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락하는 유가엔 날개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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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 산유국의 미국 셰일가스 견제, 서방의 러시아 길들이기 ‘음모론’ 대두

유가는 어디까지 떨어질까, 그리고 거침없이 떨어지는 유가는 내년 세계 경제의 축배일까 독배일까.

예상치 못한 유가 하락에 전 세계 국가들의 희비가 엇갈리고 있다. 당장 오일머니로 남부러울 것이 없었던 중동 산유국들의 재정이 눈에 띄게 나빠졌고, 고성장을 달리던 러시아는 위기에 빠졌다. 반면 원유 수입비중이 컸던 미국 및 서방선진국과 아시아 국가는 긍정적인 기대 속에 상황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과거와 달리 세계 경제가 맞물려 있어 러시아와 산유국의 침체는 글로벌 경기 전체에 악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업종별로도 명암이 엇갈린다. 내수업종과 해운·항운 등 운송업체는 전망이 밝아졌지만 석유화학, 신재생에너지 관련 업종은 당분간 고전을 면치 못할 전망이다.

일각에선 배럴당 30달러까지 하락 전망

11월 28일 경기도 고양시의 한 주유소에서 휘발유를 리터당 1500원대에 판매하고 있다. | 김창길 기자

11월 28일 경기도 고양시의 한 주유소에서 휘발유를 리터당 1500원대에 판매하고 있다. | 김창길 기자

한국석유공사에 따르면 뉴욕상업거래소(NYMEX)에서 12월 18일(현지시간) 거래된 ‘내년 1월 인도분’ 서부텍사스산 원유(WTI)는 전일 대비 2.36달러 내린 배럴당 54.11달러를 기록했다. 런던 석유거래소(ICE) 선물시장에서도 같은 날 브렌트유는 전일 대비 1.91달러 하락한 배럴당 59.27달러에 마감됐다. WTI 유가는 2009년 5월 5일(53.84달러) 이후, 브렌트 유가는 2009년 5월 19일(58.92달러) 이후 최저 수준이다.

배럴당 90달러 내외에서 시작했던 유가의 추락은 드라마틱했다. 하반기에만 50% 가까이 유가가 떨어졌다. 과거 유가의 심리적 저항선이자 지지선은 배럴당 80달러였다. 일각에서는 유가가 배럴당 30달러대까지 떨어질 수 있다는 전망까지 나오고 있다.

유가 급락의 배경은 지난 7월부터 시작된 달러화 강세였다. 국제 투기시장에서 달러화가 강세를 띠면서 투기세력이 빠지기 시작했다. 가격은 빠지는데 공급은 꾸준히 증가했다. 미국은 셰일오일 생산이 증가하면서 원유생산이 늘었다. 캐나다 샌드오일까지 가세하면서 북미지역 원유생산이 전반적으로 증가했다. 이런 와중에 석유수출국기구(OPEC)도 생산이 늘어났다. 사우디아라비아, 이라크, 쿠웨이트 등이 꾸준히 생산량을 확대한 데다 리비아와 이란의 원유생산이 회복됐다. 지난 11월 OPEC 회의에서 감산이 무산되면서 OPEC 카르텔이 깨어질 수 있다는 전망까지 제기됐고, 원유 가격은 급격히 떨어졌다. OPEC 내부에서는 이번 원유 과잉생산이 북미에서 시작된 만큼 OPEC가 생산을 줄이기는 어렵다는 반론이 많다. 아랍에미리트 에너지 장관은 “국제유가가 배럴당 40달러까지 하락하더라도 OPEC가 즉각적으로 감산에 나서지는 않을 것”이라며 “만약 유가가 40달러까지 하락하더라도 적어도 3개월은 상황을 지켜본 후에 결정할 문제”라고 말했다.

수요는 늘지 않았다. 세계 경기 침체가 계속되면서 원유 수요 전망은 하향조정됐다. 세계 원유 수요 전망은 올 4월 일일 9280만 배럴에서 9월에는 9240만 배럴로 오히려 40만 배럴이 감소했다. 내년에도 당초 예상은 일일 9406만 배럴이 필요할 것으로 전망했다가 9353만 배럴로 53만 배럴이 축소됐다.

