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간 여성 수천명 분노의 ‘장례식 행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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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매를 맞아 죽은 파르쿤다처럼 몸이 붓고 피멍이 든 분장을 한 여성 2000여명도 거리로 나와 눈물을 뿌리며 목소리를 높였다. 극도로 여권이 무시되는 남성 중심적 사회에 대해 품어온 분노가 순식간에 폭발한 순간이었다.

지난주 아프가니스탄에서는 극도로 분노한 여성들이 ‘관례’를 깨고 ‘행동’에 나섰다. 이달 초 이슬람 경전인 코란을 불태웠다는 누명을 쓰고 군중에게 몰매를 맞아 숨진 여성인 파르쿤다(28)의 장례식에서였다.

수도 카불에서 진행된 장례식에서 운구를 맡은 것은 여성 인권 운동가들이었다. 아프간에서 운구는 전통적으로 남성들이 한다. 여자는 장례식에조차 참석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이슬람 관례를 깨고 여성들이 운구한 것은 유족의 허락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유족은 “우리는 가난하고 힘도 없지만 범인들이 법의 심판을 확실하게 받아야 한다고 요구한다”고 말했다. 몰매를 맞아 죽은 파르쿤다처럼 몸이 붓고 피멍이 든 분장을 한 여성 2000여명도 거리로 나와 눈물을 뿌리며 목소리를 높였다. 극도로 여권이 무시되는 남성 중심적 사회에 대해 품어온 분노가 순식간에 폭발한 순간이었다. 장례식에 참석한 한 인권 운동가는 “이번 장례식은 역사적으로 혁명적인 일”이라며 “나는 이슬람 율법을 왜곡해 수많은 고통을 초래한 율법학자들을 향하는 눈에서 처음으로 분노를 봤다”고 말했다.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이 지난 3월 24일 수도 카불 거리에 나와 파르쿤다를 살해한 용의자들에 대한 강력한 처벌을 요구하며 행진하고 있다.  / 카불|AP연합뉴스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이 지난 3월 24일 수도 카불 거리에 나와 파르쿤다를 살해한 용의자들에 대한 강력한 처벌을 요구하며 행진하고 있다. / 카불|AP연합뉴스

“코란 불태웠다” 누명 쓴 여성 처형당해
파르쿤다 살해 용의자로 남자 18명이 체포됐다. 현장에서 폭행 장면을 지켜보고도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경찰 13명은 정직 처분을 받았다. 몇몇 율법학자는 대규모 폭동이 발생할 것을 걱정해 이들을 석방해야 한다고 공개적으로 말했다가 엄청난 비판을 받기도 했다. 현장 목격자는 “파르쿤다와 논쟁을 벌인 예언자가 파르쿤다가 코란을 태웠다고 말하자 순식간에 사람들이 몰려들었다”며 “파르쿤다가 ‘나는 무슬림이고 무슬림은 코란을 태우지 않는다’고 말했지만 소용이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어떤 사람들이 큰 돌을 그녀에게 떨어뜨리자 그녀는 죽었다”며 “사람들이 그녀를 300m 정도 끌고 가 강물에 던졌다”고 덧붙였다.

압둘 라만 라미 내무부 수사국장은 “모든 증거를 살펴봐도 파르쿤다가 코란을 불태웠다는 증거는 없다”며 “그녀는 잘못한 게 없다”고 말했다. 아슈라프 가니 대통령도 “어느 누구도 타인을 개인적으로 심판하고 폭력으로 단죄할 수 없다”며 “살해자들을 확실하게 처벌하겠다”고 약속했다. 여권 운동가이며 영화감독인 사라 카리미는 “대통령의 영부인인 룰라가 왜 입을 다물고 있는지 모르겠다”며 “그녀는 엄청난 힘을 쓸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나”라고 비판했다.

아프가니스탄은 지금도 여권이 극도로 무시되는 나라다. 한마디로 자신의 운명을 여성 스스로 결정할 수 없는 곳이다. 결혼, 교육, 사회생활 등 거의 모든 면에서 그렇다.

아프가니스탄은 1997년 정통 이슬람 국가 출범을 선포한 탈레반이 2001년 몰락한 뒤 여권 향상에 신경을 써오긴 했다. 2002년 출범한 과도정부가 여성부를 처음으로 만들었고 탈레반 정권 시절 파괴된 교육시설도 재건했다. 헌법에 남녀평등도 명기됐고 여성이 교육받을 권리도 보장됐다. 이처럼 조금씩 여권 향상을 향한 발걸음이 이어지고 있지만 혁명적인 변화는 없다.

