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잣집 아이들이 예의 바르고 인성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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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류층 아이들에게 생태, 인간, 그리고 사회적 맥락의 교육을 매우 공들여하고 있었다. 단지 있는 집 아이들로, 부자의 아이들로 키우는 게 아니라, 균형잡힌 인격과 교양을 갖춘 아이들로 키우려는 목표가 분명히 드러나 보였다.

아이가 중학교를 넘어설 무렵이면 엄마를 막 대하는 느낌이 든다고 이야기들이 많다. 쉽게 화를 낸다든가 말을 붙이면 짜증을 내며 문을 쾅 닫고 들어가 버린다든가. 엄마는 마음이 아플 수밖에 없다. 아이 공부를 위해 제 삶은 뒷전에 둔 채 애써왔는데 고마워하기는커녕 그렇게 나오니 말이다. 그러나 어찌보면 그럴 만도 하다 싶기도 하다. 엄마는 아이와 1년 내내 가장 가깝게 있고 많은 대화를 하지만, 그 내용을 정리해보면 고작 몇 마디의 반복이다. “학원 가야지.” “밥 먹어야지.” 그리고 가끔 가다 이벤트처럼 “우리 딸, 파이팅!” 등등. 인생을 함께 살아가는 친구로서 하는 대화는 없다. 하다못해 엄마가 그맘 때 몰래 데이트한 이야기라든가 살면서 고민한 이야기라든가를 꺼낼 시간도, 여유도 없다. 엄마와 아이의 관계는 엘리트 체육에서 코치와 선수의 관계에 가깝다. 오랜 훈련에 지친 어린 선수가 어느 시점에서 정성으로 대하는 코치에게 거친 태도를 보이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친구가 아니라 코치로서 엄마는 아이가 레이스에서 승리한다고 해도 또 다른 허망함에 빠져들 수밖에 없지 않을까.

코치와 선수가 된 엄마와 아이가 공유하는 정체성은 ‘소비자’이다. 교육이 시장주의의 바다에 빠지면서, 부모와 아이에게 학교는 교육상품을 구매하는 마켓이 되었고, 교사는 그 직원이 되었다. ‘교사의 권위가 떨어졌다’는 이야기는 바로 그런 변화를 말한다. 교사의 권위가 떨어진 게 아니라 교사의 역할과 정체성이 바뀐 것이다. 학교와 교사는 그게 어떤 것이든 ‘가치’를 기반으로 존재했었다. 그러나 오늘 학교와 교사는 어떤 ‘가치’도 담당하지 않는다. 그저 대학입시라는 목표를 위한 ‘실용’ 도구일 뿐이다. 소비자는 상품에 하자가 있으면 항의하거나 환불을 요구한다. 부모와 아이의 그런 태도 앞에서 교사의 설 자리는 없다. 민주화 이전, 교사의 권위란 아이들을 폭력적으로 억압할 수 있는 권리를 뜻했다. 그런 권위는 당연히 폐기되어야 하고, 그 곳엔 느리더라도 제대로 된 교육가치가 자리잡아가야 했다. 그러나 교사도 아이도 부모도 학교도 모조리 시장의 일원이 되었다.

대입설명회를 찾은 수험생과 학부모. | 이준헌 기자

대입설명회를 찾은 수험생과 학부모. | 이준헌 기자

학교와 교사는 대학입시의 ‘실용’ 도구
부자가 이용하는 마켓에 가난한 사람이 이용하는 마켓보다 질 좋은 상품이 그득한 건 당연한 일이다. 갈수록 외고나 특목고, 자사고 출신들이 일류대학을 휩쓰는 경향도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질 좋은 상품의 내용은 단지 입시경쟁의 실용성에만 그치지 않는다. 뿌리부터 바뀌고 있다. 근래 상층계급 아이들이 영어 어린이집에서부터 본격적인 교육을 시작한다는 건 잘 알려진 일이다. 그런 곳의 한 달 원비는 200만원가량 혹은 그 이상이다. 수요가 안정화하면서 외국의 유치원도 꽤 들어오는 추세다. 올해 4살인 지인의 아이가 그런 곳에 다니게 되면서 교육과정이나 내용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볼 기회가 있었다. 일단 아이와 교사의 비율이 매우 적어서(얼핏 보면 아이보다 교사가 많아 보일 정도로) 매우 쾌적한 환경이라는 게 여느 어린이집과 달랐다. 영어를 주로 사용하지만 매우 세심해서 아이에게 무리가 가는 일은 없다. 교사가 그날의 교육내용과 아이가 어떻게 지냈고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꼼꼼히 적고, 부모가 로그인해서 소통하는 전용앱이 있다. 거기까지야 비싼 상품이니 그럴 법도 하다고 해두자.

