캥거루족 양산하는 부동산대책
  • 인쇄
  • |
  • 목록
  • |
  • 복사하기
  • 페이스북
  • 트위터
  • 밴드

무주택자들 주택구입 갈수록 어려워… 독립 엄두 못 내고 부모에 얹혀살아

서울 동작구에 사는 ㄱ씨(32·남)는 매일 밤 11시가 넘어서야 집에 들어온다. ㄱ씨의 회사는 2주에 한 번꼴로 야근을 하고, 평소에는 저녁 6시면 퇴근한다. ㄱ씨는 집에 일부러 늦게 들어가는 것이다. 조금이라도 귀가시간을 늦추기 위해 어떻게 해서든 저녁 약속을 만든다.

ㄱ씨는 군생활 2년을 제외하고 계속 부모와 함께 살았다. 대학생 때는 독립할 생각도 있었다. 하지만 부모로부터 등록금조차 지원받지 못하는 처지라 독립은 포기했다.

대학을 마친 ㄱ씨는 1년 정도 준비 끝에 한 회사에 취직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젠 부모가 귀농을 하겠다며 ㄱ씨의 결혼과 독립을 종용하기 시작했다. 애인도 없고, 학자금 대출을 갚느라 저축도 거의 하지 못한 ㄱ씨는 부모에게 사정을 설명했다. 하지만 부모는 “우리는 20대 때 결혼하고 너까지 낳았는데 넌 서른이 되도록 뭐하고 있었느냐”는 핀잔만 준다.

지난해 12월 30일 서울 동대문구 경희대학교 게시판에 붙은 최경환 경제부총리 비판 대자보 앞을 대학생들이 지나치고 있다. | 연합뉴스

지난해 12월 30일 서울 동대문구 경희대학교 게시판에 붙은 최경환 경제부총리 비판 대자보 앞을 대학생들이 지나치고 있다. | 연합뉴스

2030세대 가구주 비율 크게 떨어져
ㄱ씨는 부모의 잔소리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귀가시간을 늦췄고, 다시 부모는 무슨 일을 하길래 한밤중에 퇴근하느냐고 묻기 시작했다. ㄱ씨의 귀가시간은 점점 늦어졌다.

ㄱ씨는 “하루빨리 나가고 싶은데 내 힘으로는 독립할 수가 없다. 어쩔 수 없다”고 말했다.

ㄱ씨처럼 성인이 되어서도 부모와 함께 사는 사람들을 속칭 ‘캥거루족’이라고 한다. 일본에서는 ‘패러사이트 싱글’(기생충 같은 자녀), 영국에서는 ‘키퍼’(부모의 연금을 갉아먹는 자녀)라고도 부른다.

여러 통계지표는 캥거루족 현상이 개인적 능력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것임을 보여준다. 2013년 6월 통계청 발표에 따르면 서울에 사는 30~40대 성인남녀 중 약 57만명이 부모 집에 얹혀 살고 있다.

10년 전에 비하면 서울시의 30~40대 숫자는 360만여명에서 100만명 이상 줄어들었다. 하지만 캥거루족은 10년 전보다 65% 가까이 늘어났다

지난해 3월 산업연구원이 발표한 ‘가구 특성에 따른 소비지출 행태 분석 및 시사점’에 따르면, 2030세대의 가구주 비율도 지난 20년간 절반 이하로 떨어진 것으로 나온다.

1990년만 해도 2030세대가 가구주로 있는 비율은 전체의 55%를 넘었다. 하지만 2012년에는 2030세대가 가구주인 비율이 24%로 뚝 떨어졌다. 같은 기간에 40대 이상 연령층에서는 모두 가구주 비율이 상승했다.

1인가구가 늘어나는 추세임을 감안하면, 2030세대가 독립하는 비율이 뚝 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캥거루족이 부모 곁을 떠나는 결정적인 계기는 결혼이다. 하지만 결혼 비용의 부담 등으로 점점 시기를 미뤄 남성의 경우 보통 만 32세, 여성은 만 29세가 되어서야 결혼을 한다.

결혼이 늦어지는 가장 큰 이유는 주택비용에 대한 부담이다. 지난해 3월 듀오휴먼라이프연구소가 발표한 ‘결혼비용 실태 보고서’에 따르면, 결혼에 들어가는 비용은 남녀 합쳐 약 2억4996만원이다. 이 중 주택비용만 1억8028만원으로 집계됐다.

서울 성북구에 사는 학원강사 ㄴ씨(30·남)는 “아직 결혼 상대는 정하지 못했지만 결혼할 때 부모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말을 지금부터 계속하고 있다”고 말했다.

ㄴ씨는 집과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대학을 다녔음에도 성인이 된 이후 독립심을 길러보겠다며 월 30만원을 내고 원룸에서 3년가량 살았다. 하지만 자취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하느라 학업도, 동아리 활동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결국 군대를 다녀온 뒤 다시 부모님 집으로 돌아갔다.

ㄴ씨는 “학생 때 집에서 월세 내주는 친구들이 너무 부러웠고, 돈에 찌들리며 살다 보니 가치관도 변했다. 1~2학년 땐 얼굴이 예쁘면 다인 줄 알았는데, 요새 소개팅 나가면 직업부터 물어본다”고 말했다.

캥거루족을 부모의 품에서 해방시키려면 이들의 주거를 해결해야 한다. 하지만 ‘초이노믹스’로 대표되는 박근혜 정부의 부동산 정책은 오히려 캥거루족을 양산한다는 지적이 있다.

