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책에 대한 애들의 취향은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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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들이 ‘좋은 어린이 책’이라 말하는 책은 아이들이 재미없어 하고, 아이들이 재미있어 하는 책은 어른들이 ‘좋지 않은 어린이 책’이라고 생각하는 상황입니다.

고래가그랬어 창간 준비 더미(Dummy) 작업이 얼추 마무리되어갈 즈음, 한 출판사 대표와 밥을 먹으며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어린이 책 출판의 뚜렷한 철학을 가진 곳이라는 평가를 받고 운영도 탄탄한 곳이라 유익한 이야기가 많았습니다. 고래를 만들기 이전에는 어린이 책 쪽에 실무적인 경험이 없고 현황도 잘 모르는 상태였으니 더욱 그랬겠지요. 반주도 곁들이며 유쾌하게 대화를 나누던 어느 순간 그의 말이 툭 걸렸습니다. “대한민국 아이들 중에 저희 출판사 책 좋아하는 아이 한 명도 없어요. 다 부모님과 선생님들이 그래도 이런 책은 읽혀야 된다고 생각해서 사주는 거죠.”

물론 그는 좋은 뜻으로 하는 이야기였고, 맥락을 모르는 바 아니었습니다. 아이들이 갈수록 디지털 미디어나 인터넷, 게임 등으로 휩싸여가고 있어서 책을 읽으려 들지 않는다. 생각 있는 어른들이 애를 쓰고 있다는 그런 이야기였지요. 그러나 그의 말은 제 머릿속에 깊은 의문을 만들어냈습니다. ‘어린이 책의 주인은 아이들인데, 왜 아이들이 좋아하지 않는 책이 좋은 어린이책인가?’

서울도서관에서 책을 읽고 있는 어린이들. | 정지윤 기자

서울도서관에서 책을 읽고 있는 어린이들. | 정지윤 기자

보기도 전에 재미없다는 선입관 가져
일반적으로 ‘좋은 어린이 책’이란 어른들이 아이에게 좋을 거라 여기는 책을 말합니다. 그런데 ‘좋은 어린이 책’을 아이들이 좋아하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부모는 서점이나 어린이 책 단체 같은 곳의 추천도서 목록을 보고 아이에게 사다주는데, 아이는 그 책을 좋아하지 않는 거죠. 부모는 대개 책에서 원인을 찾으려고 하진 않습니다. ‘좋은 어린이 책’이니까요. 아이가 바람직하지 않은 반응을 보인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악순환이 시작되는데 결국은 아이는 어른들이 권하는 ‘좋은 어린이 책’은 보기도 전에 재미없다는 선입견을 갖게 됩니다. 어쩌다 재미있으면 ‘엄마가 읽으랬는데 이상하네?’ 하는 식인 거죠.

반면에 아이들이 알아서 좋아하는 책도 있습니다. 초등학교 앞 문방구에서도 팔 정도로 아이들이 재미있어 하는데, 이게 어른들이 보기엔 영 책 같지 않은 ‘좋지 않은’ 책입니다. 아이가 그런 책을 볼라치면 부모는 못보게 하려 들기도 합니다. 아이들은 그럴수록 더 보고 싶어하고 용돈을 모아 사보기까지 합니다. 정리하면 대강 이렇습니다. 어른들이 ‘좋은 어린이 책’이라 말하는 책은 아이들이 재미 없어 하고, 아이들이 재미있어 하는 책은 어른들이 ‘좋지 않은 어린이 책’이라고 생각하는 상황입니다.

창간 준비호는 누가 봐도 ‘좋은 어린이 책’이었습니다. 단정한 텍스트와 맑고 아름다운 일러스트 등등. 제가 고래를 만들기로 했던 건 너무나 고단하게 살아가는 아이들에게 동무를 만들어주고 싶어서였는데, 아이들에게 짐을 하나 더 지우는 꼴이 되겠구나 싶었습니다.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편집장과 며칠을 고민한 끝에 더미를 버리기로 결정했습니다. 많은 시간과 여러 사람의 노동이 들어간 걸 버리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아무리 궁리해도 다른 선택은 없었습니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잡지를 만들자. 아이들에게서 이 잡지만은 내 편이고 내 이야기를 들어준다는 믿음을 얻어야 한다. 아이들의 동무가 되는 게 우선이고, 그 다음에 교양이니 인문이니 생태니 내용들을 생각하자. 그렇게 처음부터 다시 만들었습니다. 애초 더미에는 만화가 거의 없었습니다. 그런데 새 더미는 만화의 비중이 꽤 많아졌습니다. 만화를 싣기 위해 싣는 게 아니라, 담고자 하는 내용들을 ‘만화라는 그릇’에 담아 아이들이 좀 더 재미있고 친근하게 느낄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고래는 지금도 종종 ‘어린이 만화잡지’라 불리곤 합니다.

