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진의 중국 도읍지 기행

역대 수도는 중국 ‘길찾기’ 훌륭한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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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중국을 알아야 하는지 그 필요성을 설파하는 게 군더더기로 여겨질 만큼 오늘날 중국은 막중한 존재가 되어 버렸다. 중국의 역사는 그런 중국을 알아가는 아주 중요한 ‘길(방법)’이다. 중국이 어떤 ‘길(과정)’을 거쳐 왔는지 차근차근 되짚어볼 것이다. 이는 궁극적으로 중국의 ‘길(자격)’이 지닌 정체성에 대한 탐색이다.

나는 심각한 ‘길치’다. 지금껏 방향 감각이 나보다 떨어지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안면인식장애에 빗대어 말하자면 일종의 ‘길인식장애’라고나 할까. 이렇다 보니 어딜 가든 남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낭패를 보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자면 나의 길치 성향은 ‘공간(space)’에 한정된 것이다. ‘장소(place)’는 별개의 문제다. 지리인문학자인 이-푸 투안은 물리적 공간에 인간의 감정이 부여된 의미 공간을 ‘장소’로 보았다. 인간이 살아가는 데는 물리적 공간 외에도 삶터에 대한 애정이 깃든 장소가 필요하다. 이러한 장소에 대한 사랑이 바로 이-푸 투안이 말한 ‘토포필리아(topophilia·그리스어로 장소를 뜻하는 토포스(topos)와 사랑을 의미하는 필리아(philia)의 합성어)’다. 지혜에 대한 사랑인 필로소피아(philosophia)를 추구하는 인간은 장소에 대한 사랑인 토포필리아를 추구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토포필리아는 인간의 몸과 마음에 각인되는 것이기에, 필로소피아에 우선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중국 시안의 야경 | 스포츠 경향

중국 시안의 야경 | 스포츠 경향

광대한 중국, 어느 시대 어느 지역 이야기
한동안 이 지면을 빌려 중국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중국’이라는 하나의 단어로 뭉뚱그려 말하기에는 너무도 다양한 천의 얼굴을 지닌 ‘그곳’에 대한 이야기다. 중국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중국은 어떠하다’는 식으로 단순히 정의하는 것만큼 어리석고 위험한 일은 없을 터이다. 다른 나라에 대해서도 단순한 정의는 피해야 하지만, 광대한 땅과 오랜 역사와 다양한 민족을 지닌 중국의 경우에는 더더욱 그렇다. 중국에 대한 단순하고 피상적인 정의를 넘어서 다양한 중국의 속살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구체적으로 어느 시대 어느 지역의 중국에 대해 말해나가는 방식이 필요하다.

이와 동시에 오늘날 중화인민공화국이 지향하고 있는 단일한 실체로서의 ‘중국’의 모습을 포착할 필요도 있다. 56개 민족을 ‘중화민족’이라는 단일한 ‘상상의 공동체’로 엮어내는 메커니즘에는 과거·현재·미래가 밀접히 연동된다. G2의 가시적 현실은 현재 중국으로 하여금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를 대신할 팍스 시니카(Pax Sinica)라는 미래를 꿈꾸게 한다. 중국은 세계의 정점에 있었던 찬란한 과거를 미래의 자원으로 동원할 뿐만 아니라 과거를 통해 미래의 중국상에 대한 모종의 당위성까지 획득하고자 한다. 일찍이 나폴레옹은 중국을 ‘잠자는 사자’에 비유하면서 “사자가 잠에서 깨어나면 온 세상을 진동시킬 것”이라고 했다. 작년 3월에 프랑스를 방문한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은 중국과 프랑스 수교 50주년 기념대회 강연에서 “중국이라는 그 사자가 이미 깨어났다”고 했다. 이 사자의 깨어남은 ‘대국 굴기’라기보다는 ‘중화의 부흥’이라 표현하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개혁개방 30년 동안의 눈부신 도약은 급작스런 굴기처럼 보이지만 누적된 역사 경험에 바탕하고 있다. 과거를 기억하는 방식은 현재와 미래의 실천 동력이다. 이런 의미에서 보자면 중국의 역사는 단순한 과거가 아니라 현재이자 미래다.