주택자금 대출 위해 혼인신고 먼저
지난해 7월 최경환 경제부총리는 부동산 경기를 활성화한다며 담보인정비율(LTV)과 총부채상환비율(DIT)을 완화했다. 쉽게 말해 이미 부동산이 있는 사람의 경우 은행에서 더 많은 돈을 빌릴 수 있게 됐다. 친기업적인 경제신문들도 “DIT와 LTV의 완화는 무주택자의 주택 매입보다 다주택자의 추가 주택 매입에 유리하다”고 비판할 정도였다.

이어 지난해 연말 여야 정치권은 박근혜 정부가 추진해온 ‘부동산 3법’을 통과시켰다. 주요 내용은 아파트의 재개발·재건축을 촉진하는 것이다. 부동산 3법에 따라 재건축 시 발생하는 초과이익 환수가 2017년까지 미뤄졌으며, 재건축 이후 최대 3채의 주택을 매입할 수 있게 됐다.

한 회계법인에서 일하는 회계사 ㄷ씨(33·남)는 5년을 사귄 여자친구와 결혼을 앞두고 있다. 5년간 직장에서 모은 돈으로 서울시 마포구에 월세 아파트도 얻었다. 집을 구하기 위해 몇 달간 부동산을 공부했다는 ㄷ씨는 “알면 알수록 어이가 없을 뿐”이라고 말했다.

ㄷ씨가 구한 신혼집은 보증금 1억원에 월세가 120만원이다. ㄷ씨는 “나중에 아이까지 생기면 고정지출액만 매달 300만원이 넘는다. 부모님 생신 때도 100만원 이상 드린 적이 없는데 매달 큰 돈이 집에 들어갈 생각을 하니 아까워 죽겠다”고 말했다.

ㄷ씨는 “회계에서 보통 건물의 감가상각 연한을 40년으로 잡는다. 그렇게 치면 월세를 120만원 내도 아깝지 않다. 그런데 현실은 아파트가 오래될수록 재건축 기대심리 때문에 더 가격이 높아진다”며 “아파트도 다른 상품처럼 오래 쓸수록 가격이 내려가도록 정부가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ㄱ씨는 이미 집 사는 걸 포기했다. 그동안 저축한 돈으로 스포츠유틸리티 차량(SUV)을 48개월 할부로 구입했다. ㄱ씨는 “어차피 집 살 돈도 없고, 집값이 내려갈 것 같지도 않다”며 “살 수도 없는 집 때문에 골머리를 앓느니 충분히 즐기며 사는 게 낫다”고 말했다.

ㄱ씨는 “몇 년 전부터 캥거루족이라는 말이 많이 나오는데, 나는 매월 꼬박꼬박 부모님께 월세를 내고 있다”며 “마치 젊은이들이 의존적이어서 부모집에 얹혀사는 것처럼 묘사하는 건 현실을 너무 모르는 말”이라고도 덧붙였다.

전문가 진단은 장기 공공임대주택

전문가들은 청년들의 주거권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장기 공공임대주택이 필요하다고 진단했다.

송기균 송기균경제연구소장은 “한국의 공공임대주택 비율은 5% 선으로 선진국에 비하면 너무 낮다. 그런데 박근혜 정부의 부동산 대책이 거꾸로 가고 있다”며 “지난해만 해도 광명과 시흥의 보금자리주택을 백지화하는 일이 있었다”고 지적했다.

최창우 내가만드는복지국가 공동운영위원장은 “부모로부터 독립하려는 단독 세대주를 위해 월세 25만원 이하(관리비 포함)만 부담해도 되는 17평(약 56.2㎡) 이하 소형 임대주택을 늘려야 한다”고 진단했다. 최 운영위원장은 “현재 임대주택이 주로 재개발지역에 있는데, 저소득층 등의 한계를 둔 터라 사회 초년생 등 청년층들이 들어갈 구석이 없다”며 “저출산 문제 해결을 위해서라도 공공주택을 대폭 늘릴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송기균 소장은 “집값을 정상가보다 높게 떠받치는 정부의 부동산 부양책이 계속될수록 젊은 세대가 독립할 가능성은 점점 줄어든다”며 “현재의 기업형 장기임대주택은 월세가 비쌀 가능성이 커 젊은 세대를 위한 대책은 되기 어렵다”고 말했다.

최은영 한국도시연구소 연구위원은 청년 주거권 문제 해결을 위한 혁신적인 방안으로 ‘사회주택’을 공급해야 한다고 말했다.

최 연구위원은 “사회주택은 사회적기업 등 비영리단체가 주도해서 짓는 주택으로, 공공의 부담이 적기 때문에 주거권 문제 해결에 보다 효과적이다”라고 설명했다. 즉, 사회주택은 기업형 장기임대주택과 형식은 비슷하지만 영리를 추구하지 않는다는 차이가 있다. 유럽 선진국의 사례를 보면 사회주택은 민간주택에 비해 장기계약이 이뤄지고, 임대료가 낮은 경향이 있다.

지난해 8월 서울시의회의 연구보고서에 따르면, 2011년 기준으로 프랑스, 영국, 스웨덴 등 유럽 복지국가의 경우 전체 주택 공급의 10% 이상이 사회주택이다. 네덜란드의 경우 전체 주택의 32%가 사회주택이다.

최 연구위원은 “2011년 기준으로 서울시 공공임대주택 거주자 중 20대의 비중이 1.7%에 불과했다”며 “입주민 차별 등 공공임대주택의 문제점을 말하는 경우도 있지만, 문제점을 말하기 이전에 공공임대주택 공급이 턱없이 적다”고 말했다.


<백철 기자 pudmaker@kyunghyang.com>

바로가기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