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의 고통을 외면하는 ‘병신에게 먹이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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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 광화문 광장에서 열린 416시간의 세월호 국민 설명회에서 복음성가를 틀어 놓고 세월호 유가족들을 종북좌파 정치세력이라고 큰소리로 비난하는 어떤 사람들을 보았을 때 내가 부끄러워서 숨고 싶었다.

10년 전쯤 쓰나미가 일어났을 때 아버님이 생전에 엄숙하게 설교하시던 기억이 생생하다. “쓰나미가 일어난 건….” 아빠 제발 그냥 아무 말도 하지 말아요, 제발. 딱딱한 예배당 의자에 앉아 발을 동동 굴렀다. 조마조마해서 꽉 쥔 손바닥에서 땀이 배어나왔다. 쓰나미라는 재앙은 우상을 숭배하고 이단을 믿는 지역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라고 다음 말이 이어졌다. ‘빡센’ 신학교에서 공부해 가장 보수적인 교단에 소속된 목회자인 분이었기에 놀랄 것도 없는 말이긴 했다. 이미 김홍도 목사니 뭐니 하는 사람들이 그런 이야기를 실컷 한 다음이었다. 그래도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아아 우리 아버지까지, 하는 마음에 당장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걸어 나가고 싶었지만 엄마와 나를 합쳐도 서너명이 될까 말까 하는 새끼손톱만한 개척교회에서 차마 그럴 수가 없어 입술만 꽉 깨물었다. 입 안쪽에서 비릿한 피맛이 났다.

국내외 참사를 전도의 도구로 쓰다니
10여년이 흘렀고 나의 아버님은 돌아가셨으며 아침 일찍 일어나 해변에 나와 손님을 기다리던 툭툭(세발택시)과 그 운전사들이 해일에 죄다 쓸려가버리는 바람에 죄다 새것으로 바뀌어 반짝반짝했다는 푸켓의 툭툭들도 이제는 좀 낡았을 것이다. 최근 참석한 어느 예배에서 찬양을 인도하던 사회자가 “네팔에…”라고 말을 시작하자마자 어째 영 불안했다. 아니나 다를까, 네팔 대지진이 일어난 지역에 우상숭배가 성행한다는 이야기가 이어졌다. 1980년대에 독실한 기독교 신자 비율이 높은 나라인 아르메니아에 대지진이 일어나자 교인들은 이렇게 말하곤 했다. “그들이 말세 전에 미리 데려감을 입었다”라고. 이웃의 고통이 선교의 기회가 되는 이중잣대는 여전히 공고하다. 이러한 태도를 취하면서 어떤 기독교인들은 스스로 하나님의 자리에 올라앉는다. 지금까지 우리 병맛통신에서는 ‘병맛’이라는 말을 긍정적으로만 사용했지만 어쩔 수 없이 본뜻대로 쓸 수밖에 없는 경우가 이럴 때다. 일명 ‘병먹금’, 병신에게 먹이 금지. 공원 등에서 먹이를 주어서는 안 되는 동물 근처에 붙어 있는 ‘DON’T FEED THIS ANIMAL’이라는 안내문을 살짝 비튼 것으로, 인터넷 게시판 등에서 관심을 끌기 위해 일부러 분탕질을 일으키는 종자들을 보았을 때 자주 사용한다.

4월 18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세월호 참사 범국민대회’에서 시민들이 진상규명 등을 요구하며 행진을 시도하자 경찰이 물대포를 쏘며 저지하고 있다.  / 연합뉴스

4월 18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세월호 참사 범국민대회’에서 시민들이 진상규명 등을 요구하며 행진을 시도하자 경찰이 물대포를 쏘며 저지하고 있다. / 연합뉴스

이전에도 한국 교회는 자주 ‘개독’이라고 불렸다. 멀쩡한 단군상이나 불상 목을 베는 일 같은 건 흔했고, 삼풍백화점 사고를 백화점 회장이 담임목사를 제대로 섬기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해석하거나, 대구지하철 사고 역시 불교 공원 계획과 관련시켜 이야기하는 경우도 많았다. 쓰나미, 네팔 대지진, 삼풍이나 대구지하철 같은 참사를 서슴없이 전도의 재료로 사용해서 안 될 것은 없다. 이처럼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의 사고를 목격할 때 우리는 겨우 겸허해지고,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마련이다. 이런 일들이 신앙을 갖게 되는 계기가 되는 것에는 무리가 없으나 어떤 이들이 참사와 종교를 엮어서 말할 때 ‘개독’ 소리를 듣게 되는 것은, 그들의 태도에 공감이 실종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작년 세월호 참사 직후 한기총 회의에서 등장한 “가난한 집 아이들이 수학여행을 경주 불국사로 가면 될 일이지, 왜 제주도로 배를 타고 가다 이런 사단이 빚어졌는지 모르겠다”는 발언 같은 것.

