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지이야기

“기억은 시간을 앞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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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생존 화물차 기사 최은수씨, 끝나지 않은 그날의 악몽에 시달려

눈이 감기지 않는다. 잠이 쏟아져 내려도 눈은 필사적이다. 눈을 감으면 꿈을 꿀 것이다. 꿈은 어김없이 그날이다. 꿈인 듯 기억인 듯 아주머니가 보였다. 나는 아주머니의 이삿짐을 내 화물차에 실었다. 짐에는 리어카도 있었다. 제주도에서 어묵장사를 하겠다고 했다. 식구는 아들과 둘이었다. 새로운 터전에서 열심히 해보려는 것 같았다. 연세도 있는데 잘됐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는 게 고생스러운 사람들 간에는 피차 그런 마음이 든다. 그러나 아주머니는 배에서 나오지 못했다.

배에서 웃고 떠들던 아이들 모습 생생
몇 가지 순간들이 반복해 떠오른다. 하도 많이 떠올렸더니 그게 내 생의 유일한 기억인 것 같다. “저는 비행기로 갈게요.” 4월 15일 내 화물차에 아주머니의 이삿짐을 실었다. 아주머니는 배를 한 번도 타본 적이 없어 멀미가 걱정된다고 했다. 항공편을 알아봤지만, 그날 제주행 비행기표는 동이 나 있었다. 어쩔 수 없이 아주머니는 멀미약을 사 붙이고 배를 탔다. 배가 처음으로 기울어졌던 순간도 떠오른다. 나는 갑판 위에 있었다. 1분 전만 해도 식당에서 아주머니와 이야기를 했다. 아주머니는 더 쉬겠다며 객실로 들어갔고 나는 밖에서 담배를 피웠다. 배가 커브를 꺾는가 싶더니 갑자기 넘어갔다. 컨테이너가 바다에 떨어졌다. “가만히 있으라”는 안내방송이 나왔다. 잠시 후 배는 더 기울어졌다. 나는 아래로 미끄러졌다. 겨우 기어 올라와 헬기에 묶여 구조됐다. 해경에게 아주머니가 있는 객실 위치를 알려줬다. 거기 사람이 있다고 꼭 구조해 달라고 말했다. 그러나 아주머니는 끝내 나오지 못했다. 아마도 “가만히 있으라”는 방송을 따랐을 것이다. 해경도 그 방의 문을 열지 않았을 것이다.

아주머니는 하필 그날 비행기표도 없었고, 간발의 차이로 객실에 들어가 배에서 나오지 못했다. 운이 없었던 걸까. 그러나 그 설명만으로는 늘 부족하다. 휴대전화에 아주머니 전화번호가 등록돼 있다. 카카오톡 주소록을 넘기다 아주머니 사진을 볼 때가 있다. 무심결에 보기도 하고, 일부러 보기도 한다. 기억은 시간을 앞지른다. 그날의 기억은 오늘보다 먼저 와 있고, 내일보다도 먼저 와 있을 것이다. 그 기억들이 눈앞에 아른거려 잠이 온몸을 짓눌러도 눈이 감기지 않는다.

세월호 생존자 최은수씨가 안산시 합동분향소 앞에 그려진 희생학생들의 얼굴을 보고 있다. / 박송이 기자

세월호 생존자 최은수씨가 안산시 합동분향소 앞에 그려진 희생학생들의 얼굴을 보고 있다. / 박송이 기자

약을 먹기 전, 무슨 소리를 들었던 것도 같다. 폭죽 터지는 소리였다. 태어나서 제주도에 처음 가보는 아이들의 들뜬 에너지가 밤바다에 가득했었다. 한창 신나서 떠들며 놀던 그 밤의 소리들이 귓전을 맴돌았다. 텔레비전을 틀어도 소리는 사라지지 않았다. 그런 밤엔 이런저런 생각들이 보태지면서 ‘이렇게 살아서 뭐하나’라는 물음이 들이닥친다. 그런 생각은 순간적이다. 방어할 수가 없다. 수면제 40알을 입에 털어 넣었다. 나를 담당하는 병원에서는 저녁 7시, 9시, 12시에 내게 전화를 한다. 전화를 받지 않으면 경찰이 출동한다. 순간적으로 정신을 차려보니 병원 응급실이었다. 이번이 세 번째다. 분향소에서 학생들의 얼굴을 본 것은 딱 한 번이다. 생존 화물차 기사들이 유가족대책위와 함께 움직이면서 분향소가 있는 화랑유원지에 머물 때가 많다. 하지만 딱 한 번 가고 그 이후로는 다시 들어가지 못했다. 배 위에서 웃고 떠들던 아이들의 모습이 생생한데, ‘나만 이렇게 살아 나온 걸까?’라는 생각에 그 얼굴을 차마 보기 힘들었다.

