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실 인장 우표, 헌종의 예술적 조예 되새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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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정사업본부가 역사성과 예술성을 가진 조선 왕실의 인장을 소재로 시리즈 우표를 발행했다. 조선시대 사인(私印)의 섬세한 조각과 문양을 통해 우리나라 문자예술의 우수성을 알리기 위한 취지다. 특히 지난 15일 첫 묶음으로 발행된 우표에는 격변기에 외국으로 유출됐다가 반환된 헌종의 사인 3점이 포함돼 그 의미를 더하고 있다.

우정사업본부가 조선왕실 인장을 소재로 발행한 우표시리즈의 첫 번째 묶음인 헌종의 사인 4점. | 우정사업본부 제공

우정사업본부가 조선왕실 인장을 소재로 발행한 우표시리즈의 첫 번째 묶음인 헌종의 사인 4점. | 우정사업본부 제공

이번에 발행된 헌종의 개인용 인장(私印) 4점은 ‘쌍리(雙鯉)’, ‘향천심정서화지기(香泉審定書畵之記)’, ‘우천하사(友天下士)’, ‘만기여가(萬機餘暇)’ 등이다. ‘만기여가’는 고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나머지 세 작품은 모두 한국전쟁 당시 미군에 의해 미국으로 반출됐다가 지난해 4월 65년 만에 반환됐다.

조선왕조 임금 27명 중에서 존재감을 갖지 못하는 국왕이 적지 않았다. 그 중의 한 명이 24대 헌종(憲宗·재위 1834~1849년)이다. 그는 조선 역대 왕 중 가장 어린 나이인 8세에 즉위해 23세에 요절했다. 헌종의 집권 15년은 안동 김씨와 풍산 김씨의 세도정치가 극성을 부리던 시기였다. 집권 8년 만에 할머니 순원왕후(안동 김씨)의 수렴청정에서 벗어났다. 하지만 세도가에 휘둘려 정치개혁 의지를 제대로 펴보지도 못했다. 아니 국왕으로서 권한을 변변히 행사할 기회조차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마음을 둘 곳이 없었던 헌종은 그림과 글 수집과 감상에 빠졌다. 어머니 신정왕후 조씨는 “옛 사람의 서첩을 몹시 사랑했다”고 말했다. 헌종은 당시 유행이던 금석문에서도 명성을 날렸다. 문학적 소질 또한 뛰어나 <원헌집(元軒集)>이란 문집을 남기기도 했다.

특히 인장에 관심이 컸다. 중국과 조선 명사의 인장도 수집했다. 뿐만 아니라 조선시대 선대 국왕의 인장과 왕실 인장을 전각에 조예가 깊은 심암 조두순, 자하 신위에게 모각하도록 시켰다. 또 모각된 도장을 찍어서 책으로 엮은 <보소당인존>도 편찬했다. <보소당인존>에는 모두 600여개의 도장이 찍혀 있다. 하지만 고종 때 궁궐의 화재로 일부가 불에 타버렸다. 고종도 불탄 <보소당인존>을 다시 복원함으로써 두 질의 <보소당인존>이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중앙연구소 장서각 등에 소장되어 있다.

조선왕실의 인장에는 사대교린의 외교문서 및 왕명으로 행하여지는 문서 결재에 사용된 ‘국새’와 왕세자와 왕비 책봉 등 궁중의식을 행할 때와 국왕이나 왕비 등의 존호를 올릴 때 의례용으로 제작한 도장인 ‘어보’, 개인 서신이나 그림과 글씨 등에 찍는 ‘사인’ 등이 있다. 이 중 개인용 인장은 도장의 예술성을 가장 잘 드러내는 것으로서 조선왕실의 문예 취미를 보여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두 마리의 이무기가 하늘을 향해 오르는 듯한 모양을 한 ‘쌍리’는 가장 뛰어난 작품성을 보이는 인장이다. ‘쌍리’는 헌종이 그림과 글의 수집에 얼마나 깊은 관심이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방증이기도 하다. 헌종은 자신이 모은 그림과 글씨, 서예 등에 자신의 소유임을 증명하기 위해 이 도장을 찍었다. 성인근 한국학 중앙연구원 연구원은 “쌍리는 궁궐미술문화가 크게 발달했던 송나라의 휘종이 자신이 모은 서예, 그림, 글씨에 황실 소유임을 증명하기 위해서 만든 초형인(肖形印)을 모방한 것”이라고 말했다.

헌종은 또한 글과 그림의 감정에도 능했다. ‘향천심정서화지기’라는 감정용 도장을 만들었다. 자신이 감정한 작품이 진품임을 확인할 때 사용했던 도장이다. ‘향천’은 헌종의 호이다. 이 밖에도 바쁜 국정 속에서 여가를 즐기라는 의미를 가진 ‘만기여가’와 천하의 선비들과 벗을 한다는 뜻을 가진 ‘우천하사’도 뛰어난 예술성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김경은 편집위원 jjj@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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