왜 중국을 알아야 하는지 그 필요성을 설파하는 게 군더더기로 여겨질 만큼 오늘날 중국은 막중한 존재가 되어 버렸다. 중국의 역사는 그런 중국을 알아가는 아주 중요한 ‘길(방법)’이다. 하나로 갈무리된 중국의 다양한 속살을 들여다보는 것, 바로 이 글이 나아가고자 하는 ‘길(방향)’이다. 중국이 어떤 ‘길(과정)’을 거쳐 왔는지 차근차근 되짚어볼 것이다. 이는 궁극적으로 중국의 ‘길(자격)’이 지닌 정체성에 대한 탐색이다.

중국 시안

중국 시안

21세기 실크로드 허브로 부상하는 시안
이상의 길 찾기에 역대 중국의 수도는 훌륭한 ‘지도’가 되어 줄 것이다. 수도는 그 시대를 대표하는 정치·경제·문화가 집약된 곳이다. 그때 그곳에 살던 사람들은 방어를 위한 성곽을 쌓고 수호신과 조상을 위한 사당을 세우고 삶의 터전을 일궈나가면서 토포필리아를 추구했다. 그들에게 수도는 단순한 공간이 아니라 삶의 희로애락이 고스란히 담긴 애틋한 장소였다. 시간·공간·인간이 어우러진 역사 속에서의 수도는 그들 삶의 저장고라고 할 수 있다. 수도의 오래된 성곽과 사당과 탑, 서원과 회관과 무덤은 과거의 문화적 상징을 보존하고 있다. 그것들은 토포필리아를 추구했던 이들의 기억의 저장고이기도 하다. 어디 수도뿐이랴. 인간이 사는 곳이라면 어디든 장소에 대한 사랑이 남긴 흔적이 존재하게 마련이다. 중국 곳곳을 답사하면서 찾아보고 싶었던 것은 그 흔적, 바로 ‘장소성’이다.

중국을 주제로 한 대중강연에서 가장 많이 받게 되는 질문은 중국과 한국이 어떻게 다른지, 한국이 중국보다 우수한 점이 무엇인지 하는 것들이다. 물론 중요한 질문이다. 그럼에도 질문의 편향성은 늘 나를 고민하게 만든다. 우리는 국가를 단위로 사고하는 데 너무나 익숙하게 길들여져 있다. 그 익숙한 길들여짐에 의문을 가져야 한다. 우리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요소는 얼마나 다양한가. 나라를 사랑하지 말자는 게 아니다. 맹목적인 애국심에 찬성하지 않을 뿐이다. 무의식적인 길들여짐의 껍질을 깨면 다른 시선으로 중국과 한국을 바라볼 수 있다. 중국의 수도를 살펴보는 앞으로의 여정이 ‘다름’을 틀림(경쟁의 사고방식)이 아닌 다양함(공존의 사고방식)으로 읽어내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필자로서는 더 바랄 나위가 없겠다.

최근 미국의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 배치와 중국의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 설립을 둘러싼 미·중의 힘겨루기만 놓고 보더라도, 양국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며 등거리 외교를 할 수밖에 없는 게 우리의 현실이다. ‘팍스 코리아’가 된다면 문제가 해결될까? 현실적 가능성 여부를 차치하더라도 이런 방식은 논리적으로 매우 불합리하다. 거기엔 또 우리의 눈치를 보며 생존을 도모해야 하는 나라가 존재할 것이고, 또 누군가 ‘팍스 ~’를 꿈꿀 것이다. 국가주의가 아닌, 나의 토포필리아만큼이나 지구 곳곳의 토포필리아를 존중하는 방식이야말로 인간이라는 종의 궁극적 생존의 길이라 믿는다. 앞으로의 여정은 그 ‘길 찾기’에 다름 아니다. 시안(西安)부터 시작해서 뤄양(洛陽)·카이펑(開封)·항저우(杭州)·난징(南京)을 거쳐 베이징(北京)까지 갈 길이 만만찮다. 이 여행이 공간 읽기를 넘어 ‘장소’ 읽기가 되길 바라면서 첫 번째 목적지인 시안으로 들어가보자.

“아름다운 시안: 실크로드의 기점 화하(華夏)문명의 원천”. 오늘날 산시(陝西) 성의 성회(省會·provincial capital)인 시안 시 인민정부 홈페이지에 내걸린 캐치프레이즈다. 시안의 특징을 아주 잘 압축한 표현이다. 실크로드의 기점이자 화하문명의 원천인 시안, 역대로 가장 많은 왕조가 도읍했던 곳이기도 하다. 당연히 중국의 역사와 문화에서 막대한 비중을 지닌 곳일 수밖에 없다.