사고 이후 월 70만원이 못 되는 돈으로 살았다. 정부에서는 식구당 30만원이 조금 넘는 돈을 줬다. 가족은 아내와 나 그리고 딸아이. 딸아이는 제주도에서 할머니와 살고 있기 때문에 인원에서 제외돼 아내와 내 몫으로 70만원이 못 되는 돈을 받았다. 그마저도 6개월이 지나니 끊겼다. 세월호와 함께 가라앉은 화물차 할부금도 아직 한참 남았다. 공과금을 비롯해 온갖 독촉전화가 날아왔다. 집에 가면 돈내라는 고지서들만 잔뜩 쌓여 있다. 얼마 전에는 가스를 끊겠다고 해서 끊으라고 했다. 독촉전화에 하도 시달리다 지쳐 운전을 하다가 차를 세우고 수면제 70알을 집어 삼켰었다. 그게 시작이었다.

만나면 우리 말 적기만 하는 정치인들
화물차 기사들은 1년을 가만히 기다렸다. 정부에서 대책을 내줄 거라 생각했다. 자식을 잃은 유가족도 있는데 생존 화물차 기사들이 보상 얘기를 꺼내기가 미안했다. 일부 화물차 기사들에게는 해양수산부가 전화를 했다. 알아서 해줄 테니 화물차 기사들은 가만히 있으라는 식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유가족과 분리시키려고 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지난 1년 정부는 무엇을 한 걸까? 사건이 일어나고 거의 1년 만인 지난 4월 5일 인천에서 화물차 기사들을 상대로 설명회를 열었다. 해양수산부에서는 화물차에 실은 화물들의 연식을 화물차 기사들이 직접 증명해오라고 했단다. 이삿짐에 냉장고가 있으면 이 냉장고를 산 데를 가서 몇년도에 샀다는 것을 증명해 오라는 것이었다. 화물차에 장착돼 있던 온갖 옵션들도 다 그렇게 증명을 해 오라고 했다. 기가 막혔다. 억지도 이런 억지가 없었다. 지난달에 국회에 가서 각 당의 원내대표를 만났다. 힘이 있는 여당 원내대표에게 하소연했다. 대부분의 화물기사들이 차를 할부로 사기 때문에 빚이 있다고 말했다. 그 빚을 탕감해 달라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다만 배·보상문제가 해결이 될 때까지 은행에 상환을 연기해 줄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해 달라고 말했다. 여당 원내대표는 우리의 말을 적기는 열심히 적었다. 국회의원은 다들 만나기만 하면 적기는 무진장 적어간다. 그러나 1년이 지나도 해결된 것이 없다. 숱하게 적어 가면서 돌아서면 다들 잊어버리는 것 같다.

지난 4월 3일 유가족들과 함께 삭발을 했다. 삭발은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어머니들이 삭발할 때는 마음이 찢어졌다. 지난해 5월 대통령은 기자회견에서 눈물을 보였다. 나는 그 모습에 감사했다. 대통령이 울고 온 국민이 슬프게 애도하는 모습을 보며 가슴이 아프면서도 감사했다. 그러나 1년이 지난 지금 정부가 해도 너무한다는 생각이다.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이렇게 1년 동안 문제를 질질 끌며, 가족들에게 언제까지 이런 식의 싸움을 강요할 것인지, 정부 측에서 누구 하나 나와서 제대로 이야기를 해줬으면 좋겠다. 대통령도 선체 인양을 검토하겠다고 하고 새누리당 원내대표도 국회 연설에서 세월호를 인양해 가족들의 한을 풀어주겠다고 했다. 그러나 그 속을 모르겠다. 믿을 수 없다.

나는 옛날로 돌아갈 수 없다. 치료를 받고 상담을 받지만 그저 약으로 버틸 뿐이다. 비행기 타는 것도 겁나는데 배는 앞으로 못 탈 거 같다. 화물차 기사 일을 다시 할 수 있을까. 나는 마음을 모두 놔버렸다. 어떤 일도 손에 잡히지 않는다. 다만 정말 알고 싶다. 그 배가 왜 그랬는지, 왜 그렇게 넘어가버렸는지 말이다. 그러기 위해서 같이 갈 것이다. 실종자를 찾아내고 배도 건져 올려 확인을 하고 진상규명을 해서 제대로 된 보상도 받을 것이다.

*세월호 생존 화물차 기사 최은수씨의 인터뷰를 재구성했습니다.

<박송이 기자 ps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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