탑(大雁塔)이 있는 장소다.

지금으로부터 1400여년 전(602년) 진(陳)씨 집안에 넷째 아들이 태어났다. 10년 뒤 그 아이의 아버지는 세상을 떴다. 둘째 형은 출가했다. 아이 역시 삭발하고 스님이 되었다. 그리고 처음엔 형을 따라서, 나중엔 홀로 각지를 다니며 고승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 그런데 배우면 배울수록 그는 혼란스러워졌다. 같은 불교이건만 종파와 교리가 너무 달랐다. 불경이 ‘번역’을 거치는 과정에서 생겨나는 오류는 그러한 분규의 주요 원인이기도 했다.

현장을 맞이한 당나라 태종의 후안무치
‘무엇이 진리란 말인가? 어디서 답을 구할 수 있을까?’ 한창 고민에 빠져 있던 그에게 결단의 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답은 불경에 있으니, 그것을 직접 보고 배우고 가져와야 했다. 운명이었다. 일찍이 그가 태어나던 날, 그의 어머니는 꿈을 꾸었다. 흰옷을 입은 스님이 서쪽으로 가고 있는 꿈이었다. “내 아들아, 지금 어디로 가려는 거냐?” “부처님의 진리를 구하러 갑니다.”

운명이고 사명(使命)이었다. 그 옛날 법현(法顯)대사와 지엄(智嚴)대사 모두 중생을 계도하고자 서천으로 가지 않았던가! 그 뒤를 이어야 한다는 사명감이 그를 움직였다. 여정을 짜고 여비를 모았다. 부처님께 상서로움의 징조를 간구했다. 그리고 꿈을 꾸었다. 망망대해에 수미산이 높이 솟아 있는 꿈.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왼쪽)이 인도 뉴델리에 도착,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오른쪽)와 만나 악수를 나누고 있다. | 연합뉴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왼쪽)이 인도 뉴델리에 도착,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오른쪽)와 만나 악수를 나누고 있다. | 연합뉴스

그 산에 올라가고 싶다. 파도가 포효하고 배조차 없다. 하지만 두렵지 않다. 바다에 발을 들여 놓았다. 순간 파도를 뚫고 석연화(石蓮花)가 솟아나는 게 아닌가!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석연화가 생겨났다. 순식간에 산 아래까지 갔다. 하지만 깎아지른 듯한 산을 올라갈 방법이 없다. 이번에는 휙 몸을 위로 솟구쳤다. 순간 회오리바람이 불어와 산 정상에 올랐다. 사방을 바라보니 그 어떤 장애물도 없이 확 트여 있다.

그는 기뻐하며 잠에서 깼다. 그리고 즉시 길을 떠났다. 이때가 정관(貞觀) 3년(629년). 두려움 없이 바라는 길을 가면 ‘탁 트임’에 도달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 20대의 현장(玄奘)은 그 믿음에 의지하여 장안을 떠나 인도로 향했다. 목숨을 걸어야 하는 여정이었다. 오늘날 우리처럼 그저 비행기에 몸을 싣기만 하면 손쉽게 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고비사막에 들어선 현장을 떠올리면 그가 느꼈을 절대고독에 몸서리가 쳐진다. 방향조차 가늠할 수 없는, 새도 짐승도 풀도 없고 물도 없는 망망한 사막을 홀로 헤쳐 나가야 하는 이의 마음이란! 가고 또 가도 모래뿐인 사막, 할 수 있는 건 끝없는 그 길을 그저 쉼 없이 걷고 또 걷는 일. 적막감이 그를 휘감고 두려움이 엄습했다. 사막에서 길을 잃고 여러 날 물 한 방울 축이지 못한 그는 결국 쓰러졌다. 쓰러진 채 기도했다. 재물을 탐내서도 아니고 명예를 바라서도 아니고 오로지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가는 길이니 제발 굽어살펴 주시라고. 그날 밤 그는 꿈을 꾸었다. 아주 커다란 신이 나타나서 말하길, 왜 나아가지 않고 누워 있느냐고 한다. 깜짝 놀라 잠에서 깬 그는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놀랍게도 맑은 연못이 그를 기다리고 있다. 이 기적의 장소에서 하루를 머문 그는 이튿날 다시 길을 떠났다. 그리고 이틀 뒤에 사막에서 벗어났다.

우리에게는 삼장법사로 더 익숙한 그 현장법사의 이야기다. <서유기(西遊記)>에 나오는 삼장법사의 실제 모델이 바로 그이다. 판타지 <서유기>에 현실의 논리를 갖다대는 게 어불성설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쑥 드는 생각이 있다. ‘손오공이 휘리릭 하고 불경을 가져오면 다들 고생하지 않아도 될 텐데.’ <서유기>의 핵심은 바로 이런 생각의 대척점에 있다. 중생을 구제할 수 있는 부처님의 말씀은 결코 ‘휘리릭’ 가져올 수 있는 게 아니다. ‘고생 없이’ 가져올 수 있는 것도 결코 아니다. 81난(難)의 지난한 과정이야말로 ‘서천취경(西天取經)’의 합법성을 담보해주는 것이리라.

