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많은 등장인물을 어떻게 외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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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첫 등장 페이지 목록’이라 부르고 있는 이 해결책은 그 이름 그대로, 각종 인명과 지명들이 처음으로 등장하는 페이지를 표시한 인덱스를 만드는 것이다.

얼마 전 유럽으로 이사를 간 친구에게 부치는 소포에 최근 읽은 줄리언 반즈의 근작 <사랑은 그렇게 끝나지 않는다>(Levels of Life)를 한 권 넣어서 보냈는데, 얼마 뒤 감사의 메일과 함께 이런 불평(이라기보다는 한탄)이 적혀 있었다.

‘그런데 책 앞부분에 나오는 기구비행사들 얘기, 좀 읽기 귀찮은 종류야. 난 이름 많이 나오는 거 너무 어려워. 그래서 이름들을 적어가면서 보고 있는 중.’

이 메일을 보며 생각했다. 유유상종이라더니, 과연 옛말 중 이유 없이 생긴 말은 없구나. 맞다. 나 역시 그 책의 전반부를 읽는 내내 등장인물들의 이름을 외우지 못해서 앞뒤 장을 뒤적거려 가며 읽었던 것이다. 딱히 변명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만, 그도 그럴 만한 것이 19세기 말 기구비행 모험가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이 책의 전반부에서는 각종 인명과 지명이 그야말로 폭포수가 되어 쏟아져내린다. 이 책의 10페이지까지 등장하는 인명만 적어봐도, 프레드 버나비, 사라 베르나르, 펠릭스 투르나숑, 주르주 클레랭, 에르네스틴, 고다르 형제, 외젠 고다르, 바르텔레미 들랑레, 서덜랜드 공작, 듀퍼린 백작, 리처드 그로스브너 경, 조르주 상드, 알렉상드르 뒤마, 오펜바흐 등등등인데, 지명까지는 지면과 독자 여러분의 안구건강을 고려하여 차마 적지 못하겠다만, 아무튼 영어와 프랑스어로 된 인명 지명 짬뽕져 어우러지는 이 책의 전반부는 과연 엄청난 이름의 향연임에 틀림없다.

서울도서관 앞에 있는 각종 책들. | 강윤중 기자

서울도서관 앞에 있는 각종 책들. | 강윤중 기자

이름 찾아 다시 앞 페이지 뒤적거려
더구나 가뜩이나 헷갈리는 마당에, 동일인을 두세 개의 다른 버전으로 적어놓기까지 해서(예를 들면 ‘펠릭스 투르나숑’은 유명한 초창기 사진가 ‘나다르’와 동일인물이고, ‘사라 베르나르’는 ‘신성한 사라’와 ‘마담 베르나르’로 표기되기도 한다) 헷갈림을 부추기고 있는 가운데, 아직 글의 초반이므로 대체 어떤 이름이 외워둘 필요가 있고 어느 것이 아닌지를 도대체가 가늠할 수 없는 마당이라 부담은 더욱 가중된다. 물론 조르주 상드나 뒤마나 오펜바흐 같은 유명인들의 이름도 가끔 짤막한 휴식처럼 등장해주긴 한다만, 처음엔 별로 외울 필요 없다고 생각했던 인명 또는 지명이 몇 페이지 뒤에 두세 번 계속하여 등장함으로써 결국 그 이름 찾아 앞 페이지를 하염없이 뒤적거리고 있는 자신을 보며 아아, 이놈의 저주받은 암기력…이라는 한탄과 함께 머리를 쥐어뜯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해결책은 없는 것일까. 물론 희곡이나 옛날 문고판 추리소설들에서처럼 주요 등장인물들의 이름을 맨 앞 페이지에 적고 간략한 해설을 다는 방법이 있긴 하다. 하지만 이야기에는 주요 등장인물들만 등장하는 게 아니다. 사실 책을 읽다 보면 계속 나와 저절로 외우게 되는 주요 등장인물들보다는 가끔씩 등장하는 ‘안 주요 등장인물’들의 이름을 외우는 쪽이 훨씬 더 난이도 높다. 따라서 이쪽이야말로 도움을 받아야 하는 일이다.

