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가이드북, ‘색깔’을 확실히 보여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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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가이드북에는 필자들의 갖가지 문화적 취향에 관한 정보도 꼭 기재해줬으면 한다. 그래야 취향이 전혀 다른 사람이 쓴 가이드북을 집어 들어서 모처럼의 여행이나 휴가를 망치고 마는 비극 정도는 미연에 방지할 수 있을 것이다.

작년 연말에 즈음하여, 많은 분들께서 갓 나온 2015년 달력에 찍힌 빨간 숫자의 수와 위치를 짚어보며 개학날부터 방학날짜 꼽는 초등학생마냥 가슴 설레셨으리라 믿는다. 왜 아니었겠는가. 심지어는 나 같은 비직장인도 그랬던 마당에.

자, 이제 그 대망의 첫 번째 연휴가 한 달 앞으로 다가왔다. 모르긴 해도 이맘때쯤이면 많은 분들께서 여행 준비에 은근 분주하실 것이다.(이런 얘길 공개적으로 하는 건 위험한 짓인가? 흠. 그럴지도) 그리고 이에 발맞춰 시중 서점에서 여행 가이드북 판매도 부쩍 늘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막상 이 가이드북을 고르는 일이란 것이 결코 간단치 않다. 사진이 많고 컬러가 화려한 경우는 대개 내용 및 지도가 부실하다. 심할 경우엔 여행사 광고전단과 분간이 되지 않는 경우까지도 종종 있다. 반대로 지도가 정확하고 내용도 깔끔하게 정리정돈된 ‘결정판’ 가이드북들은 너무 빈틈없으려 애쓴 나머지 지나치게 방대해지는 경향이 있다. 대개 이런 책들은 전 세계 여행자들을 타깃으로 삼는 외국계 가이드북인 경우가 대부분인데, 하여 이런 책들은 한국 여행자의 취향 및 패턴과 사맛디 아니하는 내용도 꽤 실려 있다는 문제 또한 있다. 특히 음식과 액티비티 쪽으로.

한 대형서점에 여행책이 진열돼 있다. | 홍도은 기자

한 대형서점에 여행책이 진열돼 있다. | 홍도은 기자

정말로 ‘숨막히는’ 파리 하수도 박물관
실제로 내가 난생 처음 배낭여행(지역은 유럽)을 떠났을 때는 기대감과 의욕의 결합으로 생성된 에너지를 감당 못하던 배낭여행자였던 만큼, 이 ‘결정판’ 가이드북을 한 줄이라도 놓칠세라 무척이나 꼼꼼하게 공부했었는데, 그중 파리 편에 있던 ‘파리 하수도 박물관’(Musee des Egouts de Paris)이라는 곳에 대한 소개글을 읽고는 ‘여기만큼은 반드시 가보리라’며 기내식 먹다 말고 두 주먹 불끈 쥐며 결심했더랬다. 물론 평소에 대도시 하수도라는 공간에 품고 있던 호기심 탓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결정적이었던 것은 소개글의 맨 마지막 문장이었다. 그 문장은 ‘그곳은 당신을 숨막히게 할 것이다, 틀림없이’(It’ll take your breath away, it will)이었던 바, 나는 속으로 외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대체 얼마나 매력적인 곳이기에!

뭐, 이미 많은 분들께서 눈치채셨겠지만 위 문장은 그 어떤 은유비유직유상징메타포알레고리도 함유되어 있지 않은 순도 100퍼센트 직설법 문장이었다. 에펠탑 코앞에 보이는 파리 시내임에도 꽤 인적 없는 외진 곳에 위치하여 찾아가기도 그다지 쉽지 않았던 이곳은, 실제 하수도의 일부를 개방해 박물관으로 꾸며놓은 곳이었다. 하여, 입구를 지나자마자 습기 가득찬 후텁지근한 공기가 덮쳐온다. 그 공기분자 하나하나에 하수구 냄새가 알알이 박혀 있었던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 냄새는 그야말로 기도부터 모공까지, 온몸의 숨구멍을 틀어막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숨겨진 보석 같은 명소’라는 나의 호언장담만 믿고 따라온 여행친구 두 명은 그저 코를 막은 채 말이 없다. 가이드북을 다시 펴본 나는, 그제야 이 박물관의 관람구간 ‘480m 짜리 하수도 터널’이라는 설명 앞에 ‘구린내 나는’(odoriferous)이라는 형용사가 붙어 있음을 발견하였다. 하지만 때는 이미 너무나도 늦어버린 뒤였다.