당나라 현장법사가 인도에서 가져온 불경을 보관하기 위해 652년에 세운 중국 시안의 대안탑. | 경향신문

당나라 현장법사가 인도에서 가져온 불경을 보관하기 위해 652년에 세운 중국 시안의 대안탑. | 경향신문

사실을 왜곡한 소설 속 역사 판타지
그런데 <대자은사삼장법사전(大慈恩寺三藏法師傳)>의 기록에 따르면, 현장이 ‘구도(求道)의 길’에서 처음으로 극복해야 했던 난관은 놀랍게도 당나라 조정이었다. 그 당시 당나라는 나라 밖으로 나가는 것을 엄격히 금하고 있었다. 현장은 인도로 가는 것을 허락해 달라고 태종(太宗)에게 여러 차례 상소를 올렸지만 번번이 거절당했다. 합법적인 길은 막혀 있었다. 그는 국법을 어기는 것을 감수하고 몰래 인도로 향했다. 현장의 행적을 알게 된 조정에서는 그를 잡아들일 것을 명했다. 잡혀서 장안으로 압송될 뻔한 위기도 여러 번 겪었다. 어디 그뿐인가. 변방 수비대가 낯선 이를 향해 날리는 화살에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다. 겨우 월경에 성공한 뒤 갖은 고생 끝에 도착한 인도, 그곳에서 그는 열심히 답을 구했다.

정관 19년(645년) 정월, 현장은 마침내 장안으로 돌아왔다. 645년, 우리 역사에서도 잊을 수 없는 해이다. 당 태종이 고구려를 침공한 바로 그 해가 아닌가! 현장이 장안으로 돌아왔을 때 공교롭게도 태종은 장안에 없었다. 요동(遼東) 출정을 앞두고 낙양(洛陽)에 머물고 있었던 것이다. 현장의 귀국 소식을 들은 태종은 서둘러 그를 낙양으로 불러들였다. 태종의 팽창 야욕은 동서로 모두 뻗어 있었다. 그에게는 현장이야말로 서역의 정보를 알려줄 가장 믿을 만한 정보원이었던 것이다. 제사보다 젯밥에 관심이 있었던 태종이 현장을 만나서 건넨 첫 마디, 정말 기가 차는 말이다.

“법사는 떠나면서 왜 조정에 알리지 않았소?”

“제가 떠나고자 할 때 거듭 아뢰었나이다. 하지만 제 정성이 미천하여 윤허를 받지 못했나이다. 도를 흠모하는 마음을 이기지 못한 채 몰래 떠났사옵니다. 멋대로 행동한 죄, 심히 부끄럽고 두렵사옵니다.”

절대권력을 지닌 이의 저 후안무치함! 그 앞에서 도리어 용서를 빌어야 하는 어처구니없는 이 상황! 그런데 <서유기>에서는 장안에서 현장을 맞이한 태종이 건넨 첫 마디가 “동생(御弟) 오셨는가?”이다. 이후에 펼쳐진 환대는 두말할 나위 없다. 실제 역사에서 현장이 태종의 부름을 받고 낙양으로 간 때가 정관 19년 2월, 태종이 고구려로 쳐들어간 것도 2월이다. 현장을 만난 뒤 바로 침략 전쟁에 나선 것이다. 춘추시대 공자도 자신의 이상을 현실에 구현하지 못했듯 현장도 그러했다. 왕은 그들을 존중하는 척했을 뿐 그들의 진심에는 마음을 열지 않았다.

<서유기>가 아무리 판타지라지만 소설 속에서 뒤틀려버린 이 내용은 꼭 짚고 넘어갔으면 한다. 현장이 인도로 떠나게 되는 장면이 담긴 12회의 이야기다. 태종은 수륙재(水陸齋)가 열린 자리에서 이렇게 말한다.

“누가 짐의 뜻을 받들어서 서천(西天)으로 가 부처에게 경배하고 경을 구해 오겠는가?”

“소승이 비록 재주는 없사오나 견마지로(犬馬之勞)를 다하겠나이다. 폐하께 진경(眞經)을 구해드리고 우리 왕의 강산이 영원히 굳건하길 기원하겠사옵니다.”