우리에게는 이곳이 시안보다 장안(長安)이라는 명칭으로 훨씬 친숙하다. 장안, 말 그대로 ‘오래도록 평안히 다스린다’는 소망이 반영된 명칭이다. 이름 덕분일까. 한 고조 유방(劉邦)이 이곳에 도읍한 뒤 장안향(長安鄕)의 이름을 따서 수도의 명칭으로 삼은 이래로 당나라가 멸망할 때까지, 무려 1000년 동안 장안은 화려한 명성을 떨쳤다. 강한성당(强漢盛唐)으로 칭송되는 한나라와 당나라, 오늘날 중국인의 기억에서 강한성당의 이미지는 ‘실크로드’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한나라는 실크로드를 열었고 당나라는 실크로드의 번영을 구가했다. “서양엔 로마, 동양엔 장안”, 장안의 위상을 대변해주는 말로 이보다 더 적절한 게 있을까. 모든 길이 로마로 통했듯 또 모든 길이 장안으로 통했다. 바로 실크로드를 통해서.

시안시 인민정부 홈페이지 | 홈페이지 화면

시안시 인민정부 홈페이지 | 홈페이지 화면

‘오래 평안히 다스린다’ 소망 담은 장안
동서 교역로였던 ‘실크로드’의 상징적 힘은 막강하다. 그 상징성에 힘입어 21세기, 실크로드가 화려하게 부활하고 있다. 일대일로(一帶一路, One Belt One Road·실크로드 경제벨트와 21세기 해상 실크로드의 약칭)의 신(新)실크로드 전략이 지금 중국 경제의 핫이슈다. 실크로드 경제벨트 주도권을 놓고 중국 각 지역의 경쟁이 치열한 가운데, 물류와 교통의 허브 시안이 실크로드 경제벨트의 중심 도시로 부상하고 있다.

2013년 11월에 개통된 국제화물열차 시안발 장안호(長安號)는 그 옛날 비단을 싣고 떠난 낙타 대상(隊商)의 험난하고 고된 길을 거침없이 내달리며 갖가지 원료와 제품을 실어 나른다. 중국 각지에서 시안으로 모여든 물품이 장안호에 실려 중앙아시아 5개국(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44개 도시로 운송된다. 실크로드 경제벨트가 본격화되면 중앙아시아를 넘어 유럽까지 중국과 하나의 길로 이어질 것이다.

경제뿐 아니라 문화에서도 실크로드의 부활이 눈부시다. 2014년 6월, 실크로드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것이다. 중국이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과 공동으로 신청해서 이룬 성과다. 이는 국가가 연합하여 등재한 첫 사례로, 총 33개의 등재 유산 가운데 22개가 중국에 속한다. 그 가운데 5개가 시안에 있다. 한나라 미앙궁(未央宮) 유적지, 당나라 대명궁(大明宮) 유적지, 대안탑(大雁塔), 소안탑(小雁塔), 흥교사탑(興敎寺塔)이 바로 그것이다. 이로써 시안은 기존의 세계문화유산인 진시황릉(秦始皇陵) 및 병마용(兵馬俑)과 더불어 총 6개의 세계문화유산을 보유하게 되었다. 어디 세계문화유산뿐이랴. 천년고도 시안은 그야말로 볼거리가 무진장한 도시다. 물론 그에 얽힌 이야깃거리도 풍성하다.

고대 실크로드를 벤치마킹하여 신실크로드 전략을 내놓은 시진핑 국가주석의 고향은 시안에서 66㎞ 떨어진 푸핑(富平) 현이다. 부(富)와 평(平)이 합쳐진 이 현의 명칭은 ‘풍요롭고 태평하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푸핑 현 출신 시진핑이 과연 중국을 풍요롭고 태평하게 만들어서, 중화민족의 부흥이라는 ‘중국의 꿈’을 실현할 것인지 두고 볼 일이다. 그 꿈을 향한 시동은 이미 걸렸다. 시안 역시 그 옛날 장안의 번영을 되살리고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로마, 아테네, 카이로와 더불어 세계 4대 고도로 꼽히는 시안의 이곳저곳에 깃들어 있는 재미난 이야기도 이렇게 시동이 걸렸으니 이제 솔솔 쏟아져 나올 차례다.

<이유진 연세대인문학연구원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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