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한 연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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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실에서]우울한 연말

“종북” “종북” 하기에 신은미씨의 주장을 한 번 살펴봤습니다. 도대체 무슨 말을 했기에 저렇게 종북 공격을 받는지 궁금해진 것입니다. 그런데 종북 혐의를 둘 만한 말들이 쉽게 눈에 띄지 않습니다. 신씨 인터뷰에 따르면 북한은 언젠가는 우리와 통일을 해야 할 상대이고, 통일에 대비해 북한을 더 잘 알고 이해하자는 차원에서 자신이 북한을 방문했을 때 보고 겪은 북한의 모습을 알리자는 게 책을 내고 ‘통일콘서트’를 여는 취지인 듯합니다. 이게 문제될 것 같지는 않습니다. 보수단체는 북한의 3대 세습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북한을 찬양하는 듯한 발언을 했다고 신씨를 경찰에 고발까지 했는데 신씨는 “북한을 찬양한 적이 없다”고 반박합니다.

신씨가 북한을 방문하고 나서 쓴 책 <재미동포 아줌마 북한에 가다: 내 생애 가장 아름답고도 슬픈 여행>은 문화체육관광부에 의해 ‘2013년 우수문학 도서’에 선정됩니다. 통일부도 이 책을 홍보하는 동영상 프로그램을 만들어 통일부 홈페이지에 올렸습니다. 책 내용에 이적성이 흔적이라도 있었다면 ‘박근혜 정부’에서 감히 신씨의 책을 우수문학 도서로 선정하는 비정상적인 일을 할 리가 없었을 겁니다. 애국 보수단체도 조용했습니다. 그 사이 책 내용이 바뀌었을 리는 없고, 그렇다면 보수단체의 시각이 바뀐 게 틀림없습니다. 신씨가 통일콘서트랍시고, 북한에서 만났던 보통사람들의 평범한 일상을 떠들고 다니는 게 못마땅해진 겁니다. 북한은 가난하고, 인권을 탄압하고, 김정은이 독재를 하고, 한마디로 사람 살 데가 못 되는 그런 곳이어야 하는데 신씨가 엉뚱한 얘기를 하니 눈엣가시가 됐겠지요.

그래서 신씨에게 떡하니 종북 딱지를 붙입니다. 그 위력이 대단합니다. 신씨는 느닷없이 종북주의자로 몰립니다. 통일콘서트는 종북콘서트로 둔갑하고, 논란도 꼭 앞에 ‘종북’이 붙습니다. 종북 거미줄은 이렇게 신씨를 옴짝달싹 못하게 옭아맵니다. 심지어 대통령까지 나서 한마디합니다. “일부 편향된 경험을 북한의 실상인 양 왜곡 과장하면서 문제가 되고 있다”며 “북한 인권결의안이 유엔에서 압도적으로 통과됐는데 당사자인 대한민국에서 그 정반대 이야기가 나오는 것은 극히 편향되고 왜곡된 것”이라며 종북 공세에 가세합니다. 백색테러엔 눈감으면서 대통령과 다른 생각, 다른 주장을 종북으로 보는 그 인식이 편향되고 왜곡된 것 아닐까요. 대통령은 일부분만 보면 안 된다고 했는데, 부디 국내 정치도 그러시기를.

보수 시민단체가 고발하고, 경찰이 수사에 착수합니다. 대통령은 수사고 뭐고 종북으로 규정합니다. 뭔가 잘 짜여진 각본대로 흘러가는 것 같지 않습니까.

진짜 소름끼치는 건 정부 선정 우수문학 도서 저자를 태연하게 종북주의자로 몰아가는 보수단체의 천연덕스러움입니다. 1년 만의 반전은 우리 사회가 그만큼 우클릭되고 있다는 방증이 아닐까 합니다.

얼마 전 상갓집에서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과 이야기하는데 느닷없이 북한 방문을 하는 이희호 여사와 박지원 의원을 욕하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어르신들이 “맞다. 미친 놈들 아닌가”라며 동조하고…. 문득 종편이 떠올랐습니다. 뉴스가 수다로 전락하고, 그 수다가 다시 사실로 둔갑해 사람들의 의식을 지배하는 그런 나라가 되고 있는 건 아닌가라는 자괴감과 함께.

급기야 철없는 고등학생을 앞세운 백색테러까지 등장하고, 그 고교생을 어른들이 ‘구국지사’, ‘투사’로 부르며 영웅시합니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이거 원. 일본 자민당의 압승이 남 얘기처럼 들리지가 않습니다.

시간이 과거로 과거로 숨차게 달려가는 것 같은데 다시 연말을 맞는 이 모순, 이율배반에 머리가 멍합니다. 하늘도, 땅도, 거리도, 마음도 얼어붙었습니다. 크리스마스 캐롤도, 연말 인사말도 칼바람 속에 갇혀버린 듯합니다. 내일, 아니 새해엔 새로운 해가 뜨긴 뜰까요.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 참 우울한 연말입니다.

<류형열 편집장 rh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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