찬란히 부서지는 5월 파리의 아침 햇살 아래, 두 명의 동행과 함께 숨 턱턱 막히는 하수터널 480m를 묵묵히 돌파한 나는 그날 오후 내내 동행들의 후각세포에 들러붙은 하수구 냄새를 중화시킬 커피맥주양주와인 등등의 음료와 식사 일체를 제공함으로써 부적절한 번역에 대한 죗값을 치러야 했다.

하여, 15년이나 뒤늦은 마당이긴 하다만 이 지면을 빌려, 이 필자, 소리 높여 외쳐마지 않는다. 가이드북 같은 곳에서 조크를 하려거든 나같이 순진하고 부주의한 독자를 위해 ‘이 문구는 조크입니다’라는 걸 확실하게 표시해줬으면 좋겠다.(예컨대 스마일이나 혓바닥 기호 같은 것을 붙인다든지 해서) 물론 조크 효과야 대거 반감되겠지만, 열 명의 범인을 놓치더라도 한 명의 무고한 사람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경구도 있잖은가. 그런 표시는 반드시 해줘야만 한다고 본다. 정말이지 반드시.

호불호 확실한 일관성 있는 비평가 필요
말을 꺼낸 김에 좀 더 얘기하자면, 여행 가이드북에는 필자들의 갖가지 문화적 취향에 관한 정보도 꼭 기재해줬으면 한다. 리조트파냐, 대도시파냐, 오지탐험파냐, 레저쇼핑파냐 등등의 여행취향만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좋아하는 또는 싫어하는 음악·영화·책 등등의 기초 문화취향, 그리고 식성과 식사량, 평균수면시간, 체력과 평소 운동량 등의 라이프스타일 또한 충실하게 기재되어야 할 것이다. 특별히 즐기는 취미나 좋아하는 색깔, 이성취향 같은 것도 추가된다면 금상첨화겠다.

뭐야, 그런데 이건 소개팅 주선 사이트의 자기소개란 항목하고 별반 다를 바 없잖아! 라고 하실 분 계실지도 모르겠는데, 원리적으로 따지면 가이드북은 소개팅에서의 자기소개와 별반 다르지 않다. 왜냐. 여행은 일상의 모든 체험들을 높은 밀도로 농축시켜 집어넣은 압축 시간 통조림이기 때문이다. 사랑에 빠진 사람들의 시간이 대개 그러하듯. 사실 아무리 가이드북의 필자가 여행지에 대해 방대하고 해박한 지식의 소유자이고, 그걸 체계적으로 정리해낼 수 있는 사람이라 해도, 가이드에는 반드시 필자의 취향과 판단, 그리고 관점이 스며들게 마련이다. 요컨대 ‘팩트’에도 여러 가지 버전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이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 줄리언 반즈의 소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의 한 구절을 빌려 말하자면 이렇다. “우리 앞에 주어진 버전의 역사를 이해하려면 역사학자 개인의 역사를 알아야만 한다”) 하여, 모름지기 여행 가이드북 정도의 중차대한 역할을 하는 책이라면 독자들이 그 부분을 충분히 감안하고 판단할 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 그러면 취향이 전혀 다른 사람이 쓴 가이드북을 집어 들어서 모처럼의 여행이나 휴가를 망치고 마는 비극 정도는 미연에 방지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조크를 진담으로 착각해서 악취의 전당에 제발로 뛰어드는 우매함까지 막을 수야, 흠, 없겠다만.

그런데 이런 것이 어디 여행 가이드북에만 해당되는 얘기일 뿐이랴. 주례사와 알바와 낚시 난무하는 우리의 문화정보 환경에서, 지금 가장 필요해 보이는 것은 바로 이런 리트머스 시험지 같은 존재들이 아닌가 싶다. 자신의 사적인 취향과 보편타당치 않은 편견을 일관되게 드러내고, 그에 따른 호불호를 확실하고 일관성 있게 말할 줄 아는 비평가들, 모두의 지지와 동의라는 허구를 추구하는 대신, 극단적인 지지와 미움을 동시에 즐겁게 받아들이는 모난 돌들 말이다.

주례사도 낚시도 모두 믿을 수 없어, 결국 ‘흥행성적만이 진리’라는 애처로운 모토에 기댄 채 예매순위, 흥행순위, 조회수, 판매지수, 다운로드횟수 같은 숫자들을 뒤적거리고 있을 수밖에 없는 지금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런 비평가들이다. 그런 비평가들이 빼곡히 눈금 되어 찍혀 있는 길고 넓은 줄자다.

<한동원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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