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평생 반대하자던 뜨거운 맹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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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파는 ‘임을 위한 행진곡’ 왜 싫어하나… 북한 영화에 삽입 이유가 반대 근거

지만원 시스템클럽 대표는 ‘임을 위한 행진곡’(이하 ‘행진곡’)을 “금지곡으로 지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2002년부터 인터넷 홈페이지와 저서를 통해 북한군 5·18 개입설을 주장해온 지 대표는 “5년 전 국립중앙도서관에서 북한 영화 ‘님을 위한 교향시’를 보다 깜짝 놀랐다. 그 주제곡이 ‘행진곡’이었다”며 “‘행진곡’은 좌익이 만든 가짜 영웅에게 진상된 김일성 노래”라고 주장했다. 현재 지 대표는 5·18 당시 광주 시민군 3명이 2010년 북한의 5·18 기념식에서 발견됐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보훈처가 또다시 ‘행진곡’의 공식 제창을 거부했다. 보훈처는 지 대표의 주장을 근거로 삼았는지 ‘행진곡’이 북한 영화의 배경음악으로 사용된 것을 제창 거부의 사유로 들었다. 여야를 떠나 국회가 한 목소리로 ‘행진곡’을 기념곡으로 지정하라고 요구했지만 보훈처의 태도는 바뀌지 않았다. 물론 보훈처가 광주민주화운동 자체를 부정한 적은 없다.

2013년 5월 18일 광주 국립5·18묘지에서 열린 33주년 5·18 민주화운동 기념식에서 참석자들이 '임을 위한 행진곡'을 따라 부르고 있다. 당시 황우여 새누리당 대표, 김한길 민주당 대표, 노회찬 진보정의당 대표 등은 노래를 따라 불렀지만 박근혜 대통령은 태극기만 손에 쥔 채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 청와대사진기자단

2013년 5월 18일 광주 국립5·18묘지에서 열린 33주년 5·18 민주화운동 기념식에서 참석자들이 '임을 위한 행진곡'을 따라 부르고 있다. 당시 황우여 새누리당 대표, 김한길 민주당 대표, 노회찬 진보정의당 대표 등은 노래를 따라 불렀지만 박근혜 대통령은 태극기만 손에 쥔 채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 청와대사진기자단

박근혜 대통령도 2007년 한나라당 대선 결선 당시 영화 <화려한 휴가>를 보고 나서 “(5·18은) 민주화 운동이다. 민주화를 위한 희생”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최근 박 대통령은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와의 회동에서 “(‘행진곡’에 대해) 반대하는 분들, 찬성하는 분들이 있다. 또 다른 갈등이 생길 우려가 있다”고 밝혔다.

지난 몇 년간 우파 세력들은 기자회견이나 신문광고 등을 통해 ‘행진곡’에 대한 반대입장을 표명해 왔다. 이제 그들이 논리적 정교화에 나섰다. 지난 4월 2일 보수성향 시민단체 바른사회시민회의는 ‘행진곡’의 기념곡 제정에 반대하는 내용의 토론회를 개최했다. 장원재 전 숭실대 교수, 조우석 문화평론가, 양동안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등이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2명의 발제자와 4명의 토론자는 ‘행진곡’이 뒷날 북한의 김일성 찬양 영화 ‘님을 위한 교향시’에 삽입된 점, ‘행진곡’이 광주민주화운동 중 무장투쟁 노선을 옹호하고 있다는 점 등을 핵심 이유로 들었다.

반대 토론회 개최, 논리적 정교화 나서
‘임을 위한 행진곡’은 1982년 발표된 이래로 각종 민주화 운동, 사회운동의 현장에서 불렸다. 보수세력의 입장에서는 이 ‘운동권 가요’를 좋아할 리가 없다. 하지만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 김문수 전 경기도지사 등 과거 민주화 운동가였던 보수인사들까지 ‘행진곡’을 옹호하는 상황에서 우파의 입장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표면적으로는 ‘행진곡’에 반대하지 않는 입장이다. 4월 토론회의 주최 단체인 바른사회의 한 관계자는 “4월 토론회는 ‘행진곡’에 대한 단체 입장을 표명하는 자리가 절대 아니다. ‘행진곡’과 관련한 현안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알기 위한 자리였다. 우리 단체는 ‘행진곡’에 대한 입장이 없고 낼 계획도 없다”고 말했다.

박승춘 국가보훈처장이 5월 4일 경기도 파주 통일공원에서 열린 행사에서 발언하고 있다. | 연합뉴스

박승춘 국가보훈처장이 5월 4일 경기도 파주 통일공원에서 열린 행사에서 발언하고 있다. | 연합뉴스

두 번째 부류는 ‘행진곡’에는 부정적이지만 5·18 민주화운동의 의의는 인정한다. 4월 토론회의 토론자였던 김광동 나라정책연구원장은 “‘행진곡’은 광주 정신과 맞지 않기 때문에 반대한다”고 말했다. 그는 “김대중 선생 석방 촉구에서 시작한 광주민주화운동은 자유민주주의 헌정질서 회복을 요구한 것으로 기본적으로 평화적 운동이었다. 그런데 ‘행진곡’은 소수파였던 무장투쟁 쪽을 옹호하는 노래이기 때문에 맞지 않다”고 설명했다.

