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카스·비타 500·혁신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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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실에서]박카스·비타 500·혁신위

고등학교 2학년 시절 아주 특이한 선생님이 영어를 가르쳤습니다. 3월 첫 수업부터 영어선생님은 수업 중간중간에 간간이 사회적 불만을 털어놓으셨습니다. 학생들에게 필기를 시키고 창 밖을 바라보던 선생님의 시커먼 얼굴에는 세상만사의 고뇌가 모두 서려 있었습니다. 그래서 영어수업 분위기는 늘 비장했습니다. 마치 뉴욕타임스에 실린 북한 핵무기 영문기사를 읽는 기분이었습니다. 온 지구의 고민이 담긴 텁텁한 분위기가 점심식사 후 오후 수업을 지배했습니다.

새 학기가 조금 지나자 3학년 선배들에게서 이 선생님의 고뇌를 반전시킬 수 있다는 비장의 무기가 풍문으로 들려왔습니다. 딱딱한 영어문장과는 어울리지 않게 그 선생님의 고뇌를 녹이는 비장의 무기는 박카스였습니다. 풍문은 풍문일 뿐 어느 누구도 박카스의 위력을 믿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한 장난스런 학생이 매점에서 박카스 한 병을 사 가지고 와서 교탁 위에 얹어놓았습니다.

박카스를 보자 시커먼 얼굴의 영어선생님 입 사이로 하얀 이가 드러났습니다.

“역시 박카스가 최고야!”

이날 수업 분위기는 대반전이었습니다. 선생님은 우리가 원하지도 않았던 첫사랑 이야기를 꺼내놓았고, 영국의 유명한 시인이 쓴 애송시를 칠판에 적어넣었습니다. 다음 수업 시간부터 교탁에는 늘 박카스가 놓여 있었습니다. 다른 반에서도 이 사실을 모르고 있을 리가 없었으니 아마 선생님은 하루에 5병 정도의 박카스를 드시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어느 날 주번이 박카스를 깜박 잊고 사오지 않은 날에는 그날 영어수업은 침울했습니다.

지금도 그 선생님이 박카스를 매일 몇 병씩 드시고 있는지 궁금해집니다. 세월이 흘렀으니 어쩌면 요즘은 비타 500을 드시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비타 500은 지난 4월 성완종 리스트 파문 때 주가를 올렸습니다. 성 전 경남기업 회장이 이완구 전 총리에게 비타 500 박스에 돈을 넣어 줬다는 <경향신문>의 보도로 화제가 된 적이 있습니다. 비록 비타민 음료는 아니었지만 비타민 음료 박스에 담긴 돈으로 정치인이 힘을 얻었다는 비아냥도 흘러나왔습니다.

비타 500이 잠깐 힘이 됐던 정당도 있습니다. 새정치민주연합입니다. 비타 500 박스에 담은 정치자금 의혹은 4월 재·보궐선거에서 새정치연합이 청와대와 새누리당을 공격하는 호재가 됐습니다. 하지만 비타 500의 약효는 며칠 가지 못했고 새정치민주연합은 선거에서 참패하고 말았습니다. 비타 500은 새정치연합의 피로회복에는 도움이 됐을지 모르지만 체질을 바꾸는 데에는 실패했습니다.

친노패권주의 논란으로 자중지란에 빠졌던 새정치연합은 겨우 김상곤 전 경기도교육감을 혁신위원장으로 임명해 전열을 추스르고 있습니다. 최근 6년 사이 이미 당내 혁신기구만 일곱 번째입니다. 좋은 처방은 재탕에 삼탕, 모두 다 이미 제시됐다고 합니다. 지금까지 단지 실천이 안 됐을 뿐입니다. 일곱 번째 혁신기구에서 똑같은 처방만 또 나열되지는 않을까 하는 우려가 나오고 있습니다.

박카스나 비타 500은 잠시의 기분 전환을 해줄 수 있을지는 몰라도 건강한 몸과 마음을 가져다줄 수는 없습니다. 본질적인 체질개선이 이뤄지지 않는다면 혁신위 또한 박카스나 비타 500처럼 잠깐 침울함을 벗어나는 데 애용될 뿐입니다.

진짜 피로회복제는 약국에 있다는 광고 카피가 생각납니다. 진짜 건강 회복은 운동에 있습니다. 그리고 진짜 혁신은 실천에 있습니다.

※ 류형열 편집장의 휴가로 이번 주 ‘편집실에서’는 윤호우 선임기자가 씁니다.

<윤호우 선임기자 hou@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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