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기아차 ‘브랜드 고급화’ 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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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MW 연구소장 지낸 비어만 부사장 영입… 고성능차 브랜드 ‘N’ 육성 전망

“우리는 독일차 엔지니어와 싸우는 게 아니라 독일차 역사와 싸운다.”

현대·기아자동차 남양연구소 연구원들이 2013년 말 출시된 신형 제네시스를 개발하는 과정에서 한 말이다. 현대차는 패스트 폴로어(Fast Follower) 전략으로 세계 판매량 5위 자동차 기업이 됐다. 지난해엔 글로벌 판매량 800만대를 돌파하기도 했다. 후발주자로서는 남다른 성과를 거둔 셈이다.

계량화하기 비교적 쉬운 내구 품질, 동력 성능, 충돌 안전 등에서 현대·기아차는 빠른 속도로 경쟁업체와의 격차를 좁혀가고 있다. 신형 제네시스는 지난해 5월 미국 고속도로안전보험협회(IIHS)가 실시한 충돌시험 결과 전 항목에 걸쳐 만점을 얻어 최우수 등급을 획득했다.

하지만 시장을 선도하기 위해서는 스티어링(운전대 조작)의 정교함, 매끄러운 주행 성능 등 수치로 표현되지 않는 주행 감성의 개선이 필요하다. 현대·기아차 내부적으로도 “이제는 퍼스트 무버(First Mover)로서 새로운 도전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알버트 비어만 전 BMW 고성능차 개발총괄책임자.

알버트 비어만 전 BMW 고성능차 개발총괄책임자.

고성능차 개발 세계 최고 전문가
현대·기아차는 세계 일류 자동차 메이커로 도약하기 위해 다양한 준비를 하고 있다. 최근 발표한 알버트 비어만 부사장 영입은 이 같은 노력의 화룡정점이다.

비어만 부사장은 독일 BMW에서 30여년간 고성능차를 개발해온 세계 최고 전문가다. 그는 1983년 BMW그룹에 입사해 고성능차 주행 성능, 서스펜션, 구동, 공조시스템 등의 개발을 담당했다. 최근 7년간 BMW 고성능차 브랜드 ‘M’ 연구소장을 맡았다. M은 BMW의 고성능차 개발, 모터스포츠 관련 사업을 전문적으로 담당하는 사업부다. 현대차는 “비어만 부사장은 BMW 고성능 버전인 M 시리즈를 비롯해 각종 모터스포츠 참가 차량들의 개발 주역”이라고 설명했다.

비어만 부사장은 올해 4월 1일부로 현대·기아차 남양연구소에서 근무한다. 고성능차 개발과 함께 주행 성능, 안전 성능, 내구 성능, 소음 진동, 차량 시스템 개발 등을 총괄하게 된다.

이번 영입은 기아차가 2006년 8월 폴크스바겐·아우디에서 디자인 총괄 책임자를 지낸 피터 슈라이어를 부사장으로 스카우트한 것에 비견된다. 당시 적자에 시달리던 기아차는 피터 슈라이어 효과를 톡톡히 봤다. 호랑이코 그릴로 상징되는 ‘디자인 경영’을 통해 한 단계 도약하는 계기가 됐기 때문이다. 현대차도 비어만 부사장 영입을 통해 주행 감성 부분에서 혁신을 이뤄내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 현대차는 “2013년 세계에서 가장 혹독하기로 유명한 독일 뉘르부르크링 서킷에 ‘유럽 테스트센터’를 완공하면서, 과거 성능의 절댓값을 높이는 데서 나아가 주행 성능을 높이는 데 많은 공을 들이고 있다”고 설명했다.

피터 슈라이어 현대·기아차 디자인총괄 사장.

피터 슈라이어 현대·기아차 디자인총괄 사장.

피터 슈라이어 현대·기아차 디자인총괄 사장에 이어 비어만 부사장 영입도 정의선 현대차 부회장의 의지가 크게 반영된 것으로 전해졌다. 정 부회장이 삼고초려 끝에 슈라이어 사장을 영입했다는 것은 유명한 일화다. 현대차 관계자는 “비어만 부사장의 경우 정 부회장이 직접 전면에 나서 접촉을 하지는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정 부회장은 현대·기아차가 한 단계 도약하기 위해선 ‘브랜드 고급화’가 필요하다는 판단을 하고 있다. 현대차가 올해 초 자동차 경주의 양대 산맥으로 꼽히는 ‘월드 랠리 챔피언십’(WRC)에 재출전하기로 한 것도 이 같은 판단에서다. WRC 출전은 적지 않은 비용이 들어가지만 현대차 기술력을 알리고, 브랜드 이미지를 높일 수 있는 기회다.

프리미엄 브랜드 인수·합병 가능성
현대·기아차는 비어만 부사장 영입으로 주행 감성을 높이는 데 그치지 않고 고성능차 개발에도 박차를 가한다. 현대차는 2013년 말 WRC 참가를 발표하면서 ‘N’을 공개한 바 있다. 남양연구소 영문 첫 글자를 딴 N은 현대차 고성능 기술력을 상징하는 로고다. 자동차업계에서는 향후 N이 BMW M과 메르세데스-벤츠 AMG처럼 고성능차 브랜드가 될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고 있다.

현대차 관계자는 “비어만 부사장 영입을 통해 고성능차 개발 기술력을 한 단계 높이는 것은 물론 양산차에 고성능 기술을 접목해 판매 모델의 경쟁력 강화를 이뤄내겠다”고 말했다. 비어만 부사장이 BMW에서 쌓은 노하우와 현대차가 WRC에 참가하면서 축적한 고성능차 기술을 접목시키겠다는 것이다.

현대차 WRC 출전 차량 i20 월드 랠리카.

현대차 WRC 출전 차량 i20 월드 랠리카.

증권가에서는 현대·기아차가 브랜드를 고급화하기 위해선 인수·합병(M&A)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김용구 삼성증권 연구원은 “현재의 현대차 브랜드 포지셔닝과 제품 라인업으로는 럭셔리와 고성능 차량 수요를 온전히 담아내기 어렵다”면서 “매물화 가능성을 고려했을 경우 (영화 007 시리즈에서 본드카로 유명한) 애스턴 마틴과 로터스가 이에 대한 대안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양사 인수가액은 2조원으로 높지 않은 데다 인수할 경우 현대차 브랜드 전략에 날개를 달아줄 수 있다는 것이다.

현대차 역시 기회가 있을 때마다 프리미엄 브랜드에 대한 인수를 검토해왔지만 가시화된 건 없는 상황이다. 현대차 관계자는 “지난해 한전 부지 인수 이후 외형 성장보다는 내실 경영에 초점을 두고 있기 때문에 애스턴 마틴 등에 대한 인수 가능성은 매우 낮다”고 말했다.

<김지환 경향신문 산업부 기자 baldk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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