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극의 놀이터는 놀이터가 필요 없는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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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세상이 아이들의 놀이터일 수 있을 때, 동네든 길이든 산이든 물이든 안전하고 충분한 놀이터일 수 있을 때 비로소 아이들은 마음껏 놀 수 있다.

지난해 5월 저명한 놀이터 디자이너 귄터 벨치히 선생이 한국에 왔었다. ‘저명한’이라는 표현은 근래 지나치게 경박해지긴 했지만 여전히 그 말이 적절한 소수의 사람들이 있다. 귄터 벨치히도 그런 사람 중의 하나다. 70대 중반인 그는 젊은 시절 산업 디자인과 인테리어 디자인 쪽에서 일하다 놀이터 디자인과 제작에 투신해 ‘놀이기구 없는 놀이터’, ‘황무지와 놀기’, ‘물의 정원’, ‘모빌 파크’ 등을 만들어냈다. 그가 존경받는 이유는 단지 ‘착한’ 놀이터를 만들었기 때문은 아니다.

지난번에 어린이 관련한 일에서 아이가 주인이 되지 못하고 어른의 필요와 욕망으로 대상화하는 문제에 대해 말한 적이 있다. 그러나 아이가 주인이 되게 한다는 건 말이 쉽지 실제로는 어려운 일이다. 아이가 주인이 된다고 설명되는 많은 것들은 실은 아이가 주인이 된다고 주장되는, 또 다른 대상화의 결과물이기 십상이다. 그걸 넘어서려면 아이라는 존재에 대한 깊은 이해와 철학이 필요하다. 귄터 벨치히는 말한다.

새학기를 맞아 다시 문 연 서울 용현초등학교 와글와글 놀이터에서 어린이들이 뛰어놀고 있다 | 김정근 기자

새학기를 맞아 다시 문 연 서울 용현초등학교 와글와글 놀이터에서 어린이들이 뛰어놀고 있다 | 김정근 기자

‘가만 있으라’고 윽박질러온 사회
“아이들의 본성은 언제 어디서나 모든 걸 가지고 노는 것이지요. 아이들은 창의적이고 즉흥적이에요. 단순히 신발을 터는 것도 아이들에겐 놀이가 될 수 있어요. 아이는 어른들이 예측하지 못한 자신만의 방법과 규칙을 찾아 놀이를 합니다. 하지만 어른들은 그걸 원치 않기 때문에 어른의 환경으로부터 아이들을 울 밖으로 쫓기 위해 놀이터를 발명해낸 것이죠.”

조심스러운 말이지만, 그의 이야기는 결국 ‘궁극의 놀이터는 더 이상 놀이터가 필요 없는 세상’이라고 정리된다. 온세상이 아이들의 놀이터일 수 있을 때, 동네든 길이든 산이든 물이든 안전하고 충분한 놀이터일 수 있을 때 비로소 아이들은 마음껏 놀 수 있다. 놀이터로 돈을 버는 사람들이나 제 필요와 욕망에 의해 아이들의 놀이를 제한하려는 우리에겐 결코 반갑지 않은 이야기이지만 부인할 수 없는 진리다.

세월호 사건 직후였던지라 벨치히 선생은 그와 관련한 질문도 많이 받고 그에 대한 견해를 이야기하게 되었다. 한 자리에서 그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독일 아이들이었으면 가만히 있으라고 한다고 해서 결코 가만히 있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한마디가 내 마음에 깊게 자리잡았다. 진보적인 경향의 많은 시민들이 아이들에게 “가만 있으라”고 가르치고 윽박질러온 사회에 대해, 그런 태도를 보여온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러나 “아이들은 왜 가만히 있었는가”라고 질문하는 사람은 찾아보기 어렵다.

이유는 실은 단순하다. “가만 있으라”고 가르치고 윽박질러온 사회에 대한 이야기는 사회의 전체가 아니라 권위주의 독재 시절로 회고되면서 자연스럽게 오늘 보수진영과 그들의 교육관에 대한 비판으로 연결된다. 그러나 “아이들은 왜 가만히 있었는가”라는 질문은 현재 아이들의 일반적 상태에 대한 것이기 때문에 ‘나’를 포함할 수밖에 없다. ‘떠넘길 대상이 있는’ 이야기는 하기 쉽지만 ‘나를 포함하는’ 이야기는 하기 어려워한다고 할까.