결혼도 아버지의 의지로 이뤄지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 태어나기 전부터 아버지에 의해 남편감이 결정되기도 한다. 가난한 집 딸은 아주 어릴 때 나이가 많은 부잣집 남자에게 팔려간다. 그래서 아프가니스탄 출생률은 세계 10위(1000명당 38.84명·2014년)로 무척 높고 첫아이를 낳는 여성들의 평균 연령은 20.1세로 상당히 낮다.

전체 인구 99%가 이슬람 신자인 아프가니스탄은 일부다처제다. 그래서 한 남자가 아니라 여러 남자들에게 시집가야 하는 여자들도 있다. 이 같은 현상은 경제적으로 열악한 시골 지역에서 더 많이 발생한다. 딸을 팔아서 남편 측으로부터 먹을 것, 돈 등을 얻는 식이다. 여자는 결혼하면 전적으로 남편 또는 남편 가족의 결정에 따라야 한다. 임신해서 병원을 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도 스스로 결정할 수 없다. 물론 이혼도 마음대로 못한다. 남자는 아내의 동의 없이 이혼할 수 있지만 여자는 거의 불가능하다.

여성들은 남자들에 비해 교육도 많이 받지 못한다. 남자는 전체 남자 인구의 43.1%가 글을 읽고 쓸 줄 알지만 여자는 10명 중 8명 정도가 문맹이다. 월드팩트북이 공개한 2011년 자료에 따르면 교육을 받는 평균 연수도 남자는 11년이지만 여자는 7년에 불과하다. 대부분 여성들은 가장 기본적인 교육만 받고 집안일과 농사일을 도맡는다. 아프간 인구 중 80% 안팎이 농사를 하고 있으며 그 중 30%가 여성이다. 사회적으로 활동하는 여성들이 점점 늘고 있지만 그래도 여전히 여성들의 주업은 가사와 양육이다.

여성의 운명, 여성 스스로 결정 못해
여성들의 사회적·정치적 참여가 조금씩 늘고 있다는 점은 고무적이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결정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는 수준까지 영향력이 강하지는 못하다. 선거가 있을 때마다 후보자로 나서는 여성들은 빈번하게 살해 협박을 받고 있다. 문맹자가 많아 이름보다는 얼굴을 알려야 하는 상황이지만 여성 후보자들은 오히려 선거 포스터에 얼굴 대신 과일 사진 등을 싣는다. 얼굴이 알려질 경우 폭행 또는 살해 당할 수 있다는 걱정 때문이다. 아프간 자유공정선거재단(FEFA)은 2010년 선거를 앞두고 발표한 보고서에서 “여성 후보들은 탈레반과 남자 후보자뿐 아니라 보통 사람들로부터도 엄청나게 강도가 높은 협박을 받고 있다”고 전한 바 있다.

아프간에서 여권 향상이 쉽지 않은 데는 경제적인 이유가 크게 작용한다.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2013년 기준 1100달러로 전 세계에서 215위다. 먹고사는 생존 문제가 워낙 다급해 인권은 뒷전으로 밀리기 일쑤다. 외신 보도, 유엔아프가니스탄지원단(UNAMA)의 발표에 따르면 아프간 여성의 급여는 남자의 3분의 1 수준이다. 농사일, 집안일을 포기하고 사회에 진출해도 빈곤이 계속되는 구조다. 그래서 사회생활을 하는 여성들에게 투잡은 기본이다.

BBC는 최근 아프간 여성들의 실태를 전하면서 “아프간 여성들이 자유를 얻고 사회를 개혁하기 위해 노력하면서 과거에 비해 상황이 많이 나아졌다고 해도 여전히 여성에 대한 폭력 사건이 자주 발생하고 있다”고 전했다. 가디언도 “여성의 권리는 민주주의가 얼마나 구현되고 있느냐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잣대”라며 “아프간은 법으로 인권이 보장되지 않는다면 언젠가 붕괴될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가디언은 “과거에는 외진 곳에서 여성을 폭행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번 파르쿤다 살해사건은 대낮에 이뤄졌기 때문에 더욱 심각하다”고 덧붙였다.

국내 중동 전문가들은 “코란에는 남녀가 역할만 다를 뿐 모두 동등한 가치와 존엄을 갖고 있는 존재라고 나와 있다”며 “이런 가르침이 남성 우월주의와 결부시켜 여성을 비하하고 여권을 유린하는 행동을 정당화시키는 근거로 활용돼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김세훈 경향신문 국제부 기자 shk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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