더구나 본명, 아명, 존칭, 별칭, 애칭, 약칭, 중간이름, 끝이름, 첫이름 등등 공포의 이름 변조 문화를 가지고 있는 러시아의 소설 앞에선 ‘주요 등장인물 소개’ 같은 건 거의 쓰나미 앞의 종이배에 지나지 않는다. 요즘에는 대개 이런 러시아 소설들에선 각종 이름들 나올 때마다 각주를 달아주긴 한다만, 각주를 매 페이지마다 달아줄 수 있는 게 아니니만큼, 이 역시 그닥 도움이 안 된다. 오죽하면 무라카미 하루키는 “과연 도스토옙스키 자신은 카라마조프가 사람들의 이름을 전부 외우고 있을까”라며 신음했을까. 전적으로 동감한다.

아무튼 태생적으로 사람 이름을 외우는 데 워낙에 소질이 없는 나는 각종 소설들과 전기들과 역사서를 읽으며 등장인물 이름 외우기의 고통을 이미 오래전부터 절감해왔고, 덕분에 이 문제에 대한 매우 획기적이고도 효율적인 해결책을 매우 오래전부터 고안해냈다.

얇고 가벼운 책 만들면 안 되나
그것은 무엇인가. 간단하다. 개인적으로 ‘첫 등장 페이지 목록’이라 부르고 있는 이 해결책은 그 이름 그대로, 각종 인명과 지명들이 처음으로 등장하는 페이지를 표시한 인덱스를 만드는 것이다. 독자는 뭔가 막히는 이름이 나올 때마다 이 목록을 참조해서 그 이름이 처음 등장한 페이지를 찾아간다. 그리고 그 이름이 처음 등장한 앞뒤 정황을 통해 ‘아하, 이 사람(또는 이곳)이었지!’라며 금세 기억을 되살릴 수 있다. 별 도움도 안 되는 ‘인물에 대한 간략한 소개’를 적는 수고 따윈 전혀 필요 없다. 예명, 애칭, 존칭 따위의 구분을 적어놓을 필요도 없다. 그런 건 각주에 적어두면 된다. 오로지 그 이름이 등장한 첫 페이지만 적어놓고, 나머지는 독자에게 맡겨두면 되는 것이다.

아아, 이 얼마나 간단하고도 효율적인 방법인가! 이런 생각을 해 내다니, 나 자신이 생각해도 참 기특하다기보다는 애처롭다. 오죽했으면 이런 생각까지 했겠는가.

하지만 이런 나의 기특하고도 참신한 아이디어는, 대체 왜 그런지는 알 수 없으나, 이제껏 주위 사람들에게 깨끗하게 묵살당하고 있다. 심지어는 같이 일을 했던 몇몇 출판 관계자들로부터는 매우 긍정적인 반응까지 얻었는데도, 아직까지 이 ‘첫 등장 페이지 목차’를 장착한 책이 나왔다는 소식은 들려오고 있지 않다. 대체 왜인가! 나처럼 등장인물 이름 암기에 애를 먹으며 고통받고 있는 독자들이 이 세상에는 분명 존재하고 있다. 짐작컨대 생각보다 꽤 많이. 다들 드러내놓고 말을 못하고 있어서 그렇지. 하여, 만일 지금 이 글을 읽고 계신 출판계 종사자가 계시다면, 모쪼록 이 방법을 꼭 활용해보시길 바라마지 않는다.

그런데 책과 관련하여 건의하고 싶은 건 이뿐만이 아니다. 언제나 나오는 얘기다만, 제발 책을 좀 작고 얇고 가볍게 만들어줬으면 좋겠다. 많은 사람들의 예상과는 달리 스마트 기기로 책을 읽는 일이 그닥 대세가 되지 못하고 있는 현재, 종이책의 휴대성 높이기는 여전히 무시할 수 없는 과제다.

더불어 모든 책, 그러니까, 하드커버뿐 아니라 페이퍼백까지에도 책갈피 끈을 달아줬으면 한다. 시중에 나온 각가지 책갈피들은 사라지기 일쑤고, 요즘 같이 중고책 도로 팔기가 활성화된 시국에서는 페이지 귀퉁이 접기도 함부로 할 수 없다. 비록 돈이 좀 들긴 하겠지만, 불필요한 하드커버 만들 비용이나 띠지 붙일 비용을 이쪽으로 돌리면 충분히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매년 때만 되면 ‘책을 읽자’ 풍의 각종 캠페인과 구호가 어김없이 등장한다만, 이 세상에 떠들썩한 캠페인이나 구호 따위로 해결되는 문제는 아무것도 없다. 오로지 하찮은 호의, 작은 시도, 조용한 배려 같은 것들만이 뭔가를 만든다. 삶에 진짜 도움이 되는 것들, 일찍이 레이몬드 카버가 말했던 ‘작지만 좋은 것’들을.

<한동원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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