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내음 가득한 차를 만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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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총 쌍용자동차지부 김정욱 사무국장이 70m 굴뚝 위에서 성탄절에 보낸 편지

성탄절 아침입니다. 지난밤에는 노동자들과 함께하는 ‘고난함께’ 목사님과 신도님들의 새벽송을 들었습니다. 괜히 마음이 들떠 굴뚝 한편에 양말을 걸어놓고 잠을 청했습니다. 잠이 깨 이불 속에서 몸을 뒤척이고 있는데 이창근 실장이 나와 보라고 합니다. 태양이 따뜻하게 비춥니다. 굴뚝을 때리던 바람도 잦아들었습니다. 굴뚝에서 맞는 13일째 아침, 많은 분들의 바람과 성탄 선물이 따뜻한 햇볕이 되어 굴뚝을 내리쬡니다. 행복감이 밀려들었습니다.

가슴 뭉클한 동료들의 문자와 SNS
요즘은 시간이 빨리 지나갑니다. 전국에서, 해외에서 보내주시는 응원글을 읽고 답장을 보내고 안부를 묻고 소식을 전하고, 공장으로 달려오신 분들에게 힘껏 손을 흔드는 일로 하루가 금세 저뭅니다.

13일 전 굴뚝에 오르던 날이 오랜 일인 것처럼 멀게 느껴집니다. 첫날, 날씨가 너무 춥고 바람이 세게 불어서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당황스러웠습니다. 공장 안 동료들에게 소리치고 싶었고, 우리가 여전히 살고 있다는 것을 알리고 싶었는데 막상 굴뚝에 올라오니까 살아남기 위해 추위와 싸워야 했습니다. 일주일 동안 바람이 몹시 불었습니다. 굴뚝이 심하게 흔들렸습니다. 불안했습니다. 머리가 아프고 어지러웠습니다. 바람이 심할 때에는 서 있기도 힘들었습니다. 준비해온 게 없다 보니까 생리현상을 해결하고 추위를 피하는 일이 만만치 않았습니다. 비바람이 굴뚝 사방에서 때릴 때에는 정말 미칠 지경이었습니다. 일주일 동안은 그저 거대한 자연의 힘 앞에 내던져진 한낱 약한 생명체처럼 웅크리며 지내야 했습니다.

저와 이창근 실장이 굴뚝에 올랐다는 소식을 들은 동료들이 하나둘 문자와 SNS를 보내기 시작했습니다. 몇몇 동료들은 아무것도 해주지 못해서 미안하다는 문자를 보내기도 했고, 점심이나 퇴근 시간에 굴뚝 밑에 와서 말없이 우리를 쳐다봐주기도 했습니다.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굴뚝에서 공장을 바라보면서 옛날 생각이 많이 떠올랐습니다. 내가 일했던 조립라인의 지붕을 찾았습니다. 내가 했던 작업의 순서를 기억해보기도 했고, 동료들과 어떻게 일했는지 생각해보기도 했습니다. 저희 직에는 10명 남짓 있었습니다. 저보다 선임이었던 상규 형이 있었고, 단짝이었고 마주보며 일하던 영태·명호·상현이, 해고자 명단에 올라 희망퇴직했던 민이형… 다 생각나지 않지만 그 당시 많이 웃기도 하고 장난치기도 했던 시간들이 어렴풋이 떠오릅니다.

쌍용차 70m 굴뚝 위 김정욱 사무국장. | 김정욱 제공

쌍용차 70m 굴뚝 위 김정욱 사무국장. | 김정욱 제공

굴뚝에서 관리자들이 일하는 본관 건물을 쳐다봅니다. 분노가 치밉니다. 2009년 상하이차가 기술만 빼내 중국으로 도망갈 때 우리의 생계와 미래를 책임져야 할 최형탁이라는 사장은 노동자들을 버리고 사표를 쓰고 회사를 떠나버렸습니다. 기술을 담당했던 임모 상무는 법정관리에 들어갔는데도 상하이차와 손을 잡아야 한다고 주장하더니 지금은 최형탁 전 사장과 함께 중국으로 튀었다고 합니다. 가족들과 함께 상하이차로 갔다는 소문이 공장 안팎에 파다한데 누구 하나 확인해주지 않고 있습니다. 기술유출을 막고 회사를 살리려고 했던 우리는 구속되고, 손해배상 가압류를 당하고, 동료와 가족들 26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들이 정말 우리 회사를 사랑했고, 애정이 있었다면 그렇게 할 수 없었을 겁니다. 이완용이 나라를 팔아먹은 것처럼, 쌍용차를 팔아먹은 사람들을 저는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쌍용차를 팔아먹은 자들 용서할 수 없어
제가 근무했던 16년, 해고생활 6년을 포함하면 쌍용차와 함께한 세월이 20년이 넘습니다. 저는 단지 차를 만들어 파는 것이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진정으로 사람의 마음이 느껴지는 차를 만들고 온기가 느껴지는 차를 팔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야만 쌍용자동차의 미래가 밝아지고, 우리들이 염려하는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마힌드라에 대해서도 생각합니다. 그들이 인도에서 정직한 기업, 신뢰받는 그룹이라고 얘기하지만, 우리가 봤을 때는 쌍용자동차에서 기술을 가져가려고 하는 모습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마힌드라가 인도에서 사람들을 함부로 대하지 않는다면 쌍용차를 경영하면서도 그런 마음으로 회사를 운영했으면 좋겠습니다.