2003년 10월, 창간호를 어린이 책이나 교육 쪽에서 활동하는 몇몇 분들에게 보내드리고 의견을 구했습니다. 아쉽게도 부정적인 의견이 많았습니다. 내용이 어수선하다, 편집이나 그래픽도 정신이 없다는 이야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특별히 부정적인 의견을 낸 분이 생각납니다. ‘이래 갖고 아이들이 좋아할 거라 생각하느냐’는 투로 이야기해서 고래 동료들이 기분 상해 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며칠 후 이 분이 전화를 해선 “초등 2학년인 딸이 고래를 끼고 산다”며 껄껄 웃는 거였습니다. 사연이 있었습니다.

아이들 편이 되기 위해 책 다시 만들어
아빠란 자기가 잘하는 걸 아이가 좋아할 때 기쁜 법입니다. 아빠가 소싯적에 축구선수여서 축구라면 어떤 아빠보다 자신이 있는데 아이가 축구를 좋아한다면 얼마나 기쁜 일입니까. 그런데 만일 아이가 농구만 좋아한다면 몹시 서운할 수밖에요. 이 아빠는 교사인데 워낙에 책을 좋아해서 인문·사회 전 분야에 지식이나 식견이 상당한 분이었습니다. 아이와 그런 쪽 이야기를 하는 거라면 누구보다 자신 있는 아빠였던 거지요. 아이가 2학년이 되고 그런 이야기를 들려줄 때가 되었지 했는데, 할 기미만 보이면 “아빠 또 재미없는 이야기한다”며 도망가버리곤 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고래 창간호를 가져가서는 아이에게 보라고 하지도 않고 책상 위에 두었는데 아이가 보고 있더라는 거죠. 그리고는 이내 아빠한테 질문을 퍼붓기 시작하더랍니다. 당연히 아빠가 근사하게 대답해주었고, 딸은 꼬리를 물고 또 질문하니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함께 기뻐하며 통화하던 제가 슬그머니 물었습니다. “그런데 선생님. 며칠 전엔 이래 갖고 고래 누가 보겠냐고 하시지 않았나요?” 그는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 민망해하며 웃었습니다. 그에게 말했습니다. “어른들이 보기엔 어수선하고 정신이 없고 해도 아이들은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게 아이들 자신의 모습이니까요.” 실제로 아이들의 반응은 어린이 책 전문가 어른들과 많이 달랐습니다. 열렬한 호응이었지요. 그런데 그런 반응은 한편으로 고래의 항해를 어렵게 만드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좋은 어린이 책’의 기준이 아이가 아니라 어른인 좀 더 본질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어린이 책의 사용자는 어린이지만 구매자는 어른이라는 것입니다. 무슨 상품이든 마찬가지지만, 살 사람에게 잘 보여야 잘 팔리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이치입니다. 아이들이 제아무리 좋아해도 어른들이 덜 좋아하거나 불편한 구석이 있다면 운영 면에선 불리할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저나 동료들이 그걸 몰랐던 건 아닙니다. 오히려 알았기 때문에 그렇게는 할 수 없었던 것일 겁니다.

고래가그랬어 더미 이야기를 했지만, 제가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건지 아셨으리라 믿습니다. 어른은, 특히 부모는 언제나 아이를 ‘대상화’하는 오류에 빠지곤 합니다. 아이를 위하여 아이에게 좋은 걸 하는데, 실은 자신이 좋아하는 걸 아이에게 이런저런 수단과 방법으로 강요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런 과정을 통해 아이는 부모로부터 멀어집니다. 부모가 애를 쓸수록 더욱 더 말입니다.

<김규항 <고래가 그랬어>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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