유동열 자유민주연구원장도 “국가에서 5·18을 민주화운동으로 규정했다. 5·18 정신은 독재에 항거해서 자유민주주의를 회복시키자는 것이었다. 그런데 북한에서 이 노래를 부르고 있고, 주로 ‘행진곡’을 부른 사람들이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훼손한다고 의심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국가 행사의 공식 기념곡에는 반대한다”고 말했다.

마지막 부류는 소위 ‘극우파’로 불리는 이들의 주장이다. 지만원 대표 등은 광주민주화운동 자체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행진곡’에 대해서도 반대하고 있다. 4월 토론회의 발제자였던 조우석 문화평론가는 “5·18이 민주화운동이라는 데 동의할 수 없다. 호남을 볼모로 한 김대중의 장난이었다. 4·19 역시 혁명이라기보다는 민주주의를 위해 우남(이승만)이 스스로 하야한 것뿐이다”라고 말했다. 다만 북한군 개입설에 대해 그는 “개연성은 높다고 생각하는데 물증은 없기 때문에 특별한 의견은 없다”고 말했다.

“애국가를 북한에서 부르면 버릴 거냐”
행진곡 반대론자들의 가장 큰 반대 논거는 역시 ‘행진곡’이 북한 영화 ‘님을 위한 교향시’에 들어갔다는 점이다. 하지만 탈북자 출신인 주성하 동아일보 기자는 2013년 칼럼에서 북한이 1998년 행진곡을 금지곡으로 지정했다고 밝힌 바 있다. 주 기자의 말이 사실이라면 북한 정권도 행진곡을 부담스럽게 생각하는 것이다. 김양래 5·18기념재단 상임이사는 “북한에서 만든 노래를 우리가 부른다면 몰라도 우리 것을 북한이 가져다 부른 것을 기념곡 반대 논리로 쓰는 것은 너무 비약이다. ‘아침이슬’도 북한에서 불렀다고 하지 않나”라고 말했다.

정근식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는 “북한 영화에 ‘행진곡’이 들어가서는 안 된다는 논리 자체가 말이 안 된다. 북한에서 애국가를 부르면 우리가 그걸 버릴 거냐. 북한에서 조선왕조실록을 연구한다고 우리가 연구를 중단할 거냐”고 말했다. 정 교수는 행진곡이 대중화된 과정을 종합적으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행진곡’이 1980년대 초반부터 지금까지 전파된 과정은 보이지 않는 한국 사회의 민주주의 흐름과 발전에 관련이 있다. ‘행진곡’에 반대하는 논리는 이런 민주주의 흐름을 부정하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김양래 이사는 행진곡 반대론자들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 5·18의 의의를 훼손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다고 봤다. 그는 “‘행진곡’이 광주 정신에 맞지 않는다는 주장을 펴는 사람들을 보면 과거 민주화운동보다 1980년 신군부와 가까웠던 사람들이 많다. ‘행진곡’이 그런 사람들의 정신까지 담을 수는 없지 않나”라고 말했다.

이준식 역사정의실천연대 정책위의장은 보수정권 이후 지속된 우파들의 역사 수정주의 운동과 ‘행진곡’을 둘러싼 논란이 관련이 있다고 봤다. 그는 “지난 몇 년간 보훈처나 교육부는 이 정권에 부담이 되는 교육은 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2013년 5·18의 의의를 축소시킨 교학사 한국사 교과서를 통과시킨 것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고 지적했다. 또한 이 위원장은 여러 민주화 운동 중 5·18이 유독 공격을 받는 이유가 있다고 설명했다. “한국 현실에서 호남은 소수파다. 5·18의 의의를 특정 지역에 한정된 사건으로 만들려는 움직임이 있다. 또한 5·18 이후 한국 사회에서 본격적으로 반미 이슈가 제기됐다. 미국을 따르는 입장에선 5·18의 존재가 거슬릴 수밖에 없다.”

<우파의 불만>의 공저자 박권일 칼럼니스트는 보수정권이 수년간 지속되면서 극우파들의 행동을 제지하는 사회적인 힘이 약해졌다고 지적했다. “우파 세력 안에는 정권을 잡은 기득권 우파뿐만 아니라 일베, 아스팔트 우파, 지만원 등 다양하다. 정권을 유지해야 하는 기득권 우파는 대놓고 ‘행진곡’이나 5·18을 공격하는 게 부담스럽다. 하지만 극우파의 주장과 행동에는 눈을 감는 방식으로 우파 내부에 ‘암묵적인 역할 분담’이 있다고 본다.”

박 칼럼니스트는 “살인집단 서북청년단이 공개적으로 부활했지만 아무런 제지를 받지 않았다. 지금은 극단주의 우파들이 활개를 치기에 딱 좋은 세상”이라고 말했다.

<백철 기자 pudmaker@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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