굴뚝에 올라온 지 8일째 되던 날, 아내와 아이들, 처제가 공장 앞에 왔습니다. 매일 통화하면서 아리고 아프지만 손을 잡아줄 수 없어 눈시울이 뜨거워졌습니다. 힘들었을 아내, 존댓말 쓰는 중학생 딸, 고집 센 아들을 보며 마음이 아팠습니다. 노동조합 일을 핑계로 남편으로, 아빠로 역할을 하지 못했던 기억들이 떠올랐습니다. 그러다 갑자기 눈시울이 붉어지면서 당신이 떠올랐습니다. 제 아버지입니다. 전남 곡성의 시골마을, 저희 아버지는 공무원이셨습니다. 가족에게는 엄하셨지만 이웃에게는 한없이 친절하셨습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사회에 나가서 절대 남들에게 피해를 줘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을 듣고 자랐습니다. 쌍용자동차에 들어와 노동조합을 알게 되고, 민주노조에 대한 열망에 들떠 있는 저를 걱정하셨지만, 아들의 모습을 말없이 지켜봐주셨습니다. 2009년 5월이었습니다. 3000명이 넘는 정규직·비정규직 노동자들을 해고하겠다는 회사에 맞서 공장에서 숙식을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죽음의 그림자가 공장을 덮치기 시작했습니다. 비정규직 노동자가 가장 먼저 목숨을 끊었고, 창원과 평택공장에서 잇따라 자살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죽음을 막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때 고향집에서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아버지가 큰 병에 걸려 의식이 없는 상태로 중환자실에서 한 달 넘게 사투를 벌이고 계셨습니다. 저는 정리해고로 공장에서 쫓겨나야 하는 동료들 생각 때문에 아버지가 얼마나 아프신지 몰랐습니다. 조금만 더 관심을 가졌더라면 당신을 살릴 수 있었는데, 당신의 숨이 넘어가는 순간에도 저는 공장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2009년 6월 15일, 그렇게 3일장만 치르고 공장 안으로 돌아왔습니다. 그제야 당신의 부재를 느꼈고, 공장 안에서 남몰래 펑펑 울었습니다. 엊그제도 홀로 계신 어머니에게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어머니는 전화를 하실 때마다 사랑한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저는 그 말이 입 속에서 빙빙 돌고 밖으로 나오지 않았습니다. 눈물이 쏟아집니다. 창근에게 보이기 싫어 고개를 들고 공장 지붕을 바라봅니다.

오늘도 많은 분들이 굴뚝을 찾아주셨습니다. 비정규직을 다룬 최초의 상업영화 <카트>를 만드신 명필름 심재명, 이은 대표님이 아침 일찍 손을 흔들어 주셨습니다. 성탄절, 많은 분들의 발걸음과 응원으로 힘이 납니다.

그리고 친구들을 생각합니다. 청춘을 바친 노동자들을 쫓아내고 공장을 분할매각하려는 회사에 맞서 공장 굴뚝에서 213일째 홀로 싸우고 있는 스타케미칼 차광호, 추위와 전자파로 점점 시야가 흐려지고 어지러워 정신을 잃을 것 같은 증상이 점차 심해지고 있다는 씨앤앰 광고탑 농성 임정균·강성덕, 비정규직 법과 제도를 없애라며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몸을 땅에 대는 오체투지 행진을 하고 있는 기륭전자 조합원들, 40일을 굶고 병원에 실려 가서도 단식을 계속하겠다고 고집을 부린 코오롱 해고자 최일배…. 이들을 지켜봐 줬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와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불의에 저항하는 사람들입니다.

성탄절이 저뭅니다. 공장 앞에서 천막 한 조각 없이 밤을 새우는 동료들을 뒤로 하고 잠을 청하려고 합니다. 6년 만에 공장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우리가 일했던 이곳에서 보고 싶은 동료들과 함께 사람 내음 가득한 차를 만들고 싶습니다. 웃음 넘치는 차를 팔고 싶습니다. 그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2014년 12월 25일 성탄절에

쌍용자동차 70m 굴뚝 위에서 김정욱이 보냅니다.

<김정욱 민주노총 쌍용자동차지부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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