전례 없는 양국의 밀착도 ‘친디아’
‘진리’를 찾고자 목숨을 걸고 떠났던 현장의 열정이 위대한 ‘왕조’를 위한 서사로 탈바꿈하는 순간이다. 국법을 어기고 감행한 구도의 길이었거늘, 소설에서는 공식적인 출사(出使)가 된 것이다. 태종은 현장과 형제의 의를 맺고 그를 “어제(御弟) 성승(聖僧)”이라 부른다. 현장을 위해 통행 허가증을 발급해주고 시종과 말도 준비해준다. 그리고 관문까지 현장을 배웅하러 간다. 한사코 거절하는 현장에게 태종이 기어코 이별주를 권하는 장면은 의미심장하다. 현장이 마지못해 술잔을 받아든 순간 술잔에 흙을 집어넣으며 태종이 하는 말,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고 길이 멀다오. 동생은 이 술을 마시도록 하오. 고향의 흙을 그리워할지언정 타향의 황금 만 냥을 사랑하진 마시게.” 태종의 깊은 뜻에 감격한 현종은 그 술을 남김없이 마신 뒤 길을 떠난다. <서유기> 곳곳에 등장하는 온갖 요괴들의 이야기보다 이 장면이 더 판타지스럽다. 현장의 길을 어떻게든 막으려 했던 훼방꾼이, 그 길을 떠나도록 만든 주관자로 탈바꿈된 역사 판타지! 사실의 왜곡을 넘어선 ‘진실’의 왜곡이다. 소설이니까 이쯤에서 그만 다그치자. 아무튼 현실의 절대권력이 상상세계의 질서에까지 그 힘을 뻗친다는 또 다른 사실 앞에서 오싹할 뿐이다.

“두 개의 몸, 같은 종류의 정신.” 지난해 인도의 구자라트를 방문한 시진핑 국가주석에게 모디 총리가 한 말이다. 모디는 ‘구자라트’가 바로 그러한 양국 관계의 예라고 했다. 구자라트는 모디의 고향이자 그 옛날 현장이 들렀던 곳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시진핑은 모디의 말을 받아 그를 시안으로 초청하겠다며, “내 고향 산시성 시안”이 그 옛날 현장이 불경을 가져와 번역했던 곳이라고 강조했다. 두 사람이 회담을 가진 날은 마침 모디의 64세 생일(9·17)이기도 했다. 시진핑이 준비해온 선물에는 ‘현장의 길’이라는 다큐멘터리 영화 CD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불과 여덟 달 만인 올해 5월 14일, 시진핑은 시안에서 모디를 맞이했다. 이렇게 양국의 ‘고향 외교’가 완성된 것이다.

지난해 8월, 우즈베키스탄 대통령 이슬람 카리모프가 중국을 방문했을 때 가장 먼저 들른 곳도 ‘시안’이다. 이는 2013년 9월에 시진핑이 카리모프의 고향인 사마르칸트에 들렀던 것에 대한 답방이었다. 그때 사마르칸트의 테무진(칭기즈 칸) 가족역사박물관을 찾은 두 사람은 박물관에 전시된 고대 실크로드 지도를 보며 대화를 이어 나갔다. “사마르칸트는 테무진 시기의 수도이자 고대 실크로드의 중추였고 나의 고향”이라고 카리모프가 말하자 시진핑은 지도의 오른쪽 부분을 가리키면서 “여기가 시안인데 실크로드의 기점이자 나의 고향”이라고 했다.

이렇게 시진핑은 시안을 활용한 고향외교술을 십분 발휘하면서 일대일로(一帶一路)의 신(新)실크로드 전략을 착착 실행에 옮기고 있다. 시진핑이 지난달 시안을 찾은 모디와 함께 둘러본 곳은 자은사(慈恩寺)다. 현장이 인도에서 가져온 불경을 보관하기 위해 만든 대안탑(大雁塔)이 바로 이곳에 있다. 시진핑과 대안탑에 올라간 다음날, 모디는 리커창(李克强) 총리와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가진 회담에서 국경 분쟁을 협상으로 해결하기로 합의했다. 그리고 100억 달러에 달하는 경제협력 협정을 체결했다.

지난해 9월 시진핑이 인도를 방문했을 때 중국 언론은 “중국 용과 인도 코끼리의 평화로운 공존”을 강조했다. 친디아(Chindia)라는 하나의 단어처럼 양국의 밀착도가 전례없이 강화된 지금이다. 세계 인구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양국의 평화로운 공존에 현장은 어떤 역할을 한 것일까? 시진핑이 연출한 영화(국가 서사) 속의 오브제? 그 영화에 시안만큼 적절한 촬영 장소는 없을 터이다. 모름지기 영화 관람의 포인트는 감독의 연출 의도를 꿰뚫는 데 있다.

<연세대 인문학 연구원 연구원>

이유진의 중국 도읍지 기행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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