미국발 셰일혁명은 유가의 미래를 더 어둡게 했다. 토러스증권 전망을 보면 올해 셰일오일 생산량은 1일 407만 배럴로 전체 원유생산 1375만 배럴의 29.6%에 이를 전망이다. 셰일오일 생산비용이 배럴당 30~70달러 수준이라는 것도 유가를 떨어뜨리는 요인이다. 원유가 배럴당 100달러 선을 유지해서는 셰일오일을 당해내기 어렵게 됐기 때문이다. 만약 셰일오일 생산기술이 비약적으로 늘게 되면 원유생산국들의 채산성은 더 빠질 수 있다. 때문에 일각에서는 음모론도 나온다. 원유가격 하락은 중동 산유국들이 다분히 의도적으로 유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원유 가격을 떨어뜨려 미국의 셰일오일을 견제하고 OPEC의 원유시장 점유율을 방어하기 위해서라는 얘기다. 이런 음모론이 맞다면 원유 가격은 배럴당 30달러까지 떨어지고 당분간 저유가 시대가 계속될 수 있다.

실제 원유 가격이 떨어질 유인은 충분하다. 중동국가의 경우 원유 생산비용은 배럴당 15달러 내외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중동국가들은 생산비용 이상의 폭리(?)를 취하며 부를 창출해 왔다. 다만 중동국가들의 균형수지를 위한 목표 유가는 평균 103달러라는 게 문제다. 리비아, 알제리, 나이지리아, 이란, 베네수엘라, 이라크 등은 110달러가 넘어야 재정균형을 맞출 수 있다. 나라 살림이 급속히 악화되는 만큼 유가를 무기로 장기전에 들어가기는 어렵다는 얘기다.

하나금융경영연구소 정귀수 연구위원은 “현 상황은 미국의 석유업체들을 고사시키려는 사우디와 저유가를 감내하더라도 셰일오일 생산을 유지하려는 미국 사이의 힘겨루기로 볼 수 있다”면서 “60달러 수준의 유가를 감내할 수 있는 국가는 전 세계에서 사우디뿐”이라고 밝혔다.

추락하는 유가엔 날개가 없다?

또 다른 정치적 음모론이 있다. 이른바 러시아 길들이기다. 크림반도 합병을 계기로 갈수록 미국과 서방에 대립각을 세우는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유가 폭락을 유도한다는 내용이다. 러시아는 원유와 에너지 수출이 전체 수출액의 60%에 달한다. 러시아의 원유생산 원가는 배럴당 52달러다. 균형재정을 위한 유가는 100달러 수준이다. 러시아의 상황은 급박하다. 12월 16일 러시아 중앙은행은 긴급통화정책회의를 열고 기준금리를 6.5%포인트나 인상했다. 러시아의 기준금리는 17%에 달한다. 러시아 주요 주가지수 중 하나인 RTS지수는 2009년 4월 이후 최저 수준으로 하락했다. 국채 30년물 금리는 12.5%까지 올랐다. 달러 대비 루블화의 환율은 연초보다 48%, 유로화 대비 루블화의 환율은 43% 폭락했다.

돌발 변수에 세계경제 불확실성 커져
문제는 세계 경제다. 금융위기 이후 침체에 시달리고 있던 세계 경제는 뜻하지 않은 변수에 직면했다. 유가 하락에 대한 시나리오는 두 가지다. 먼저 긍정적인 시나리오를 보자. ‘유가 하락→에너지 비용 절감→기업 비용 절감 및 이익개선→가격 하락→소비구매력 향상→수요 증대’다. 부정적인 시나리오도 있다. ‘유가 하락→산유국 침체→대산유국 수출 감소→글로벌 금융 불안’ 등이다.

추락하는 유가엔 날개가 없다?

경험적으로 보면 긍정적 시나리오에 대한 기대가 높다. 특히 원유수입 비중이 높은 나라일수록 유가 하락은 무역수지를 개선하고 성장률을 높이는 경우가 많다. 국내 경제도 마찬가지다. 연구기관마다 다르지만 유가가 10% 떨어지면 국내총생산(GDP)이 평균 0.25%가량 오를 것으로 전망된다. 유가가 10% 하락할 경우 GDP 증가율은 한국은행이 0.2%, 에너지경제연구원은 0.29%, 한국개발연구원(KDI)은 0.21%, 현대경제연구원은 0.27%로 내다보고 있다.

다만 대중동 수출 감소는 피하기 어렵다. 한국의 대중동 수출비중은 6%로 일본(7%)과 비슷한 수준이다. 유가가 배럴당 60달러 이하로 떨어지면 중동국가들의 재정적자가 심해져 경기침체가 올 수 있다.

주요 연구기관들은 내년 중반까지는 유가 하락이 지속적으로 유지될 것으로 보고 있다. 목표 유가도 배럴당 50~70달러로 하향조정한 상태다. 기획재정부 관계자는 “유가 하락은 장기적으로 세계 경기를 끌어올리고 한국 경제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줄 것으로 본다”며 “다만 러시아와 중동지역의 수출이 줄어들고 강한 달러로 인해 외환시장의 불확실성이 커지는 것은 부담”이라고 말했다.

<박병률 경향신문 경제부 기자 mypar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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