좀 더 인상적이었던 건 교육내용이 여느 어린이집과 비슷하면서 고급한 게 아니라, 여느 어린이집에서 가르치지 않는 걸 가르친다는 사실이었다. 그곳에서는 아이들에게 생태, 인간, 그리고 사회적 맥락의 교육을 매우 공들여 하고 있었다. 단지 있는 집 아이들로, 부자의 아이들로 키우는 게 아니라 균형잡힌 인격과 교양을 갖춘 아이들로 키우려는 목표가 분명히 드러나 보였다. 부잣집 아이들이 예의도 바르고 인성도 좋다는, 가난한 집 아이들이 무례하고 인성도 나쁘다는 이야기가 나온 지도 꽤 되었지만, 그런 흐름이 훨씬 더 나아갔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또 다른 지인은 “교사들이 하나같이 신사임당 같다”는 농담을 했다.

그런 곳에서 시작하는 아이들과, 아이들에게 지속적으로 최선의 행동을 한다는 게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저임금과 가혹한 노동에 시달리는 교사들과 지내는 아이들은 다르게 자랄 수밖에 없다. 부자 아이들이 경쟁에서 우위를 갖는 것은 물론, 교양 있는 삶의 태도와 풍모를 갖게 된다는 건 사회가 ‘실제적 신분제’로 진입했음을 뜻한다. 대한민국은 시민사회가 아니라 귀족과 평민이, 양반과 상놈이 존재하는 봉건사회로 회귀 중이다. 봉건사회보다 더 못한 것은 이른바 ‘민중의 건강성’이라 일컬어지던 것마저 사라지는 것이다. 민중의 건강성보다는 ‘부르주아의 건강성’이 부각되고 있다.

“교사들이 하나같이 신사임당 같다”
이런 현실에서 어느 편이 좀 더 현명한 선택일까. ‘실용’에 매달려 어떻게든 아등바등하는 것일까. ‘가치’를 되새기며 다시 걷기 시작하는 것일까. 교육 현실의 변화가 후자의 선택에서만, 그런 선택을 하는 부모들이 생겨날 때만 가능하다는 건 물론 다 안다. 그러나 당장 내 아이를 생각하면 아등바등하게 되는 게 부모의 마음이다. 아등바등하며 각자도생의 길로 흐트러진 탓에 이 지경이 되었다는 걸 잘 알지만, 발길을 돌리는 건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더는 갈 데가 없다는 걸 안다. 소비자의 권리로 학교와 교사 앞에 좀 더 당당해졌다고 착각했지만, 좋은 상품은 부자들에 의해 이미 완판되어 버렸다는 것도 이젠 안다. 그런데도 눈 딱 감고 아등바등하면 적어도 내 아이는 조금이라도 유리한 환경에 놓이는 걸까.

기억해야 할 것은 그런 번민은 비단 교육문제를 넘어 민주주의체제의 시민에게 부여된 번민이라는 사실이다. 민주주의체제의 시민이란 실은 무거운 자리다. 우리는 일제강점기와 반세기의 정치적 독재를 경험한 탓에 민주주의의 의미가 ‘억압에서 자유’라는 부분에만 집중되어 있다. 민주주의는 모두에게 최선의 사회를 만들기 위해 모두가 엄중한 책임을 갖는 사회다. ‘현실이 어쩔 수 없다’거나 ‘독일이나 핀란드에 살았다면 아이를 이렇게 키우지 않겠지만 한국이니 어쩔 수 없다’거나 하는 부모의 말들에는 민주주의 이전의 습관이 짙게 배어 있다. 민주주의는 좋은 의미에서든 나쁜 의미에서든 나를 위한 행동과 사회를 위한 행동이 일치하는 경향을 가진 체제다. 민주주의는 꼭 필요하다면 혁명도 불사할 수 있는 시민들의 체제다. 그 사실을 외면한다면 우리의 동병상련은 한 편의 신파극을 넘어서기 어렵다. 신파극 속에 근사한 삶이 단 하나라도 있던가?

<김규항 <고래가 그랬어>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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