성서에서 어려움에 처한 이웃을 도우라는 내용을 담은 구절을 모두 오려내고 나면 얇은 넝마 조각이 된다고 한다. 신약의 <야고보서> 같은 경우 사도의 메시지는 움찔할 만큼 강력하다. 이웃의 환난을 보고 있는 채로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고통에 대해 다루고 있는 성서의 <욥기>에서 욥은 온전하고 정직한 자였으나 아무 이유 없이 고통을 받는다. 그의 고통에 이유가 있다면 욥의 사랑과 충성을 시험해 보자는 사탄의 제의에 하나님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기 때문이다. 흔히 시시한 영화 속에 나오는 어리석은 여자가 연인의 사랑을 시험하기 위해 위험한 거래를 하며 꼭 덧붙이는 말, “그 사람 목숨만은 살려줘요”처럼 하나님도 욥의 생명만은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욥은 모든 것을 잃고 잿더미에 앉아 기왓조각으로 가려운 곳을 벅벅 긁으며 친구랍시고 찾아온 세 사람의 훈계를 듣는 처지가 된다. 자신의 무죄함을 강변하는 욥에게 끝내 하나님이 찾아오시지만 하나님은 “내가 사랑해서 그랬어 미안해”라고 말씀하시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낚시로 리워야단을 끌어낼 수 있겠느냐. 한마디로 네가 뭘 아느냐 닥쳐라.” 이런 얘기다. 적어도 하나님은 일관적이시다. 잘난 척 떠든 욥의 친구들에게도 마찬가지로 대하신다. 이 고난이 끝난 후 아들 일곱과 딸 셋을 두었던 욥은 다시 같은 수의 자녀를 갖게 되었고 4대의 자손을 보고 죽었다고 하지만 그는 죽을 때까지 과연 잊을 수 있었을까. 이유를 알 수 없이 잃어야만 했던 처음의 아들 일곱과 딸 셋을. 하나님은 우리를 그런 존재로 만들지 않았는가. 슬픔을 아는 존재로. 그러나 때때로 그 확신이 흔들릴 때가 있다.

지옥은 멀지 않다, 이미 거기에 산다
지난 4월 광화문 광장에서 열린 416시간의 세월호 국민 설명회에서 복음성가를 틀어놓고 세월호 유가족들을 종북좌파 정치세력이라고 큰소리로 비난하는 어떤 사람들을 보았을 때 내가 부끄러워서 숨고 싶었다. 저 사람들은 기독교인 아니에요, 프락치 교인이라니까요 하고 거짓말이라도 주워섬기고 싶었지만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어 유다서를 떠올렸다. 마음 같아서는 확성기를 확 뺏어서 큰소리로 읽어주고 싶었다. “1장 10절부터 13절, 이 사람들은 무엇이든지 그 알지 못하는 것을 비방하는도다. 또 그들은 이성 없는 짐승 같이 본능으로 아는 그것으로 멸망하느니라./화 있을진저 이 사람들이여, 가인의 길에 행하였으며 삯을 위하여 발람의 어그러진 길로 몰려갔으며 고라의 패역을 따라 멸망을 받았도다./그들은 기탄 없이 너희와 함께 먹으니 너희의 애찬에 암초요 자기 몸만 기르는 목자요 바람에 불려가는 물 없는 구름이요 죽고 또 죽어 뿌리까지 뽑힌 열매 없는 가을 나무요/자기 수치의 거품을 뿜는 바다의 거친 물결이요 영원히 예비된 캄캄한 흑암으로 돌아갈 유리하는 별들이라.”

병먹금. 병먹금. 병신에게 먹이 금지, 하고 달달 외우면서도 속에서 천불이 난다. 이제 지겨우니 그만하라는 행인들에게 유민 아빠 김영오씨는 이젠 설명도 하지 않고 “예, 알겠습니다. 빨리 그만하겠습니다” 하고 말한다고 한다. 그리스도는 너희 중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나에게 한 것이라고 말했지만 수백명의 지극히 작은 자들이 생중계로 수장되는 광경을 보았건만 여전히 참사를 하나님의 천벌로 해석하는 사람들을 어쩌면 좋을까. 기독교의 교세가 꺾이고 있다는 걱정이 종교 내부에서 이야기된 지 오래되었다. 나는 예전에 이런 말을 들으면 한국인은 찜질방과 사우나를 하도 드나들어 지옥을 별로 무서워하지 않는다고 실없이 말하곤 했다. 그러나 세월호 유가족들에게 서슴없이 캡사이신 최루액을 발포하고, 목을 휘감아 끌고 연행하는 광경을 보면서 지옥이라는 말에 대해서 더 이상 농담을 할 수가 없게 되었다. 지옥이 그리 멀지 않다. 이토록 가까이에 있다. 누가 지옥을 두려워하겠는가, 이미 거기에 살고 있는데.

<김현진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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