진보적인 경향의 시민들에게서 이런 경향이 본격화한 건 이명박 정권 이후다. 김대중, 노무현 정권을 거치며 한국의 진보적인 시민들은 곤혹스러운 처지를 맞게 된다. 보수라 불리는 수구 반공주의 세력이 엄존하기에 민주주의 문제가 여전히 남아 있는 반면, 실제 내 삶은 신자유주의가 만들어낸 불안과 욕망에 함락되어 가는 상황에서 그 두 문제에 균형 있게 대응하거나 삶을 구성하기란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곤혹스러움은 자연스럽게 민주주의 문제를 최대한 부각함으로써 신자유주의 문제는 피하는 경향으로 나타났다. 노무현 대통령은 자신의 노선을 ‘좌파 신자유주의’라는 웃지 못할 신조어로 설명한 일 역시 그 곤혹스러움의 한 단편이었던 셈이다.

아이들 밥그릇 놓고 장난치는 홍준표
그런 곤혹스러움을 일거에 해결해준 건 바로 이명박이다. 노무현 정권 때까지만 해도 조중동과 수구세력을 비판한다고 해도 진보를 자처하기에는 신자유주의라는 걸림돌이 있었는데, 이명박이라는 믿기지 않을 정도의 추악한 인물이 사회 전면에 나타남으로써 걸림돌이 치워졌다. 진보적이고 정의로운 시민이 되기가 너무나 쉬워졌다. 신자유주의고 교육문제고를 떠나서 ‘이명박만 욕하면’ 되는 것이다. 그런 비굴한 태도는 ‘최소한의 상식을 회복하는 게 숙제’라는 말로 대변된다. 그리고 신자유주의에 대한 실제적 억지력을 잃음으로써 신자유주의 지옥은 더욱 가속화했다.

교육문제에서도 체벌이나 권위주의적 훈육 같은 민주주의적 문제들은 매우 민감하고 격렬하게 부각되었지만, 아이가 사람이 아니라 상품으로 키워지는 본질적 문제에 대해서는 ‘어쩔 수 없는 현실’로 설명되었다. 전자의 문제는 몹시 사회적으로, 후자의 문제는 몹시 사적으로 다루어졌다. ‘각자도생’만 생각하는 부모들의 방치 속에 교육 현실은 더욱 더 돈귀신에 매몰되어 갔다. 세월호 사건은 그 필연적 비극이다.

세월호 사건은 비극의 귀결일까 시작일까. 그 비극 앞에서 세상과 내 삶을 되돌아보는 성찰적인 사람들이 많다면 귀결일 것이다. 그러나 어떤 책임지지 않으려는 사람들과 그들을 욕하는 사람들만 있다면 그것은 분명한 시작일 것이다. 그리고 상황은 그리 좋아 보이지 않는다. 세월호 사건 직후에는 ‘아이를 더 이상 이렇게 키우지 않겠다.’ ‘미래 행복을 위해 아이의 행복을 유보하지 않겠다. 지금 행복하게 해주겠다’고 다짐하는 부모들이 많았다. 그러나 박근혜 정권의 파렴치한 태도가 부각되면서 얼마 지나지 않아 사라졌다. 질문해 보자.

성찰이라는 말은 도덕적 훈계나 개인 윤리적 맥락으로만 이해되기 쉽다. 그러나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성찰은 거의 전적으로 사회적인 것이다. 우리는 타락하고 부도덕한 나에 대해 반성하려는 게 아니다. 우리는 우리 앞에 있는 이명박과 박근혜와 정몽구와 이건희 같은 사람들을 반대하듯, 이명박과 박근혜와 정몽구와 이건희가 진즉 우리 안에 들어와 똬리를 틀고 우리를 옴짝달싹 못하게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우리 안의 그들을 반대하는 것이다. 그게 바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성찰이다.

성찰을 피하는 핑곗거리는 언제나 풍성하게 공급된다. 아이들 밥그릇을 놓고 장난치는 홍준표나 한 고등학교 교감 같은 사람들이 가장 최근 예다. 그들을 욕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그들을 핑계로 삼는 건 부끄러운 일이다. 당연한 일로 부끄러움을 감추려는 우리가 아이들을 좋은 사람들로 키워낼 수 있을까?

<김규항 <고래가 그랬어>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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